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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CE

‘오징어 먹물’은 천연 항암제

머리카락 염색은 과학적으로 불가능

  • 강석기 동아사이언스 기자 sukki@donga.com

‘오징어 먹물’은 천연 항암제

‘오징어 먹물’은 천연 항암제

오징어 먹물이 인기를 끌자 먹물 마케팅이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다.

오징어를 먹지 않는 나라가 많다지만 우리나라에서 오징어는 남녀노소 즐겨 먹는 식재료다. 아울러 오징어의 친척뻘인 문어나 낙지도 우리 식탁을 풍성하게 한다. 그런데 이 녀석들(분류학 용어로는 두족류)은 모두 몸 안(장과 항문 사이 등 쪽)에 먹물주머니가 있어 요리할 때 떼어내야 한다. 그냥 놔두고 요리를 하다간 먹물주머니가 터져 음식이 지저분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오징어 먹물이 인기다. 검은깨, 검은콩 같은 ‘블랙 푸드(black food)’ 열풍에 편승해 오징어 먹물도 몸에 좋다며 먹물이 들어간 요리를 메뉴에 올리는 식당이 늘고 있다. 급기야는 오징어 먹물을 넣었다는 염색약도 나와 인기를 끌자 지난해 10월28일 식품의약품안전청(이하 식약청)은 이례적으로 기자회견을 열어 오징어 먹물이 염색효과가 전혀 없다며 소비자들에게 현혹되지 말라고 조언했다. 아울러 해당 업체들에게는 허위·과대 광고 여부를 조사하겠다고 경고했다. 오징어 먹물의 실체는 무엇일까?

멜라닌과 뮤코다당 함유

두족류 생물들이 먹물주머니를 갖고 있는 이유는 위급할 때 ‘연막전’을 쓰기 위해서다. 한국해양연구원 김웅서 박사는 “물총을 쏘듯 먹물주머니를 수축시키면 먹물이 발사되면서 시야를 시커멓게 가린다”며 “때로는 자신과 크기나 모양이 비슷한 미끼를 만들어 습격자의 눈을 다른 데로 돌리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오징어 낚시 현장을 취재한 프로그램을 보면 낚시에 걸려 올라오면서 허공에 먹물을 뿌리는 오징어의 절박한 저항이 포착되곤 한다.

오징어나 낙지 먹물의 검은색은 멜라닌 때문이다. 멜라닌은 두족류뿐 아니라 동물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색소로 사람의 머리카락이나 피부색도 멜라닌 때문이다. 멜라닌은 아미노산인 타이로신이 변형된 분자에 여러 가지 분자와 단백질이 달라붙은 복잡한 고분자로, 아직까지 정확한 구조는 알려져 있지 않다. 멜라닌은 짙은 갈색인데 고농도로 존재하면 검게 보인다.



나이가 들면서 흰 머리카락이 하나둘 생기는데 이는 멜라닌을 만드는 세포가 제대로 기능을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징어 먹물의 멜라닌을 공급해 머리색을 찾아준다는 건 가장 이상적인 해결책이 아닐까 싶다. 기존의 염색약은 멜라닌과 전혀 관계없는 화학물질로, 머리카락에 들어가 검은색을 낼 뿐이다. 그럼에도 식약청은 왜 이런 ‘천연 염색약’에 철퇴를 가했을까.

“오징어 먹물은 착색제(색소)일 뿐 염모제가 아닙니다. 따라서 오징어 먹물로 머리카락을 염색한다는 건 말이 안 되죠.”

식약청 의약외품과 김미정 연구사의 설명이다. 머리카락의 색도 멜라닌 때문인데 왜 외부에서는 멜라닌을 공급할 수 없다는 것일까. 김 연구사의 설명이 뒤따른다.

“머리카락 구조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모발은 멜라닌이 든 모피질을 비늘 같은 구조의 모표피가 감싸고 있죠. 그런데 모표피 사이의 틈이 0.6nm(나노미터, 1nm는 10억분의 1m)밖에 안 되기 때문에 멜라닌 같은 큰 분자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염모제 전문업체인 동성제약 연구소 조봉림 이사는 모발염색의 메커니즘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염색을 해봤다면 알겠지만 염모제 자체는 색이 없다. 여기엔 p-페닐렌디아민 같은 염모제 성분이 들어 있는데, 크기가 작은 분자여서 모표피 사이를 뚫고 들어가 모피질에 침투할 수 있다. 여기에 과산화수소 같은 산화제를 처리하면 p-페닐렌디아민 분자 사이에 결합이 생겨 고분자가 되면서 색이 나온다. 결국 ‘오징어 먹물 염색약’은 일부 업체들이 오징어 먹물의 검은색을 이용해 염색 메커니즘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호도한 고도의 상술이다.

오징어 먹물 염색약은 엉터리지만 사실 오징어 먹물은 오래전부터 색소로 쓰였다. 18세기 후반 독일 드레스덴의 야코프 세이델만 교수는 오징어 먹물을 처리해 색소로 만드는 방법을 개발했다. 이렇게 얻은 색소가 ‘세피아(sepia)’로 그리스어로 ‘오징어’란 뜻이다. 세피아는 오징어의 속명이다. 식탁에 오르는 갑오징어의 학명은 Sepia esculenta이고 무늬오징어는 Sepia lycidus다. 한편 동해안에서 많이 잡히는, 우리가 보통 오징어라고 말하는 것은 살오징어로 학명이 Todarodes pacificus로 약간 거리가 있는 종이다.

지금은 다양한 화학색소가 개발돼 오징어 먹물 색소는 거의 쓰지 않지만 세피아는 ‘회색 기운이 있는 짙은 갈색’의 이름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한편 사진 분야에서도 세피아란 용어가 쓰이는데 사진이 오래돼 변색된 것 같은 효과를 의미한다.

오징어 먹물 들어간 음식 인기

검은깨, 검은콩, 블루베리 같은 ‘블랙 푸드’ 열풍이 불면서 오징어 먹물이 들어간 음식도 덩달아 인기다. 오징어 먹물 파스타는 기본이고 먹물이 들어간 과자, 빵, 두부까지 나왔다. 검은콩이나 블루베리의 검은색(사실은 짙은 자줏빛)은 안토시아닌이나 레스베라트롤이라는 색소 때문이다. 이 색소들의 항산화 효과 때문에 노화 예방과 항암효과가 있다는 것.

그런데 같은 블랙 푸드라도 오징어 먹물의 효과는 색깔(짙은 갈색을 내는 멜라닌) 때문만은 아니다. 오징어 먹물에는 멜라닌이라는 색소 외에도 뮤코다당류가 들어 있다. 뮤코다당이란 주로 동물의 결합조직에 존재하며 점성을 띠는 다당류로 여러 종류가 있는데, 히아루론산 같은 물질은 보습성분으로 화장품 제조에 많이 쓰인다.

1990년대 초 일본 아오모리산업연구센터 마쓰에 하지메 박사팀은 원양산 오징어(Illex argentinus)의 먹물에 든 뮤코다당류 일렉신(illexin)에 종양억제 활성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쥐에게 암세포를 주사하면 2~3주 뒤 모두 죽지만 매일 일렉신 화합물 0.2mg을 주입할 경우 65%가 살아남았다. 일렉신은 암세포를 공격하는 대식세포를 활성화해 항암효과를 내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연구결과가 방송된 1995년 이후 일본에서는 오징어 먹물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국수, 라면, 스파게티 같은 면류는 물론 오징어 먹물 김치까지 나왔다고 한다. 앞으로 오징어 요리를 할 때는 이런 문구를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오징어를 다듬을 땐 먹물주머니를 떼어내지 마세요. 거기엔 항암물질이 들어 있답니다!”



주간동아 2009.01.27 671호 (p72~73)

강석기 동아사이언스 기자 sukk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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