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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의 Art & the City

인간의 조건과 ‘장님 코끼리 만지기’

  • 김지은 MBC 아나운서·‘예술가의 방’ 저자 artattack1@hanmail.net

인간의 조건과 ‘장님 코끼리 만지기’

인간의 조건과 ‘장님 코끼리 만지기’

비디오 아티스트 하비에르 테예스의 작품 ‘Production still from Letter on the Blind, For the Use of Those Who See(2007)’: Super 16 film transferred to high-definition video, color, sound: 상영시간 약 35분

학기 중엔 한 손에 샌드위치를, 다른 한 손으로는 미처 읽지 못한 과제를 들고 생활했기 때문에 학교 친구들과 저녁을 함께한 어제, 이렇게 여유 있게 식사한 게 얼마 만이냐며 다들 감격스러워했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고단했던 학교생활에 대해 한마디씩 했지만, 화제는 자연스럽게 작품으로 옮겨갔습니다. 친구들이 손꼽은 몇 개의 작품 중에 여러분께 꼭 소개하고 싶었던 작품이 포함돼 있어 저는 얼마나 기쁜지요. 오늘은 베네수엘라 출신의 비디오 아티스트 하비에르 테예스(Javier Tellez, 1969~ )의 16mm 단편 필름을 감상해볼까 합니다.

2008 휘트니 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던 휘트니 미술관의 비디오 룸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특이했던 것은 등장인물의 자막에 그들의 목소리가 함께 더빙돼 있었다는 겁니다. 보통 영화에서 무심히 흘려보낸 등장인물의 이름이 귀에 콕콕 박히는 느낌은 참으로 생경했습니다.

잠시 후 영화가 다시 시작됐습니다. 무대는 오랫동안 방치된 브루클린의 매캐런 파크(McCarren Park) 수영장. 물 빠진 수영장 한구석에 여섯 명의 맹인이 앉아 있습니다. 이들은 피리 소리가 나는 쪽으로 한 명씩 다가가 무엇인가를 만지며 그 느낌을 말하죠, 앞을 못 보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도 함께.

이 겨울 ‘엘리펀트 맨’ ‘뻐꾸기 둥지…’ 보면 새로운 의미



“두꺼운 고무 같아요. 그런데… 따뜻해요. 따뜻한 것만 없다면 자동차 타이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앞이 안 보였어요. 사람들은 한두 시간쯤 혹은 하루, 아니 일주일쯤은 눈을 가리고 생활해볼 수 있겠죠. 하지만 그건 눈이 먼다는 것과 완전히 다른 거죠. 언제든 눈앞의 가리개를 벗을 수 있으니까요.”

“와! 처음엔 벽이라고 생각했어요. 거의 부딪힐 뻔했다니까요. 마치 커다란 도마뱀 같은데… 피부에 털이 났어요. 귀는 깃털만 없다뿐이지 마치 독수리 날개 같고. 정말이지 많은 것에 집중해야 해요. 사람들이 많은 곳을 지날 때면 제 옆 사람을 신경 써야 하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조바심이 나죠.”

“세상에! 플라스틱으로 된 큰 벽 같은데 막 움직여요. 긴 손 같은데, 축축한 걸로 봐서 이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 같아요. 밝다, 어둡다는 개념 자체가 없어요. 시각이 완전히 죽었기 때문이죠. 간혹 시력을 되찾는 사람도 있는데, 저는 싫어요. 한두 시간이라면 모를까, 삶의 방식을 새로 다 배워야 하는 것이 두려워요.”

“길이는 서른 켤레의 신발을 합쳐놓은 것 같고 높이는 1층짜리 건물 같아…. 하지만 등줄기를 만져보면 생명이 박동치는 것을 느낄 수 있어. 난, 너를 들을 수 있어. 나 이제 가볼게. 안녕, 다시 보자!”

“어휴, 지독한 냄새! 내가 만지는 걸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모르겠어요. 앞뒤로 막 움직이는데 이러다가 나를 밟아버리면 어쩌나 싶어요. 마치 안개가 자욱한 길을 달리는 차를 탄 느낌이죠.”

“카펫이나 가구가 연상돼요, 털이 달린 소파 같은…. 어디 가니? 떠나는 거니? 피곤해졌니? 아, 여기 있구나. 얘도 호기심이 많은 것 같아요, 이리저리 움직이는 걸 보면. 꿈을 꾸는 거나 깨는 거나 제겐 마찬가지죠. 소리가 들리면, 그게 바로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이죠.”

무엇보다 제 가슴을 친 대사는 ‘다시 보자(See you later)!’였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다시 보자’니요. 보이는 사람의 언어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언어와 세계를 얼마나 지배하고 있는 건지요.

이들이 만진 것은 다름 아닌 코끼리였습니다. 대표적 시각매체인 영화에서, 관객은 코끼리의 존재를 오직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서만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작품은 아이러니하게 보여줍니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인도 우화에서 착안한 이 작품은 ‘차이’ 때문에 사회로부터 소외된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시각 위주의 예술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합니다. 안타깝게도 이 작품을 비디오 가게에서 빌릴 수는 없으니, 오늘은 여러분께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엘리펀트 맨’과 잭 니콜슨 주연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를 꼭 보실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이 겨울, 인간 존재의 조건은 무엇인가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여러분께 선사할 것입니다.



주간동아 2008.12.09 664호 (p70~71)

김지은 MBC 아나운서·‘예술가의 방’ 저자 artattack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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