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64

2008.12.09

문명 사라진 세상 인간 광기의 지옥도

메이렐레스 감독의 ‘눈먼 자들의 도시’

  • 심영섭 영화평론가·대구사이버대 교수

    입력2008-12-01 18: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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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명 사라진 세상 인간 광기의 지옥도

    ‘눈먼 자들의 도시’에는 서술은 있으되 묘사가 없다. 깊은 심연으로 입을 벌려 자신들을 맞이하는 이 음화 같은 세상에 대한 인물들의 고뇌와 고통의 이중주가 오히려 미약해진 것이다.

    백색공포, 백색소음이란 말은 들어봤어도 백색맹인이란 말은 처음 들어보신 분들을 위해 먼저 이 증상을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어느 날 눈앞이 하얗게 변하면서 동공 안에서 뭔가 줄줄 흘러내리는 느낌이 든다. 시력이 갑자기 상실되고, 이후로는 오직 흰색 세상만이 펼쳐진다. 혹 지금 나도 이 백색실명 바이러스의 감염자가 아닌가 눈을 비비는 분들이 있다면, 걱정 마시라.

    물론 여러분도 눈치챘겠지만 세상에 이런 전염병은 없다. 노벨상 수상 작가인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에만 있는 병이다. 이 전염병으로 어느 날 경찰관이, 안과의사가, 창녀가, 아이가, 노인이 시력을 잃기 시작한다. 맹인이 돼버린 이웃의 차를 훔친 도둑도, 맹인을 데려다준 경찰관도, 그 맹인의 아내도 시력을 잃는다. 다만 한 사람, 이상하게도 안과의사의 아내만이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비전’을 가지고 이 모든 광경을 목격한다. 차라리 눈이 멀었으면 싶은, 제 손으로 제 눈을 찔러버리고 싶은 광기의 지옥도를.

    온갖 추한 행태 상상 초월한 묘사

    원작 소설을 읽어보면 그 묘사의 지독함이란 상상을 초월한다. 개들은 죽은 자들의 시체를 파먹고, 백색 맹인들을 수용한 시설에는 오물과 쓰레기가 널려 있다. 게다가 사라마구는 단 한 문장도 띄어쓰기를 하지 않는 독특한 작가로 유명하다. 따라서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는다는 것은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을 복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에이즈나 사스(SAS) 같은 괴질이 돌았을 때, 전 세계가 이 전염병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목도한 분들이라면 이해할 수 있는 것, 사라마구가 은유하는 ‘실명’ 안에는 문명이라는 당의정의 껍질을 벗겼을 때 천둥벌거숭이로 돌아다니는 인간 본성의 처참한 밑바닥이 입을 벌리고 있다.

    문제는 이 문제적 소설을 영화로 만들겠다고 나서는 감독이 줄을 섰다는 것이다. 하지만 50대 중반부터 소설을 썼고, 그보다 먼저 뼛속 깊이 골수 공산당원이었던 이 포르투갈의 노작가가 절대 판권을 내줄 리 없다. 그럼에도 감독들은 끊임없이 이 난공불락의 소설을 원했다. 왜 아니겠는가. ‘본다’는 문제. 영화 역사에서 본다는 것을 시각적 이미지로 다루는 것 자체가 자의식 있는 감독으로서는 충분히 구미 당기는 도전과제였으니.



    그리고 마침내 사라마구와 똑같은 포르투갈어를 쓰는 브라질 감독 페르난도 메이렐레스는 자신의 소원을 이룰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메이렐레스는 그럴 자격이 있는 감독이기 때문이다. 그의 전작 ‘시티 오브 갓’은 어린 갱의 처참한 일상을 면도날 같은 편집과 역동적 스타일로 재현한 브라질의 ‘영 갓 파더’ 같은 작품이고, 전 세계 평단의 호평을 얻기도 했다.

    원작 해석에 지나치게 충실…서술 있으되 묘사는 없어

    그런데 오늘 본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는 왠지 원작의 무게에 눌린 듯하다. 원작의 충실한 번역본 같은 느낌이랄까. 관객들의 감정적 장악력이 부족해지면서 이야기는 그저 밋밋하게 흘러간다. 그렇다고 영화가 맹탕인가 하면 또 그건 그렇지 않다.

    일단 메이렐레스 감독은 열쇠구멍의 눈이나 모든 영상이 흘러내리는 것 같은 백색의 이미지로 보는 것을 잃어버린, 즉 통찰력과 분별력을 잃은 백색 맹인의 상태를 시각화한다. 영화 초반부 끊임없이 등장하는 유리와 거울을 통한 반사 이미지들은 이들이 ‘보고’ 있는 상태에서도 여전히 보지 못하는, 즉 자기중심적인 자기애에 빠져 산다는 것을 은유한다. 물론 의사와 그의 아내가 갇히게 된 수용소 장면 이후에는 카오스 같은 거대한 폐허의 도시가 장관으로 펼쳐진다.

    문명 사라진 세상 인간 광기의 지옥도
    굶주린 들개처럼 서로의 육체와 영혼을 드잡이하는 살육과 공포의 장소로 변해가는 집단수용소. 나와 남을 나누고, 몇 안 되는 자원을 약탈하며 권력은 생성된다. 공포와 위협으로 사람을 장악하려는 악당들을 움직이는 것은 끝없는 탐욕과 약탈이다. 고귀한 품격의 의사는 창녀와 몸을 섞고, 그것을 다시 아내가 목격한다. 반대로 여자들을 바쳐야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권력의 횡포 앞에서 남자들은 침묵한다.

    원작 소설이 충격적인 것은 이 모든 서술이 지극히 냉정하고 객관적이며, 감정적인 수식어가 없다는 점이다. 덮어두어 독자들의 가슴에 더 생채기를 내는 이러한 서술은 그러나 영화의 장으로 넘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는 서술은 있으되 묘사가 없다. 깊은 심연으로 입을 벌려 자신들을 맞이하는 이 음화 같은 세상에 대한 인물들의 고뇌와 고통의 이중주가 오히려 미약해진 것이다. 한 예로 왜 싱싱한 육체의 아름다운 창녀는 눈먼 흑인 노인과 살려고 마음먹는가?

    줄리안 무어를 비롯해 마크 러팔로,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등 라틴계 배우들과 아시아계 배우들의 다국적인 열연에도 영화가 아쉬운 것은 이 때문이다. 영화는 끝으로 갈수록 인간성에 대한 묵시록적 비전보다는 공포영화에서 흔히 보이는 집단 탈출기처럼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보는 방법으로 영화를 본 뒤 나중에 원작을 읽는 백지상태의 관람을 권해본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감독부터 백색실명 바이러스에 걸려 백지상태에서 시작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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