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63

2008.12.02

산업화가 훌쩍 떠난 곳 강물은 잔돌이 되라 하네

한때 사람들 북적이던 ‘목계장터’ 이젠 막막한 아름다움

  • 정윤수 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입력2008-11-26 11: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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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업화가 훌쩍 떠난 곳 강물은 잔돌이 되라 하네

    밀레의 ‘건초를 묶는 사람들’.

    화가 루소와 밀레가 파리를 떠나 퐁텐블로 근처의 작은 마을 바르비종으로 떠난 직접적인 이유는 콜레라 때문이었다. 19세기 중반, 갑자기 창궐한 콜레라 때문에 대도시는 순식간에 죽음의 냄새로 뒤덮였다. 많은 사람들이 도시를 떠났고, 그 행렬에 젊은 화가들도 끼여 있었다. 루소와 밀레는 바르비종으로 갔다. 그러나 이들의 동선이 ‘도시에서 시골로’ 향한 것이었고, 그 직접적인 이유가 콜레라 때문이기는 했어도 그들의 빛나는 그림이 단지 그런 이유 때문에 그려진 것이라고 말해서는 부족하다. 그 심미적인 이유를 찾기 위해서는 19세기 중엽의 양대 예술 사조인 낭만주의와 사실주의의 기이한 결합을 살펴봐야 한다. 당면한 현실을 벗어나 어디론가 훌쩍 떠나서 낯선 지형지물 속에서 생의 이면을 들여다보고자 했던 것을 낭만주의라 하고, 반면에 당대의 현실 앞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은 채 사람과 사회의 본질을 생생하게 그려내고자 했던 것을 사실주의라고 한다면, 이 두 가지 흐름이 서로 맞물릴 까닭은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바로 이 갈림길 때문에 서로 등을 돌린 채 다른 길로 걸어가는 모습처럼 보일 수도 있다.

    산업화 초기 참혹한 삶 자연성 상실한 근대의 병

    그러나 다음의 이유 때문에 낭만주의와 사실주의는 동전의 양면이요, 손등과 손바닥의 관계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선 둘 다 당대 현실에 대해 지극한 애정과 환멸을 동시에 가졌다는 점이다. ‘낭만적’이라는 말의 통상적인 뉘앙스 때문에 낭만주의는 현실 바깥을 바라보면서 상념에 젖은 어떤 경향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슈베르트의 음악이 절실하게 들려주다시피, 19세기 중엽의 가열된 국가주의 경향 때문에 유럽의 여러 지역이 정치적 반동의 길을 걷게 된 상황에서 그 어떤 모색도 저항도 실험도 하기 어려웠던 예술가의 내적인 망명을 낭만주의는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나그네’는 표면적으로는 사랑을 잃고 떠나가는 방랑자의 독백이지만, 그 정황에는 속수무책의 시대를 살아가는(1815~1848, 비더마이어 시대) 방황하는 예술가의 고독이 배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기형도의 애틋한 절망시를 1980년대라는 정황을 거둬내고 읽기 어려운 까닭과 마찬가지다.

    그와 같은 정황에서 사실주의도 등장하는 것이다. 쿠르베나 도미에의 그림은, 괴테나 베토벤이 열렬히 추구하고 나폴레옹이 그것을 실현하는가 싶었던 ‘전체로서의 조화로운 세계’에 균열이 가고, 오히려 국가주의와 초기 산업화에 의해 시민적 삶의 기틀이 위협당하는 상황을 정면으로 응시한 것들이다. 도미에의 삼등열차에는 과도한 노동에 시달린 사람들이 서로의 몸에 의지하여 간신히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바르비종으로 떠난 루소와 밀레는 바로 이런 명령을 충실히 따른 것이었다. 그들이 파리의 콜레라를 피해 떠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이 그들의 그림을 다 말해주는 것은 아니며, 더욱이 그들이 그린 ‘전원 귀향’풍의 그림이 한가롭게 들녘에 앉아서 일하는 농부를 스케치한 것이라고 짐작해서는 결코 안 될 일인 것이다.



    초기의 거친 산업화에 따라 런던과 파리에서의 생의 조건은 열악하였고 하층민의 일상은 과도한 노동의 반복이었으며, 그리하여 빅토르 위고가 레 미제라블로 미리 썼고 찰스 디킨스가 어려운 시절로 변주한 산업화 초기의 참혹한 삶은, 밀레가 보기에 자연성과 신성(神性)을 상실한 근대의 병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밀레는 자연으로 돌아가 그 빛나는 햇살, 가히 신의 은총이라 찬양하고 싶은 그런 소박하면서도 고결한 경지의 삶을 그렸던 것이다. 그들은 결코 한가로운 전원생활자가 아니었다.

    충주를 스치면서 남한강이 여주와 서울로 거슬러 올라올 때, 목계에 이르러 드넓어지고, 때마침 오후의 시간대라면 사멸해가는 빛에 의하여 더욱더 ‘막막한 아름다움’(김우창)을 보여준다. 그 옛날 목계장터가 은성하였을 때 이곳은 인천, 서울, 정선, 충주, 단양은 물론이고 소백산 너머 영주나 예천 사람들과 치악산 아래위의 원주나 제천 사람들까지 드나들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버스조차도 맹렬한 속도로 커브를 돌아나가는 작은 마을이 되었다. 이곳에 신경림의 시비(詩碑) 목계장터가 서 있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靑龍) 흑룡(黑龍)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天痴)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있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업화가 훌쩍 떠난 곳 강물은 잔돌이 되라 하네

    신경림 시비. 남한강은 목계에 이르러 드넓어진다(오른쪽).

    신경림 시인 한국 사회 잃어버린 서정 위로

    앞에서 19세기 미술가들의 맹렬한 선택을 언급했듯이, 신경림의 이 시 또한 한가로운 전원시가 결코 아니다. 박목월의 시를 슬며시 바탕에 드리우되, 그 원작시가 절묘하기는 하였어도 지나치게 ‘목가적’인 것임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을 만큼, 신경림의 변용된 이 시는 1960~70년대 한국 사회의 어떤 뿌리 뽑힌 서정을 위로해준다. 시 속의 세계는 이미 산업화에 의하여 뒤로 물러선 다음이었다. 문제는 산업화의 맹렬한 기세가 투박하고 경쟁적인 일상을 촉진할 뿐, 진정으로 친밀하고 행복한 세계가 되지는 못하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신경림은 바르비종의 밀레처럼 자연성과 신성이 인간의 삶을 감싸주는 시를 썼던 것이다.

    이곳에서 신경림만 시를 쓴 것은 아니다. 독특한 언어감각을 보여주는 박라연도 목계리라는 시를 썼는데, 시 속에서 박라연은 “가도 가도 산뿐이다가/ 차 파는 오두막집이 보인다/ 그 주인은 이미 산(山)의 일부이면서/ 바람의 일부일 것이다”라고 썼다. 이런 서정은 목계리와 그 앞의 남한강 그리고 그 배후의 산들을 지그시 응시하여 얻은 결실이다.

    이런 시들에 더하여, 강가에 서서 다시 기억해볼 만한 시는 정희성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이다. 이 시를 진정한 뜻에서 ‘민중시’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시 속에 정치적 암구호가 깔려 있어서가 아니라, 당대 현실을 견고하게 받아들이는 자세에 있다. 마치 도미에의 삼등열차나 밀레의 이삭 줍기가 보여주는 견실한 삶의 태도처럼.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 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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