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46

2008.07.29

밑줄 긋는 남자 外

잠 못 드는 여름밤, 머리맡에 두고 보면 좋은 책

  • 입력2008-07-23 12: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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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줄 긋는 남자 外

    카롤린 봉그랑/ 이세욱 옮김/ 열린책들 펴냄

    여름밤은 짧지만 길다. 높은 기온과 습도는 안락한 수면을 방해하고 열린 창틈으로 모기라도 들어왔다면 숙면은 기대하기 힘들다. 끈적끈적한 여름밤, 창문을 열어봐도 후텁지근한 공기. 그렇다면 이 지루한 여름밤엔 무엇을 해야 할까.

    여기 한 여자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독서 중이다.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의 ‘영혼’을 느끼기 위해 그가 빌려갔던 책을 맨몸으로 읽는다. 마치 섹스를 나누듯 그녀는 두근두근 책을 읽는다. 짜릿할 만큼 매력적이지 않은가. 이름도 상큼한 카롤린 봉그랑의 소설 ‘밑줄 긋는 남자’다.

    로맹 가리를 흠모하는 그녀, 콩스탕스는 너무나 사랑한다는 이유로 로맹 가리의 책은 1년에 한 권만 읽기로 결심한다. 로맹 가리의 강렬함을 대체할 소설이 없어 슬퍼하던 그녀는 어느 날 우연히 밑줄 그어진 책을 발견한다. 밑줄 그어진 부분들은 콩스탕스의 내면을 모두 읽어내기라도 했다는 듯 원하는 대답을 들려준다. 놀라운 우연에 탄복한 콩스탕스는 밑줄을 그어놓은 ‘남자’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귀여운 추격자는 책 속의 수많은 단서를 통해 새로운 책을 빌리고 또 귀중한 단서를 발견해낸다. 예컨대 “이런 나는 당신이 아름다운 여자인지 아닌지 그것조차 모르고 있군요”라는 구절은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나에겐 당신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내게 순종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라는 문장은 벅찬 고백으로 받아들인다.

    자유분방하고 톡톡 튀고 섹시한 연애담



    밑줄 긋는 남자 外

    <b>강유정</b><br>문학·영화 평론가

    흥미로운 것은 밑줄은 밑줄일 뿐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밑줄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유추하고 발견하는 것은 콩스탕스의 마음, 그녀의 간절한 자세다. 콩스탕스는 실제 남자를 만나 연애하듯 사랑의 열병에 시달린다. 그가 거절의 구절에 밑줄을 그어놓으면 좌절하고, 고백의 문장에 밑줄을 그어놓으면 하루 종일 흥분해서 지낸다.

    밑줄 긋는 남자의 매력은 뭐니뭐니 해도 자유분방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콩스탕스의 캐릭터다. 어찌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밑줄 그어진 문장들을 보며 기뻐하고 슬퍼하는, 게다가 그와의 만남을 준비하는 콩스탕스는 독서의 매력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흥미로운 책은 연애처럼 삶을 활기 넘치게 한다. 콩스탕스는 이러한 책의 매력을 실제 연애담에 담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밑줄로 이어지는 얼굴 없는 남자와 콩스탕스의 연애는 지적이면서도 섹시하다. 잘 모르는 상대를 사랑하는 것, 이것처럼 완벽한 사랑의 조건이 어디 있을까? 밑줄 긋는 남자를 읽다 보면 어느새 콩스탕스처럼 수줍고 섹시하게 맨몸으로 책을 읽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책은 무더운 한여름 밤에 적합하지 않을까.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밑줄 긋는 남자 外

    박경리 지음/ 마로니에북스 펴냄

    나이는 자꾸 드는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쉰이 되고 예순이 돼도 다르지 않을까 생각하면 벌써부터 막막하다. 종종 산다는 게 깊고 어두운 숲을 걷는 것 같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막막하다 해서 돌아갈 수도 없다. 더더욱 주저앉아버릴 수는 없는 일. 여름날 늦은 밤, 상념은 더 깊어진다.

    그 밤에 이 시집을 펴들고 박경리 선생과 만난다. 선생은 여든이 넘어서까지 20년 넘게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이랑에 쭈그리고 앉아 고추농사를 지으며 글을 썼다. ‘옛날에 내가 꽃을 심었을 때 밥 나오나 하면서 어머니는 꽃모종을 뽑아버리고 상추씨를 뿌렸다’는데 선생은 그런 시절을 보내고도 두 손 두 발로 기어다니며 농사를 지었다.

    책은 4장으로 나뉜다. 1장의 ‘산다는 것’에서는 ‘그렇게도 많은 눈물 흘렸건만 청춘은 너무도 짧고 아름다웠다’며 지난날을 회고한다. 어느덧 ‘모진 세월 가고… 편안하다 늙어서,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고 한다. ‘어쩌다 글 쓰는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지만 그곳은 길이 돼주었고 스승이 돼주었다’고 한다.

    몇몇 시편에서는 세상의 비애를 말한다. 4장의 ‘까치설’에서는 ‘음식 내놓을 마당도 없는 아파트 천지, 문이란 문은 굳게 닫아놓고, 까치설이 아직 있기는 하냐’고 묻는다. ‘일 잘하는 사내’에는 ‘다시 태어나면 일 잘하는 사내를 만나 깊고 깊은 산골에서 농사짓고 살고 싶다. (중략) 돌아가는 길에 그들은 울었다고 전해 들었다’는 내용이 있다. 선생은 ‘왜 울었을까’ 물었다지만 선생의 그 대답은 내 가슴마저 저미게 한다. 살아가면서 가장 만족스런 순간이 고작 그런 것인가 하는 회한 때문이다.

    슬픔과 괴로움 넘어 인간으로 사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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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박준</b><br>여행작가·‘On The Road’ ‘언제나 써바이 써바이’ 저자

    선생에게는 생명 가진 것의 고통이 곧 삶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숨이 탁 막혀온다. 하지만 선생은 인간의 숙명 같은 이 모든 것을 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근근이 자맥질하며 시간을 견디는 가엾은 존재일지언정 인간에게는 숙명을 변모시키는 아름다운 정신이 있다. 여기에 사는 즐거움은 여기에 사는 슬픔이자 괴로움이지만,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야 할 시간이라는 것도 숙명이기 때문이다. 기왕 그렇다면 덜 괴로워하며 살 수 있지는 않을까.

    책 말미에는 진주여고 졸업반 시절 교복 입은 박경리의 사진이 있다. 선생이 그렸다는 ‘순정만화 여주인공’ 그림도 볼 수 있는데, 영락없는 소녀 취향이라 웃음이 나온다. 나무판에 그림 그리는 화가 김덕용의 그림은 책에 온기를 보탠다. 고스란히 살아 있는 나무판의 자연적인 질감이 선생의 글과 만나 빛난다. 책을 읽고 나니 마음이 고요해진다. 언젠가 긴 잠에 들 때는 편안하게 잠들리라. 선생의 말대로 ‘불멸이란… 끝이다’. 그러니 그날이 올 때까지는 오늘 밤에도 내일 밤에도 홀가분하게 잠들라.

    내 인생, 단 하나뿐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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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딘 고디머 지음/ 이소영·정혜연 옮김/ 민음사 펴냄

    여름밤, 묵직한 열기와 불면의 고통을 이겨보겠다는 심산으로 신예 작가들의 책을 무심코 집어들었다가는 더 깊은 불면으로 빠져들기 쉽다. 그들의 책은 트렌디 드라마처럼 중독성이 강해 일단 책장을 펼치면 새벽이 오는 것도 모르고 날을 새게 만들기 때문이다. 기욤 뮈소의 ‘구해줘’나 리저 러츠의 ‘네 가족을 믿지 말라’ 같은 책은 그래서, 잠이 오지 않는 여름밤보다는 시간의 속도를 조절해야 하는 장소나 상황에 적합하다. 예를 들면 소개팅 상대에게서 ‘애프터’ 전화를 기다릴 때나 좁은 좌석에 몸을 구겨넣은 채 10시간 넘게 하늘을 날아야 할 때다.

    여름밤에 피해야 할 대상에는 작품성뿐 아니라 지루하기로 따져도 인류 문학사에 남을 고전작품도 포함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비롯해,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남은 양을 확인하게 하는 책들은 자칫 책장을 덮고 인터넷 브라우저를 작동시키거나 DVD 리모컨을 들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름밤에는 ‘중용의 도’를 아는 책이 필요하다. 끈적하지 않고, 지나치게 심각하지 않으며, ‘정말 (삶이나 사랑·사람 등이란) 그런 걸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하는 생각을 하며 부담 없이 책장을 덮을 수 있는 책. ‘내 인생, 단 하나뿐인 이야기’가 그 좋은 예다. 이 책은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나딘 고디머가 자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작가들에게 부탁해 모은 31편의 작품으로 이뤄진 단편소설집이다.

    나딘 고디머는 자선공연을 하는 음악가들처럼 문학가들도 함께 선행을 실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30명의 작가에게 편지를 썼고, (‘당신 인생 최고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작품을 보내주면 그것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 수익금으로 좋은 일을 하겠습니다’) 작가들은 기꺼이 이에 화답했다. 말하자면 이 책은 한 작가의 선행 제의에 대한 존 업다이크, 오에 겐자부로, 우디 앨런, 아서 밀러, 수전 손택 등의 화답인 셈인데 이 시대 최고의 작가들이 모인 만큼 잔잔한 감동과 무언가를 생각하게 하는 힘을 가진 작품들로 빼곡하다.

    최고의 작가들 31편 단편소설 흥미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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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심정희</b><br>‘에스콰이어’ 패션디렉터

    대부분의 작품이 30분 안에 읽을 수 있을 만큼 짤막해서 하루에 한 편, 욕심나는 날엔 두세 편을 읽어도 부담 없다는 점도 장점. 내 경우, 한두 편을 읽은 다음 불 끄고 누워 만약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을 모아 단편 선집을 만든다면 누구누구를 꼽을까 생각하면서 잠을 청하는데 양을 세듯 작가의 얼굴을 그리다 보면 어느새 잠에 빠져든다.

    그리고 이건 우리끼리만 하는 이야긴데, 이 책에는 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 수 없고, 무얼 읽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읽은 곳을 되풀이해 읽어야 하는 ‘집중력 강화용’ 작품도 몇 편 있다. 그러니 잠이 오지 않는 ‘진짜 불면의 밤’에는 그 작품들을 읽으면 된다. 장담하건대 수면제만큼은 아니더라도 양파 반쪽이나 따뜻한 우유 한 잔보다는 효과가 좋을 듯.

    돌로레스 클레이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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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티븐 킹 지음/ 김승욱 옮김/ 황금가지 펴냄

    미국의 공포소설가 스티븐 킹은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데이트 약속을 깜박 잊게 만드는 것, 불 위에 올려놓은 저녁밥을 홀랑 태우게 만드는 것, 런던발 뉴욕행 비행기에서 뉴욕이 가까워질수록 아쉬워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제 직업입니다.”

    빙고! 우리는 지금 기나긴 여름밤을 함께 보낼 동반자를 찾았다. 당장 서점에 가 그의 이름이 적힌 책을 사서 읽기로 하자. 그 순간 당신은 컴컴한 동굴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며, 뒷덜미를 잡아끄는 공포에도 동굴 끝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서 한순간에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게 된다. 그 다음에는? 다 읽고 나서 간신히 숨을 고른 후 잠에 들면서, 혹시 침대 밑에 뭔가 있지 않을까 불안해하는 것이다.

    스티븐 킹은 그런 사람이다. 그는 또 말한다. “아무도 나를 우리 시대의 토머스 울프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내가 결코 사기꾼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겸손의 말이다. 물론 그는 토머스 울프(‘그대 다시는 고향에 못 가리’)도 윌리엄 포크너(‘압살롬, 압살롬’)도 레이먼드 카버(‘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줘’)도 아니고, 동시대 작가인 폴 오스터(‘거대한 괴물’)나 코맥 매카시(‘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도 아니다.

    사실 나는 이렇게 언급하면서 ‘단 한 권’을 골라야 하는 이 코너의 아쉬움을 슬쩍 달랜 셈이기도 한데, 어쨌거나 위의 작가들이 이른바 ‘본격 문학’의 영토 안에 있다면, 스티븐 킹은 공포추리 장르라는 ‘바깥의’ 영토에서 그만의 독특한 작업을 비축해왔다. 1973년의 첫 작품 ‘캐리’를 시작으로 ‘샤이닝’ ‘미저리’ ‘쇼생크 탈출’ ‘러닝맨’ ‘스탠 바이 미’ ‘애완동물 공동묘지’ 등을 써서 최고의 판매부수와 팬을 거느린 공포 작가다.

    美 해안마을 두 모녀의 치명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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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정윤수</b><br>칼럼니스트· ‘축구장을 보호하라’ ‘100과 사전’저자

    그의 작품이 엄청난 판매부수를 기록한 것은 기본적으로 이야기가 다음 페이지로 넘기지 않으면 안 되는 숨막히는 긴장으로 충만하기 때문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그가 미국 중산층의 일상 공간을 곧잘 배경으로 삼기 때문이다. 즉 미국인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공간(학교, 놀이터, 교회, 슈퍼마켓, 자동차, 놀이공원, 거실)에서 벌어지는 공포 이야기에 매료됐다. 그러니까 귀신은 침대 밑에 실제로 있는 것이다.

    자, 이제 그의 수많은 대표작 중에서 단 하나의 작품을 골라보겠다. ‘돌로레스 클레이본’이 그것이다. 그의 대표작들이 그렇듯 이 작품도 영화로 제작되어 크게 흥행했다. 원작 소설이나 영화 모두 잘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미국 동북부의 작은 해안마을에서 벌어진 치명적인 사건들, 두 모녀의 이야기다. 줄거리는…? 직접 읽어보기 바란다.

    이 소설을(또는 비디오라도) 읽고 나면 당신은 잠든 아내와 딸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게 될 것이다. 평생 지켜주고 싶은 마음으로. 만약 당신이 여성이라면, 깊은 밤이지만 엄마(어머니가 아니라 엄마)에게 전화를 걸게 될 것이다. “엄마, 미안해요.” 그런 말을 아직 한 번도 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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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욤 뮈소 지음/ 전미연 옮김/ 밝은세상 펴냄

    미리 말씀드리지만 이 추천은 무더운 여름밤, 머리맡에 두고 볼 책이렷다. 그러니까 찐득한 여름의 허리를 뚝 베어낼 수 있는 책, 하늘의 별을 이고 사색에 잠기게 하는 책보다 한 줄기 바람 같은 책을 권하는 것이렷다.

    그렇다면 이 작가, 기욤 뮈소의 ‘사랑하기 때문에’를 권한다. 사실 내가 기욤 뮈소의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기욤 뮈소, 어찌 한 작가의 이름이 이렇게 멋있단 말인가. 여기에 비하면 아멜리 노통의 이름은 이웃집 아가씨 같고 (결코 그의 책이 평범하다는 뜻은 아니다), 댄 브라운(‘다빈치 코드’의 작가)은 펀드매니저 이름 같지 아니한가.

    그런데 기욤 뮈소. 듣자마자 입술에 착 감기는 이름이었다. 또렷하게 되살아나는 박하사탕 맛 같다. 그래서 호기심 때문에 책장을 넘긴 것이 ‘구해줘’였고 내친김에 내달려 읽은 책이 ‘사랑하기 때문에’였다. ‘사랑하기 때문에’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들었던 생각은 ‘이 작가, 이름만 착 감기는 게 아니라 글도 손끝에 착착 감기는군’ 하는 것이었다.

    프랑스에서는 ‘기욤 뮈소 신드롬’이라고 부를 정도라지만, 솔직히 이 작가의 명성이 시대를 넘고 세대간의 벽을 뚫어 문학 제단에 길이길이 보존될 것 같지는 않다. 분명 그의 책은 문체가 치밀하거나, 문학 본연의 장중한 묘사보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전개되는 속도감 있고 감각적인 묘사가 일품이다. 특히 스토리텔링 솜씨만큼은 스펀지의 흡인력을 지녔다.

    스펀지의 흡인력 지닌 스토리텔링에 탄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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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심영섭</b><br>영화평론가·대구사이버대 상담심리학과 교수

    기욤 뮈소는 자신의 주인공들 사이에 늘 ‘고통’의 그림자를 심어놓는다(전 세대의 대표적 베스트셀러 작가 시드니 셸던과 구분되는 점이다). 마약을 하는 소녀, 사고로 또는 유괴로 자식을 잃은 사람들, 자살 직전의 여자, 아내를 잃고 현실을 둥둥 떠다니는 남자. 그가 창조해낸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상처라는 영혼의 칼질에 베어 나온 피가, 자살과 자해, 마약 주삿바늘, 노숙생활의 악취가 생의 이력서에 아로새겨 있다.

    그런데도 그는 늘 ‘서로 사랑할 때는 결코 밤이 찾아오지 않는다’고 믿는다. ‘인간을 파괴할 수 있어도 무릎을 꿇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술술 책장을 넘기다가도 어느 순간 “아!” 하면서 그가 믿는 것을 나도 믿고 싶어지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물론 주식시세나 유로 축구 결과, 광화문 촛불집회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뭐 이딴 싸구려 판타지가 있냐”면서 책을 던져버리기에 알맞은 추천이긴 하다. 그러나 남자들이 ‘칼의 노래’를 읽듯 여자들이 ‘사랑하기 때문에’를 읽는 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여성들의 영원한 욕망은 ‘사랑을 불어넣는 것’. 그 점에서 기욤 뮈소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숨겨진 본능, 그 촉수를 정확하게 건드리고 있다.

    이미지와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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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르치아 엘리아데 지음/ 이재실 옮김/ 까치 펴냄

    여름밤, 잠을 못 이룬다면 정신의 여행이 제격이다. 물론 정신여행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처럼 그럴듯한 그림으로 가득한 판타지 과학세계를 헤매도 좋고, ‘한국의 신흥종교 : 자칭 한국의 재림주들’처럼 괴이한 이무기들이 출몰하는 세속적 우주를 탐험해도 좋다. 하지만 호젓한 시간에는 좀더 고차원적인 정신세계로 떠나보는 것이 어떨까.

    인류학자이자 인공두뇌학자인 그레고리 베이트슨의 명저 ‘마음의 생태학’이나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성과 속’이 최상의 선택일 텐데, 둘 다 학술적인 성격이 짙으니 모든 독자들의 공감을 살 만한 추천은 아니겠다. 그렇다면 엘리아데가 ‘성과 속’을 내놓기 5년 전인 1952년 출간한 ‘이미지와 상징 : 주술적-종교적 상징체계에 관한 시론’이 좋겠다.

    제목은 꽤 고루하게 들리지만, 내용과 구성은 그렇지 않다(주의 : 부디 한국어판의 구태의연한 표지에 속아 앞으로 뻗던 손을 거두는 실수는 하지 말자). 본디 저널리스트였던 엘리아데가 여기저기에 기고한 논고와 미발표작을 모아 펴낸 책이기 때문에 그리 어렵지 않은 주제의 원고 묶음에 가깝고, 또한 각각의 글은 흥미진진하다.

    종교적 상징물에 어떤 깊은 뜻이 담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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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임근준</b><br>미술·디자인 평론가

    하지만 이 책은 그저 흥미를 돋우고 재미를 선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꼼꼼히 읽고 나면 어떤 예술작품을 보더라도 새로운 세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학습의지가 있다면 누구라도 엘리아데에게서 ‘고래의 상징을 독해하는 법’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부작용이라면 한동안 하찮은 작품을 봐도 시간을 초월한 상징물로 분석하게 된다는 점이다. 저자가 주로 유럽, 중동, 인도의 종교적 상징을 다루므로 한국인 처지에서는 직감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상징들을 머릿속에 집어넣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도 좋겠다.

    이곳저곳에서 강의를 하다 보면 외양은 서구화됐지만 타 문화의 상징을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종종 보게 된다(예를 들어 문화적 배경이 다른 동양인이 하리 쿠퍼가 연출한 바그너의 오페라를 볼 때 연출가가 각 배역에게 할당한 추상적 상징과 괴이한 동작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지금까지 내가 만난 한국의 바그너 팬들은 대부분 쿠퍼의 연출을 혐오하고 구닥다리 연출을 선호했다. 오래 묵은 컨벤션 쪽이 이해하기 수월한 까닭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범아시아의 종교적 상징에 대한 가르침이 결여된 것은 아니다. 우주목과 제례목이 동일시되는 중앙아시아와 북아시아의 샤머니즘을 언급할 때 저자는 그 상징체계를 간명하게 해설한다. 마찬가지로 ‘시간 이탈’ 기법을 설명하는 데는 선불교의 수행법이 지닌 상징의 요체와 딜레마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 절에서도, 요가 수행원에서도 이런 수준의 설명은 들어본 일이 없다.

    생물과 무생물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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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쿠오카 신이치 지음/ 김소연 옮김/ 은행나무 펴냄

    열대야의 베갯머리에는 역시 책이 어울린다. 납량공포 소설이나 처세 잠언서가 여름밤의 단골손님이겠지만 삶에 지친 날에는 약간 다른 의미로 잠을 잊게 하거나, 아니면 잠을 초대할 뭔가가 읽고 싶어진다. 일본의 분자생물학자 후쿠오카 신이치가 쓴 ‘생물과 무생물 사이’를 읽노라면 생명의 어쩔 수 없음이 주는 처절한 사실에 잠 못 이루다가도 그의 스토리텔링에 취해 자신도 모르게 잠에 빠져든다. 생명, 즉 살아 있음이란 그렇게도 충격적이고 몽환적인 주제였던가. 과학자로서 힘 있게, 작가로서 부드럽게 써내려가는 필력이 부럽다.

    바보 같지만 나는 가끔 잠에서 깨어날 때, ‘어제와 같은 오늘의 나’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경외감을 느끼곤 한다. 잠이 들더라도 아침이면 깨어날 것이라는, 즉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온다는, 어찌 보면 신기하기까지 한 ‘살아감의 느낌’을 그렇게 체득한다. 잠이 드는 순간은 참으로 묘한 순간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몸을 누이면 내일이 온다. 나는 살아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문장으로 이어지는 이 과학 무용담에는 이러한 사적인 순간마저 자연스럽게 오버랩된다. 과학교양서가 흘러넘치는 요즘에도 이 책이 두드러지는 이유는 저자의 사적인 순간이 수필풍으로 기록된 페이지를 넘길수록 바로 나만의 ‘사적인 순간’이 떠오르고, 결국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살아갈 수밖에 없는 수많은 생명에 일종의 슬픔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생명이란 기계처럼 완비된 것이 아니라 환경에 의해 불완전한 상태로 율동을 이어가며,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적응형 리액션’을 하고, 원래 계획한 대로 안 되면 돌아가 ‘바이패스’하는, 그러한 ‘백업의 귀결’로 가까스로 정상을 유지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생체를 구성하는 모든 분자가 끊임없이 평형을 유지하려는 ‘동적 평형’. 이에 대한 묘사는 삶의 율동이란 기적이며 신기한 것이라 말해버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어찌 보면 우리 인생을 복기한 듯한 전율을 느끼게 한다. 인생의 평형을 찾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덧없이 노력하는가.

    서스펜스 논픽션이 주는 의외의 음모와 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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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김국현</b><br>IT 칼럼니스트·‘웹2.0 경제학’ 저자

    생명이란 무엇을 위해 그렇게 자신의 분자를 갈아엎으며(신체를 구성하는 단백질은 음식물을 통해 들어온 아미노산에 의해 수시로 교체된다), 자기복제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낸 것일까. 생명은 붕괴돼가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스스로를 재구축하며 혼돈 속을 살아가는 것뿐이다. 이 ‘어쩔 수 없음’이야말로 우리 삶과 생활, 나아가 기업에까지 ‘생존’의 교훈을 주고 있다. 질서란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파괴돼야 하는 것임을 생명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의외의 음모와 반전이 기다리는 이 서스펜스 논픽션 덕에 생명이 주는 흥분으로 잠 못 이룰 수도, 생명의 교훈이 주는 안도로 깊은 잠을 잘 수도 있을 터. 하룻밤도 이렇게 양면적일 수 있다니, 여하튼 삶이란 아름다운 것이다.

    밑줄 긋는 남자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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