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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 꺼졌다, 상실 괴물이 덮쳤다

‘스포츠 스타들’ 은퇴 후 엄청난 심리적 고통 … 달콤한 사업 유혹 한순간 가시밭길 변모

  • 손석한 연세정신과의원 원장·의학박사

불이 꺼졌다, 상실 괴물이 덮쳤다

불이 꺼졌다, 상실 괴물이 덮쳤다

1990년대 프로야구 최고 스타였던 박동희(왼쪽)와 이호성.

한때 국내 프로야구계에서 큰 인기를 누렸던 해태타이거즈의 강타자 이호성 씨가 네 모녀를 끔찍하게 죽이고 자신도 투신자살한 사건이 최근 발생했다. 그런가 하면 월드사이버게임즈(WCG) 2003 스타크래프트 부문 우승자였던 전 프로게이머 이용범 씨도 3월12일 절도죄로 철창 신세를 지게 됐다. 몇 년 전엔 역시 프로야구 강속구 투수였던 박동희 씨가 사업이 부진한 상태에서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일이 있었다. 사람들은 세상 물정 모르고 운동만 하던 스타들이 사업을 벌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사기와 배신을 당했다고 입방아를 찧었다.

운동장과 다른 사회 현실 판단력 무너지기 십상

과연 그럴까? 화려한 이 전직 스포츠 스타들은 왜 ‘막다른 종착역’으로 흘러갔을까? 정신의학적 관점에서 보면 ‘잘못된 이정표’를 유추해볼 수 있다.

첫째는 ‘상실(Loss)’의 심리상태다. 누구나 ‘상실’을 경험하면 실의에 빠져 우울한 상태에 이른다. 우울한 사람들은 현실적인 판단을 정확히 하기 어려울뿐더러, 매사에 부정적 사고방식으로 행동하므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프로 스포츠 스타들은 팬들의 인기와 금전적 보상이 매우 컸던 상황에서 은퇴하면 일시에 모든 것이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그들이 느끼는 상실의 고통과 좌절은 일반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수억원대 연봉을 받던 사람이 갑자기 수입이 없어지고, 항상 주목받던 사람이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상황을 상상해보라. 과거의 화려했던 자신과 지금의 초라한 자신의 차이를 현실로 받아들이기엔 심리적 고통이 클 수밖에 없다.

둘째, ‘나르시시즘(Narcissism)’의 심리상태다. 한 사람의 스포츠 스타는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 여럿에게 둘러싸여 있다. 트레이너에서부터 식단을 관리하는 영양사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를 위해 움직인다. 구단에서도 운동을 잘하는 ‘그’를 위해 자질구레한 것들에 신경 쓰지 않게 해준다. 가족도 마찬가지다. 어려서는 부모가 ‘그’의 운동 전념을 위해 먹을 것 하나하나를 챙겨주고, 결혼하면 아내가 그 일을 대신한다.



이 때문에 ‘그’에겐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것에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은퇴 후는 사정이 다르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그’를 만날 뿐, ‘그’를 위해 행동하지는 않는다. ‘그’는 처음엔 이 같은 상황에 당황하다가 때론 화를 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고, 잘난 나를 위해 주변 사람들이 존재했던 ‘나르시시즘’의 상태는 도무지 현실사회에서는 통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에게 점점 깊은 상처만 안겨준다.

불이 꺼졌다, 상실 괴물이 덮쳤다
셋째, ‘인지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의 심리상태다. ‘인지 부조화’ 이론은 사회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Leon Festinger)가 한 사이비 종교집단을 관찰한 뒤 발표한 심리 이론이다. 지구가 곧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을 믿고 종말의 날만을 기다리던 사이비 종교 신자들에게 교주가 예언한 날은 오지 않았다. 하지만 신자들은 교주에 대한 믿음이 강해져 포교활동에 더욱 매진했다. 그들은 이미 모든 것을 바친 뒤였기에 자신들의 인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 즉 자신이 실수했음을 인정하기엔 고통이 너무 컸던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생각과 객관적 현실이 일치하지 않을 때(인지부조화 상태일 때), 인간은 객관적 현실을 ‘자신의 생각에 맞게끔’ 왜곡해 받아들임으로써 심리적 안정을 찾는다.

과거의 스포츠 선수들은 자신이 열심히 하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은 실제로도 통했다. 그러나 다른 사회적 영역, 예컨대 사업의 경우엔 현실이 그렇지 않음에도 그들은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이 같은 사실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이 과거 무엇인가에 대한 결정을 내리고 행동했기 때문에 성공했던 것처럼 지금 나의 결정과 행동도 성공에 이르는 과정일 뿐이라고 믿는다. ‘인지 부조화’ 상태에 빠진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므로 주위의 충고와 조언이 먹혀들지 않는다. ‘나는 스타였기 때문에 앞으로도 스타처럼 살아가야 한다’는 몽상적인 믿음 앞에서 현실적인 판단력은 무너지기 쉽다.

여러 사람 상대 강한 승부욕이 화 불러

넷째, ‘강한 승부욕(Strong Rivalry)’의 심리상태다. 한 명의 스포츠 스타가 그 자리에 올라서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해보라. 치열한 경쟁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수많은 운동선수 가운데 뽑히고 뽑혀 명문대와 명문 구단을 거쳐 단 한 자리밖에 없는 4번 타자 또는 주전 선발투수를 하기까지 온통 승부의 연속이다. 승부가 갈라지는 상황에서는 반드시 이겨야 했다. 여기엔 실력이 가장 크게 작용했겠지만,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강한 승부욕도 중요한 구실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강한 승부욕은 사회생활에 걸림돌이 됐을 가능성이 높다. 경쟁과 협력이 어우러지는 사회생활에서 승패에만 관심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얻기 어렵다. 되레 적을 만들 가능성이 높다. 그라운드에서의 강한 승부욕과 승리의 쾌감은 보상이 되어 돌아오지만, 사회생활에서 승부에 대한 집착과 승리의 기쁨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위협으로 돌아온다. 그는 이내 당혹감을 느낄 것이고, 단 한 사람이 아닌 여러 명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서 결코 이길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스포츠 스타들의 사업가로의 화려한 변신, 그것은 그들을 파멸로 이르게 하는 ‘달콤했지만 위험천만한 유혹’이었던 것이다.



주간동아 2008.04.01 629호 (p30~31)

손석한 연세정신과의원 원장·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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