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22

2008.02.05

동네 방송 꽉 잡은 은발의 라디오스타

소출력 라디오 방송 노인 봉사자들…“진행 힘들지만 내 목소리 들으면 피로 말끔”

  • 구가인 기자 comedy9@donga.com

    입력2008-01-30 15: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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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네 방송 꽉 잡은 은발의 라디오스타
    - S# ♬ Signal(찔레꽃 - MR)

    - S# 오프닝

    안녕하세요? 2008년의 날이 밝은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월의 마지막 주입니다. 건강하게 행복한 하루 시작해볼까요?


    ‘On Air’ 불이 켜졌다. 7평(23㎡) 남짓한 라디오 부스. 트로트곡 ‘찔레꽃’의 반주가 몇 초간 흐른 뒤, 일흔한 살의 아나운서 김영미 씨가 마이크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비록 코에 돋보기는 걸쳤으되, 목소리만은 여느 젊은 아나운서 못지않게 낭랑하다. 김씨는 2006년 11월부터 소출력 라디오 방송국 서울 마포FM(www. mapofm.net, 100.7MHz)에서 방송진행 자원활동을 하고 있다. 소출력 라디오 방송이란 FM 주파수 대역에서 1W 이하의 작은 출력을 이용해 5km 안팎의 권역을 대상으로 하는 방송을 뜻한다. 말 그대로 ‘우리 동네 방송’인 셈.

    2005년부터 마포FM을 비롯해 관악공동체라디오(www.radiogfm.net, 100.3MHz), 경기 FM분당(www.fmnara.com, 90.7MHz), 대구 영주FM(www. yfm.co.kr, 89.1MHz), 나주방송(www.najufm. com, 96.1MHz), 광주시민방송(www.icbn.or.kr, 88.9MHz) 등에서 시행되고 있는데 주로 해당 지역의 청소년, 주부, 성적 소수자, 장애인, 노인을 아우르는 ‘보통사람’들이 참여한다.



    이 가운데 김씨가 소속된 ‘행복한 하루’는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새벽 6시에 방송되는 실버 대상 프로그램이다. 월·화 팀과 수·목 팀으로 나뉘어 있는데, 김씨는 월·화 방송을 맡고 있다. 이 팀에는 김씨 외에도 3명의 아나운서가 더 있다. 김씨가 프로그램의 전반적인 진행을 담당한다면 일흔네 살의 곽기순 씨는 실버 뉴스, 장옥순(74) 씨는 명상, 막내 장성자(64) 씨는 문화가 산책을 맡아 진행한다. 이들 모두 마포노인복지관을 다니던 중에 게시판 공고를 보고 지원했다가 라디오 방송의 매력에 푹 빠졌다고 한다. 방송을 계기로 만나고 서로 친해진 것은 덤이다.

    “원래 젊었을 때 아나운서가 꿈이었어요. 방송 진행은 처음 해보는데 재미있어요.”(곽기순 씨)

    동네 방송 꽉 잡은 은발의 라디오스타

    마포FM ‘행복한 하루’ 팀. 김도환 김영미 장옥순 곽기순 장성자 씨(윗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

    진행은 하루뿐이지만 일주일 내내 준비

    프로그램은 새벽에 방송되지만, 대개 일주일 전 오후시간에 녹음한다. 오후 4시부터 한 시간가량 선곡과 리허설을 하고 본방송에 들어간다. 물론 사전에 각자 집에서 대본을 준비하고 한두 번씩 연습도 해본다.

    “첫 방송 때는 정말 떨렸어요. 자꾸 틀려서 NG도 많이 내고.”(장옥순 씨)

    “아휴, 사실 저는 지금까지도 많이 떨려요.”(장성자 씨)

    “그래도 뭐, 우리 이만하면 잘하잖아? 누가 뭐래도 우린 잘해. 안 그래?(웃음)”(김영미 씨)

    - S# 나의 삶 나의 길-BG

    김영미 아나운서 : 이번 순서는 ‘나의 삶 나의 길’입니다. 진행에 김도환 PD님께서 수고해주시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어떤 분을 모셨나요?

    김도환 PD : 네, 안녕하세요. 오늘은 우리 문학 공부를 해보겠습니다. 늦은 나이에 등단하셔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신 시인 두 분을 모셨는데요….


    이 팀에는 4명의 아나운서 외에 유일한 청일점 김도환(64) 씨도 있다. 그는 ‘김 PD’로 불리지만 맡은 일에서는 아나운서와 큰 차이가 없다. 김씨 역시 진행에 참여한다. 단, 그가 맡은 코너 ‘나의 삶 나의 길’에는 게스트가 출연하는 까닭에 매주 섭외를 해야 한다. 지난 1년여 동안 이 코너를 방문한 게스트가 100여 명에 이른다.

    “게스트는 분야가 따로 없어요. 노인 건강을 상담하는 의사 선생님이나 좋은 일을 하는 봉사자, 탤런트 최불암 씨도 와줬고요. (방송) 실력은 늘었는데 자산(아이템)이 떨어져서 큰일이에요. 그동안 아는 사람들을 통해 알음알음 게스트를 섭외했거든요.”

    방송국에 나오는 것은 일주일에 단 하루. 하지만 준비 과정은 녹록지 않다. 김 PD는 “일주일 내내 이(방송) 생각뿐”이라며 즐거운 푸념을 늘어놓는다. 아나운서 할머니들도 마찬가지다. 각자 자신의 코너에 맞는 대본을 준비하기 위해 열심히 신문을 읽고 책을 뒤지며, 때로는 취재도 다닌다. 간혹 몸이 아파 병원에 다녀와야 할 때는 어쩔 수 없이 빠져야 하는 어려움도 있다. 그럼에도 방송일은 무척 즐겁다. 이들은 특히 가족을 비롯한 주위의 응원이 큰 힘이 된다고 말한다. 마포 노인복지관에서는 “방송 진행하는 사람”이라며 알아봐주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이미 ‘스타’가 됐다.

    “아홉 살 손자가 가장 큰 팬이에요. 집에 녹음된 CD가 있는데 매번 시간을 정해 손자와 함께 방송을 듣죠.”(곽기순 씨)

    “남편이 무심한 척하는데, 그래도 저 몰래 방송을 몇 번 들은 것 같더라고요.(웃음)”(장성자 씨)

    - S# 행복한 명상-BG

    김영미 아나운서 : 이번 순서는 행복한 명상 시간입니다. 진행에는 장옥순 아나운서께서 수고해주시겠습니다.

    장옥순 아나운서 : 네, 행복한 하루 명상 장옥순입니다. 겨울에도 초목은….


    한 시간짜리 방송의 마지막 코너는 장옥순 씨의 명상이다. 명상에서 소개되는 내용은 장씨 본인 이야기가 대부분이지만, 김씨는 “그 시절을 겪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라고 말한다.

    “젊은 사람들은 모르지만 우리는 같은 시기를 겪었잖아요. 갈래머리 땋고 다니던 학창시절이나 6·25전쟁 이후 피난살이의 어려움에 대해 우리는 다들 아니까, 짠할 때가 많죠.”

    크고 요란한 매체들이 범람하는 요즘, 동네에서만 방송되는 라디오 방송은 소박하다 못해 하찮아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평범한 누군가의 삶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그의 이야기를 전하는 일은 동네 라디오만이 할 수 있다. 황혼의 에너지를 느끼고 싶다면 새벽녘 이들의 방송을 들어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라디오는, 작지만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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