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74

2007.02.27

열 받은 독일 “美 CIA 요원 체포”

평범한 시민 불법납치 사건 ‘뜨거운 감자’ … “비밀첩보 활동 말라” 대내외 경고

  • 슈투트가르트=안윤기 통신원 friedensstifter@gmail.com

    입력2007-02-16 10: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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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이 미국 정보요원 ‘잡기’에 나섰다. 1월31일 독일 법원이 뮌헨 검찰의 요청에 따라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 13명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급했다. 이들은 독일 국민 칼레드 엘 마스리(Khaled el Masri)를 납치하고 고문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쿠웨이트에서 태어난 레바논계 이민자 엘 마스리는 1985년 독일로 이주했고 바이에른주 노이울름에서 중고차 매매업을 하다 95년 독일 국적을 취득한 인물.

    2003년 12월31일, 엘 마스리는 마케도니아 스코페에서 휴가를 보내기 위해 관광버스에 앉아 있었다.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국경에서 여권 심사를 하던 마케도니아 경찰은 그를 버스에서 끌어내려 현지 CIA 팀에 인도했다. 그리고 CIA는 엘 마스리를 마취해 아프가니스탄 카불에 있는 포로수용소로 보냈다. 이후 그는 춥고 어두운 독방에 갇힌 채 구타와 고문 속에서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6개월 가까이 흐른 2004년 5월28일, CIA는 엘 마스리를 다시 마케도니아 국경 부근으로 이송해 풀어주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평범한 시민에게 갑작스레 닥친 이유는, 그의 이름이 테러조직 알 카에다의 함부르크 지부장 이름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테러리스트 칼레드 엘 마스리는 9·11테러와도 연관됐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인물. 또한 수년 전 노이울름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과 접선했다는 정보도 있었다. 마케도니아 경찰은 단지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평범한 시민 엘 마스리를 체포한 것이며, CIA는 자세한 조사과정도 없이 그를 제3국으로 이송해 포로수용소에 가둔 것이다.

    테러 용의자 체포 잇단 무리수



    ‘테러 용의자 색출’이라는 미명하에 벌어진 이러한 납치극은 한두 번이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이집트 성직자 아부 오마르는 2003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CIA 요원들에게 납치됐고, 시리아 태생의 캐나다 시민 마헤르 아라르는 2002년 튀니지로 휴가를 가던 중 경유지인 뉴욕에서 납치당해 시리아 감옥으로 보내졌다. 정확한 정보 없이 추측만 가지고 이런 일을 벌이는 통에, 이라크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 수감자의 70%, 쿠바 관타나모 기지 수감자의 40%가량이 실제로는 테러와 무관한 인물들로 확인됐다.

    다행히 살아 돌아온 엘 마스리는 2004년 6월8일 총리실과 외무부에 사건 전말을 알렸다. 이에 뮌헨 검찰이 수사에 착수, 마침내 그를 카불로 이송한 비행기 승무원 13명의 명단을 확보해 지난해 12월 이들에 대한 체포영장을 청구했다.

    그러나 힘겹게 찾아낸 납치 혐의자들의 이름-제임스 커크 버드, 에릭 페인, 헥토 로렌츠 등-이 가명일 가능성이 높아 먼저 이들의 실명 확인부터 해야 할 상황이다. 따라서 1월31일 발부된 체포영장은 용의자들이 기존 여권을 가지고 유럽 땅에 발 디딜 수 없다는 상징적 의미만 가질 뿐이다. 더욱이 미국이 독일의 요구에 따라 해당 CIA 요원들의 신병을 인도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이번 일로 유럽에서 테러 용의자를 체포한 뒤 제3국으로 옮겨 수감하는 CIA의 비밀활동이 상당부분 제약받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CIA 요원에 대한 체포영장 청구는 독일 사법부가 정치권의 눈치에도 아랑곳없이 오직 독일 국민의 안위에만 집중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사실 엘 마스리 사건은 지난 한 해 독일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였다. 독일의 정권교체 직후인 2005년 11월, CIA가 자유롭게 이용하는 비밀기지가 유럽 각 지역에 존재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폴란드와 루마니아에는 비밀수용소가 있었으며, 심지어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비판해온 독일, 스페인 등이 CIA 비밀수송기의 운항을 도왔음이 밝혀졌다.

    정치외교적 민감한 문제 수사 험난

    특히 2002년 총선 당시 “독일 청년들을 단 한 명도 이라크에 보내지 않겠다”고 약속함으로써 대역전 발판을 마련했던 슈뢰더 총리가 은밀한 방식으로 미국을 도왔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이 일로 독일 의회에 진상조사위원회가 구성되기에 이르렀다.

    2004년 불거진 엘 마스리 사건은 2006년 다시금 독일 정치권의 핫이슈가 됐다. 무엇보다도 엘 마스리가 마케도니아 경찰에 체포됐을 때, 현지 독일대사관이 과연 이 사실을 몰랐는지가 논란이 됐다. 미국 고위 관계자는 “엘 마스리가 체포된 후 독일대사관에 그 사실을 알렸다”고 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요쉬카 피셔 당시 외무장관까지도 직무 유기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미국의 사과 여부에 대해서도 독일 국민은 의심하고 있다. 메르켈 총리는 2005년 12월, 독일을 방문한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자신에게 엘 마스리 건에 관해 ‘미국 정부는 잘못을 시인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후 미 국무부 관리는 “라이스 장관이 이 사건에 대해 잘못을 시인한 바 없다”고 반박했다.

    이처럼 정치외교적으로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엘 마스리 사건은 수사가 쉽지 않고, 앞으로도 순탄치 않아 보인다. 그러나 독일 사법부는 체포영장 발부를 통해 미국의 비밀첩보 활동에 대해 경고했다. 야당인 녹색당의 크리스티안 슈트뢰벨레 의원은 “독일 역사상 초유의 쾌거”라고 극찬했다.

    한편 이탈리아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몇 달 전 밀라노 법정에 26명의 CIA 요원 및 협조자들에 대한 고발이 접수돼 재판이 진행 중이다. 비록 고발된 이들 중 법정에 출석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지만, 유럽을 제 마당처럼 휘젓고 다니던 미 비밀 정보요원들의 설 자리가 줄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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