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30

2006.04.11

정적의 목 자르고, 머리는 빌리다

정도전 제거한 뒤 금속활자 아이디어는 수용 … 유교적 사대부 탄생의 기원

  •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hkmk@pusan.ac.kr

    입력2006-04-10 10: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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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적의 목 자르고, 머리는 빌리다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헌릉(獻陵).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쌍봉릉(雙封陵)으로 왼쪽이 태종 능이다.

    정도전이 만들자고 했던 서적포의 행방은 어찌 되었던가? 조선을 건국한 혁명의 실력자가 한 말이니, 공언(空言)은 아니었을 것이다.

    ‘고려사절요’에는 공양왕 4년(1393) 정월에 “처음 서적원(書籍院)을 설치하여 주자(鑄字)와 서적 인쇄를 관장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에는 고려의 관직에 대해 서술한 부분이 있는데 “공양왕 3년 서적점(書籍店)을 폐지하고 4년에 서적원을 두었다. 주자를 관장한다”는 기록이 있다. 서적점을 폐지하고 만든 것이 서적원이었던 것이다.

    그럼 서적점이란 무엇인가? ‘고려사’에 의하면 서적점은 문종 때 처음 설치됐다. 그 뒤 충선왕 때 한림원에 합쳤다가 다시 분리됐고, 공양왕 3년에 폐지됐다가 4년에 서적원으로 부활한 것이다. 서적점과 서적원이 어떻게 다른지, 왜 바뀌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고려사’의 기록이 워낙 빈약하기 때문이다.

    1392년 1월 서적원이 설치되고, 6개월 뒤인 7월에 조선이 건국됐다. 1392년 1월은 고려에 속하지만, 국가의 권력은 이미 혁명세력에게 넘어간 시기였다. 1392년 7월28일, 조선으로 말하자면 태조 원년 7월28일 서적원은 조선의 관제(官制)로 그대로 이관된다. 서적포가 아닌 서적원이지만, 금속활자와 인쇄를 관장하는 정식 관청이 새 국가에 설치된 것이니, 정도전의 구상이 더욱 구체화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태종 이전에는 목활자로 책 만들어



    서적원에서는 실제로 책을 찍었다. 1395년 서적원에서 찍은 책인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의 중간본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대명률직해’는 명나라의 형법인 ‘대명률’에 이두로 구결을 소상히 달아 원문의 이해를 편리하게 한 책이다. 이 책에 정도전이 관여한다. 김지(金祗)가 쓴 발문에 의하면, 원래 조준(趙浚)의 명으로 고사경(高士 )과 김지가 이두로 구결을 달자 정도전과 당성(唐誠)이 윤문을 한 뒤 서적원에 인쇄를 맡긴다.

    문제는 인쇄수단이다. 발문에 의하면 백주지사 서찬(徐贊)이 조각(造刻)한 글자로 인쇄했다는 것이다. 이 활자는 금속활자가 아니라 목활자다. 목활자라니! 서적원은 주자를 관장한다 했지만, 실제 보유한 것은 목활자였던 것이다. 목활자는 활자를 제작하기 쉽고, 또 가동성(可動性)이 있지만, 견고성은 훨씬 떨어진다. 이것은 목판인쇄와 금속활자 인쇄의 중간과정이다. 아직 금속활자는 만들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금속활자의 역사에 이제 다른 한 사람이 등장한다. 태종이다. 정도전이 아니라 정도전을 죽였던 정적(政敵) 태종이 금속활자를 만들었던 것이다. 1398년 8월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두 사람은 충돌하고 정도전은 태종에 의해 제거된다. ‘태조실록’ 7년 8월26일조는 정도전의 최후를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정적의 목 자르고, 머리는 빌리다

    ① 헌릉의 정자각(왼쪽)과 신도비각. ② 개성의 선죽교. 태종 이방원은 조영규를 시켜 이곳에서 정몽주를 살해함으로써 정세를 급반전시켰다.

    정도전은 칼을 던지고 문밖에 나와 말했다.

    “제발 죽이지 마시오. 한 마디만 하고 죽겠습니다.”

    소근(小斤) 등이 끌어내어 정안군(靖安君, 太宗)의 말 앞으로 갔다. 그리고 정도전이 다시 말했다.

    “예전에 공이 나를 살린 적이 있었으니, 이번에도 살려주소서.”

    정안군이 대답했다.

    “네가 조선의 봉화백(奉化伯)이 되었음에도 만족하지 못한단 말이냐? 어떻게 이다지도 악한 짓을 한단 말이냐?” 이어 그의 목을 치게 했다.

    정도전이 말한 ‘예전’은 태조 원년인 1392년을 뜻한다. 이해 3월 이성계가 낙마(落馬)로 중상을 입자 정몽주는 김진양(金震陽), 서견(徐甄) 등으로 하여금 공양왕에게 상소를 올리게 해 이성계의 제거를 시도한다. 그리고 혁명파의 전위였던 정도전을 보주(甫州, 醴泉)로 귀양 보낸다. 혁명파의 위기를 타개한 것은 이방원, 곧 태종이었다. 이방원은 조영규(趙英珪)를 시켜 정몽주를 타살함으로써 일거에 대세를 만회한다. 정도전은 귀양에서 돌아와 공양왕을 폐위하고 이성계를 왕위에 올린다. 정도전이 예전에 나를 살려주었다고 한 말은 바로 1392년 이방원의 활약을 가리킨다.

    태종이 정몽주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정도전은 혁명의 주역으로 복귀하지만, 그가 태종과 갈라선 것도 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기세등등한 혁명의 실세 태종에게 정도전이 호의를 가졌을 리 만무하다. 그는 태조의 계비였던 강비(康妃)와 함께 태종을 경원시해 태종을 개국공신과 세자 책봉에서 탈락시킨다. 거기에 더해 정도전은 1398년 요동 정벌을 추진하면서 사병(私兵)을 혁파하려 했다. 태종의 사병도 물론 그 대상이 됐다. 두 사람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던 바, 그것이 바로 제1차 왕자의 난이었던 것이다.

    ‘양촌집’에 주자소 관련 내용 상세히 담겨

    위에서 인용한 ‘태조실록’은 정도전이 태종에게 목숨을 구걸한 것으로 그리고 있지만, 그것이 사실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므로. 어쨌거나 나는 어느 쪽도 옹호할 생각이 없다. 권력투쟁은 부모 형제도, 자식도 없는 비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태종은 아버지 이성계가 살아 있을 때 형제 방석(芳碩), 방간(芳幹)을 죽였다. 그뿐인가. 태종의 손자 세조는 왕위에 오르기 위해 형제와 조카를 살육하지 않았던가.

    정도전을 죽이고 2년 뒤인 1400년 10월 태종은 왕이 됐다. 그리고 3년 뒤인 1403년 2월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했다. 서적원이 과업으로 내걸었던 금속활자의 제작, 곧 ‘주자’를 전면에 내세우는 관청이 설립된 것이다. 그리고 서적원이란 이름은 태조 원년인 1392년 7월28일 ‘실록’에 한 번 이름을 보이고는 공식 기록에서 사라져버린다. 정도전의 제거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정적의 목 자르고, 머리는 빌리다

    계미자로 찍은 각종 서적.

    ‘태종실록’ 3년 2월13일조는 새로 주자소를 설치한 사실을 알리고 있는데 그 이유로 임금이 서적이 적어 유생들이 널리 볼 수 없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라 밝히고 있다. 그리고 예문관 대제학 이직(李稷), 총제 민무질(閔無疾), 지신사 박석명(朴錫命), 우대언 이응(李膺) 등에게 일을 맡겼다. 한데 이 중요한 사건에 대한 ‘실록’의 기록은 너무 소략하다. 권근(權近)의 문집 ‘양촌집(陽村集)’에 도리어 풍부한 자료가 있다. 권근은 주자소의 활자 제작을 기념해 ‘주자발(鑄字跋)’이란 글을 쓴다. 첫머리는 이러하다.

    [ 영락(永樂) 원년(태종 3, 1403) 봄 2월 전하께서 좌우 신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대저 나라를 다스리고자 한다면, 반드시 전적(典籍)을 널리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뒤에야 이치를 캐보고 마음을 바로잡아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결과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동방은 해외(海外)에 있어 중국의 서적이 드물게 전해지고, 판각(板刻)한 책은 쉽게 훼손된다. 게다가 천하의 책들을 판각으로는 다 출판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내가 구리를 녹여 활자를 만들고 책을 얻으면 얻는 족족 반드시 인쇄하여 책을 널리 보급하고자 하니, 정말 무궁한 이익이 될 것이다. 이 사업에 드는 비용을 백성에게서 거두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내가 종친·훈신들 중에서 뜻이 있는 사람과 같이 그 비용을 댄다면, 아마도 성공할 수 있으리라.” ]

    목판인쇄보다 금속활자가 마모성이 없어 빠른 시간 안에 더욱 많은 종수의 책을 인쇄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책이야말로 유교의 정치이념을 담보할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는 논리, 이것은 어디서 들어본 소리가 아닌가. 태종은 자신의 정적 정도전의 생각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활자를 처음 제작하는 데 막대한 비용이 들었음을 물론이다. ‘주자발’에 의하면 태종은 자신의 개인 주머니, 즉 내탕고를 털었다고 한다. 정도전은 ‘치서적포시(置書籍鋪詩)’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비용을 댈 것을 권유했지만, 정작 비용을 내어 활자를 만든 사람은 자신의 목을 자른 태종이었던 것이다.

    태종이 주자소를 설치하라 명령한 그 달 19일부터 ‘시경’ ‘서경’ ‘좌전(左傳)’의 글자를 본으로 삼아 몇 달 안에 수십 만 자의 활자를 제작했다. 권근의 ‘주자발’이 11월1일 쓰여진 것으로 보아 9개월 만에 활자가 완성되었던 것이다. 이 활자를 학계에서는 계미(癸未)에 만들어진 활자라 해서 계미자라 부른다. 계미자로 ‘대학연의(大學衍義)’‘십칠사(十七史)’ 등의 책이 인쇄됐다. ‘주자발’을 썼던 권근 역시 자신의 저술 ‘예경천견록’을 주자소에서 인쇄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계미자는 실제로 책을 토해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훗날 신권 강화의 시초 평가 ‘역사의 아이러니’

    드디어 ‘태종실록’ 10년 2월7일 단 1줄의 글! “비로소 주자소에 명하여 서적을 인쇄해 팔게 했다.” 주자소에서 어떻게 서적을 판매했는지는 밝혀진 바 없지만, 어쨌든 이 활자가 사대부를 향한 지식의 보급을 겨냥했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자료다. 나는 주자소에서 책을 인쇄해 팔라는 이 명령으로부터 조선이란 국가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과 다름없는 일대 문화적 사건이었던 것이다. 시작이 어려웠지 이후 주자소의 활자는 개량에 개량을 거듭하면서 책을 쏟아냈다. 또 주자소에서 찍는 책이란 유교국가 조선의 지배층인 양반을 만들어내는 책이었다. 유교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는 책들은 60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한반도에 사는 인간들의 사고와 행동을 결정지었던 것이다.

    금속활자로 책을 찍자는 것은 정도전의 아이디어였다. 태종은 정도전을 죽였지만 그의 아이디어를 채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권근은 ‘주자발’에서 태종에게 영광을 돌렸다.

    [ 삼가 생각하옵건대, 우리 전하께옵서는 명철한 자질에 밝은 문덕(文德)을 지니시어 만기(萬機)를 다스리시는 여가에 경사(經史)에 마음을 두시어 늘 부지런히 공부하심으로써 정치의 근원을 깊이 연구하시고, 문명한 세상을 만드는 데 마음을 두시어 도덕과 교화를 널리 전파하고자 정성을 다해 이 활자를 주조하셨습니다. 이 활자로 서적을 두루 찍으면 수만 권을 인쇄할 수 있고, 만세(萬世)에까지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사려가 깊고 머시니, 그 왕교(王敎)의 전해짐과 성수(聖壽)의 영원함도 마땅히 이 책들과 아울러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더 굳어질 것입니다. ]

    정도전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다.

    태종은 정도전의 목을 자르고 그의 아이디어를 빌려 주자소를 만들었다. 역사학에서는 정도전이 신권(臣權)의 강화를, 태종이 왕권(王權)의 강화를 추진했다고 평가한다. 제1차 왕자의 난은 신권과 왕권의 충돌이었던 것이고, 왕권이 승리했던 것이다. 하지만 왕권의 승리는 순간이었다. 태조에서 성종에 이르는 기간까지 왕권은 때로 위세를 떨쳤지만, 연산군 이후로는 그만이었다. 신권은 왕 연산군을 축출하고 중종으로 갈아치웠다. 이후 왕권이 신권을 능가하는 일은 없었다.

    신권이 승리한 기원은 언제인가? 태종이 정도전의 생각을 빌려 주자소를 만들어 책을 찍기 시작한 그 순간이 바로 기원의 시간이었다. 태종이 금속활자로 찍어낸 그 책은 바로 유교적 정치이념으로 의식화된 사대부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그 이념이란 국가는 왕의 의지가 아닌 사대부의 의지에 의해 지배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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