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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연, 그녀가 돌아왔다

천의 얼굴 전도연 “연기는 내 운명”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천의 얼굴 전도연 “연기는 내 운명”

천의 얼굴 전도연 “연기는 내 운명”
“안녕하세요~!”

9월27일 새벽 3시, 서울 강남의 한 호텔 중식당에 전도연이 도착했다. 3일간 밤낮으로 이어진 촬영에 탈진해 꾸벅꾸벅 졸고 있던 연출자와 스태프들의 눈이 번쩍 떠진다. 그녀의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생기가 번지는 것이다. 카메라가 위치를 잡고, 전기선들이 물러나고, 조명판이 옮겨진다. 그녀는 사람들을 잠에서 깨우는 ‘잠자는 숲 속의 공주’처럼 촬영장에 들어섰다.

“스케줄이 살인적”이라는 전도연의 말처럼 SBS 주말극 ‘프라하의 연인’은 일주일 내내 촬영 중이었다. 신우철, 김형식 두 명의 연출자가 A와 B 두 팀을 나누어 맡고, 배우들은 A팀과 B팀에서 돌리는, ‘컨베이어벨트’ 위를 곡예하듯 옮겨 타며 연기를 하고 있었다. 전도연은 A팀과 함께 서울 용산에서 자동차 레커 신을 찍자마자 B팀이 있는 강남으로 넘어왔다고 했다.

TV 시스템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녀가 충무로에서 ‘원톱’이 가능한 몇 안 되는 여배우이며 작품과 감독, 상대 배우를 선택할 수 있는 흥행 배우라는 데 대해서는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그런데 왜 그녀는 TV라는 ‘공장’으로 다시 넘어온 것일까.

자타 공인 ‘사랑 지상주의자’인 그녀는 “‘파리의 연인’을 만든 연출자와 작가가 불렀기에 서슴지 않고 출연 결정을 내렸다. 좋은 연출자, 배우들과 함께 연기해 즐겁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가 내심 말하고 싶었던 건 결과로 보여주겠다는 게 아니었을까 싶다.



9월23일 개봉한 영화 ‘너는 내 운명’은 개봉 첫 주 관객 수에서 1위를 했는데, 이튿날 저녁 첫 회분이 나간 ‘프라하의 연인’의 시청률은 22%였다. 공전의 히트를 한 ‘내 이름은 김삼순’의 첫 회 시청률을 앞선 숫자다. 평자들이 영화와 드라마 모두에 대해 호감을 보이고 있으며, ‘재미있다’는 입소문이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영화 ‘너는 내 운명’에서 에이즈에 걸린 티켓 다방 레지(레지는 영어 lady를 일본어식으로 읽은 것이다)인 전도연은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에서는 대통령의 딸이며 24세에 고시를 패스한 외교관 재희로 나온다. ‘너는 내 운명’이 실화에 근거한 드라마인 데 비해, ‘프라하의 연인’은 영애와 말단 경찰의 낭만적 사랑을 보여주는 팬터지다.

그녀는 밑바닥 인생과 현대판 공주의 삶을 자연스럽게 넘나든다. 또한 현실과 환상에서 각각 분명한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보란 듯이.

그러나 그 와중에 고생하는 건 보통사람들과 똑같이 피곤하고 졸리고, 부모님이 계신 집에도 가봐야 하고, 친구들도 만나고 싶은 ‘인간’ 전도연이다. 드라마 촬영에, 영화 홍보에 일정이 겹쳐 드물게 그녀가 짙은 분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 보였다. 그럼에도 얼굴은 많이 여위어 보였다.

천의 얼굴 전도연 “연기는 내 운명”

1999년에 열린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시위에 참가한 전도연(가운데). 전도연은 “사회 참여보다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만 하겠다”고 하지만, 스크린쿼터가 다양한 한국 영화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은 확고하다.

“이제 나이 서른을 훨씬 넘겼으니까, 얼굴 살이 많이 빠져서 그렇게 보이나 봐요.”

전도연은 슬쩍 고개를 돌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본다. 15년 전 말간 얼굴로 ‘존슨 앤 존슨’ 광고와 청춘드라마 ‘우리들의 천국’(1990)으로 데뷔했을 때 모습을 떠올렸을까.

레지 ~ 공주 분명한 캐릭터 창출

전도연은 15년 동안 ‘젊은이의 양지’ ‘종합병원’ ‘별은 내 가슴에’ ‘별을 쏘다’ 등 14편의 드라마를 했고, ‘접속’ ‘내 마음의 풍금’ ‘해피엔드’ ‘스캔들’ 등 9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여자 주인공들은 모두 사랑 때문에 행복해하다, 상처받지만 울부짖거나 처절하게 복수하기는커녕(예외적으로 ‘피도 눈물도 없이’가 있었으나 이 작품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이를 표현조차 못한다(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요즘 유행하는 캐릭터처럼 ‘쿠울’하게 사랑을 털어내는 인물들도 아니다.

이런 점 때문에 그녀가 출연한 작품들이 흥행에 성공하고 인기를 얻어도, 사람들은 배우 전도연의 가치를 재빨리 알아보지 못했다. 대종상과 대한민국 영화대상 등 국내 영화제에서 배우가 받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상을 받았지만, 해외 영화제의 수상이 드문 것도 그녀의 존재가 영화 자체와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전도연을 이야기할 때 가장 자주 등장하고 그녀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는 말은, ‘영화의 전도연은 없다’이다.

팜므 파탈이든, 미친 여자든, 희생자든 매우 인상적인 역할을 맡아 영화를 배경으로 반짝반짝 빛이 나는 배우가 수상에선 유리하다. 그것이 대중문화 시스템에서 ‘스타’의 의미이다.

천의 얼굴 전도연 “연기는 내 운명”

'영화 ‘너는 내 운명’

90년대 초, 서구적인 얼굴에 늘씬한 체구의 고소영과 남자들을 몸살 나게 할 만큼 청초한 심은하와 함께 활동하면서 전도연은 ‘스타’라기보다는 ‘귀여운 마스크’의 배우라는 평을 받았다. 그래서 당시 전도연의 연기력을 알아보고 캐스팅하려던 연출자들은 흥행과 시청률에 대한 ‘안전장치’로 스타급 남자 주인공이나 또 다른 메인 여자 연기자를 필요로 했다.

바로 이때 ‘다양한 역할로의 변신이 가능한’ 전도연의 장점을 알아보고, 주변의 우려에도 그를 ‘접속’(1997)에 캐스팅한 이가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였다. 심 대표는 95년을 전후하여 한국 영화계의 중심으로 떠오른, 새로운 프로듀서들 중 한 명이었다. 충무로의 도제 시스템이 아니라 유럽의 예술 영화와 영화 산업과 80년대 운동권 등을 통해 충무로에 ‘입봉’한 이들은 한국 영화가 취해야 할 새 소재를 극적이고 감정이 과잉한 이야기에서가 아니라 ‘일상성’에서 발견했다. 그리하여 한국 영화는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갔고, 연기론으로 보자면 브레히트에서 스타니슬라브스키로의 변화가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천의 얼굴 전도연 “연기는 내 운명”

새벽 3시 ‘프라하의 연인’ 촬영장에서 만난 전도연. 피곤한 발을 조금이라도 쉬게 하려고 리허설 중 구두 대신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3일 밤낮으로 이어진 일정, 그러나 그녀의 연기 때문에 NG가 나는 경우는 없었다.

그 기획들 중 하나가 ‘접속’이었다. 젊은 관객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영화에 열광했다. 평론가들과 감독들은 파마 머리에 청바지만 입고도 밋밋한 여주인공의 내면을 끌어낸 전도연의 연기에 찬사를 보냈다. 다음 영화 ‘약속’도 흥행에서는 성공했지만, 전도연은 뜻밖에 가극 ‘눈물의 여왕’과 ‘내 마음의 풍금’을 선택했다. ‘접속’을 촬영할 때만 해도 초조한 마음을 숨기지 않던 전도연은 이때 이미 배우로서 자신감과 미래를 찾아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전도연과 작업해본 감독들이 빼놓지 않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전도연을 염두에 두고 만든 역할’이라는 것. 그리고 ‘전도연 마음대로 연기하라고 했다’는 것. 전자야 예의상 나올 수 있는 말이지만, 후자는 전체 영화를 지휘하는 감독으로서는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아무 생각 없이 전도연이어야 할 것 같았다. 그는 사랑에 대한 여러 가지 느낌이 날 수 있는 유일한 배우다. 때론 섹시하고, 때론 촌스럽고, 때론 사랑스럽고 그런 악녀성이 발휘되는 배우…. 그러니 나는 여기서 거저먹고 있는 거다.”(박진표 감독, ‘너는 내 운명’ 촬영 중 씨네21 인터뷰)

“전도연 외 다른 배우를 캐스팅하기 어려운 배역이죠. 어떤 역이라도 잘 해낼 것이라는 신뢰가 있어요. 전도연이 기획을 마음에 들어해서 진행이 된 거죠.”(신우철 PD, ‘프라하의 연인’ 연출)

또 박흥식 감독은 ‘인어공주’를 소개하며 “전도연은 맡겨주면 굉장히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나는 앵글만 맞춰주면 됐다”고 말했다. ‘인어공주’에서 화면 합성으로 1인2역을 맡은 전도연은 또 다른 그를 대신해 촬영팀이 갖다 놓은 테니스공에 시선을 맞춰가며 완벽하게 두 인물 역을 소화했다.

전도연을 톱스타 A와 함께 캐스팅했던 한 연출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 인물로 다섯 가지 캐릭터 해석이 가능하다고 하면, A는 똑같은 연기를 다섯 번 했다. 하지만 전도연은 다섯 번에 다섯 명의 다른 인물을 연기해냈다. 그는 대단히 똑똑한 배우다.”

전도연으로서는 큰 변신을 시도했지만 흥행과 비평에서 실망스러운 결과를 낳았던 ‘피도 눈물도 없이’의 류승완 감독은 나중에 “전도연이 처음부터 원하는 대사 톤을 해내는 바람에 현장에서 내가 고민을 덜했다. 구미호에게 홀린 것 같았다”고까지 털어놓기도 했다.

전도연의 가장 큰 장점은 영화 속 인물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삶을 완벽하게 구성해낸다는 것. 이는 영화 속의 상황을 이해하는 능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변신이다. 대통령의 딸이든, 티켓 다방 레지든 그녀에게는 언제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다.

대통령의 딸이라면 아버지의 정치 역정에 따라 이러저러한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고, 이러저러한 성격을 가진 여자가 돼 영화 속의 이 상황에서는 이렇게 걷고, 이런 시선으로 이렇게 말하리란 것을 그녀는 안다. 시골 티켓 다방 레지라면, 어떤 가정에서 자라 어떤 우여곡절로 시골 다방까지 오게 됐는지 그녀는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별다른 연기 지도가 필요 없게 된다. 전도연은 바로 그녀가 된다.

천의 얼굴 전도연 “연기는 내 운명”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

전도연은 어떻게 연기를 하느냐고 물으면 ‘준비 없이 현장에 가서 부딪히는 편’이라고 대답한다. “계산하지 않고 그냥 감정에 몰입해 나를 내던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연기는 순발력과 본능적 영감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의 매니저는 “전도연은 대본을 잘 외우고, 한번 외우면 잊어버리질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전도연이 작품을 선택하는 순간, 이미 연기에 대한 치밀한 계산이 끝난 상태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전도연은 대본을 읽고 감정을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내적으로 정당화된 심리가 불러일으키는 행동을 보여주는 것이다. 흔히 이를 ‘자연스러운 연기’라고 하지만, 실상 이는 매우 복잡하고 논리적인 과정이다. 전도연이 인터뷰에서 “어떤 캐릭터예요?”라고 묻는 관행적 질문에 대해, 많은 다른 배우들과는 달리 직업과 등장인물 간의 관계를 이야기하지 않고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며 그 인물의 심리 분석을 내놓는 것이 바로 이를 증명한다.

‘영화의 전도연은 없지만’ 촬영현장에서 전도연이 갖는 카리스마는 대단하다. 연기에 대한 그의 지독한 집념이 촬영 내내 촬영장을 압도한다. 상대방만 나오고 자신은 나오지 않는 리액션을 할 때도 전도연은 상대의 눈을 바라보며 연기에 몰입한다. 감독들이 그렇게 전도연이 쏟아내는 에너지를 보며 “아깝다”고 말할 만큼.

‘프라하의 연인’ 촬영장에서도 호텔 엘리베이터 소음 때문에 같은 대사를 다섯 번, 여섯 번 반복하게 해도 그녀는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테이크 한 번 갈 때마다 거울을 보는 배우가 있는 데 반해, 전도연은 한 번도 거울을 보지 않았다. 메이크업 담당자가 분을 덧바르고 입술을 정리하도록 맡겨둔 채 그녀는 상대 배우만 바라본다.

어차피 예쁘게 보이는 데는 관심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전도연은 ‘베스트 드레서’로 칭찬받거나 시상식에 대단한 드레스를 입고 나와 카메라 세례를 받은 적도 없는 듯하다.

전도연은 적어도 공식적 자리에선 “연기하느라 너무 힘들었다”고 말한 적이 없다. ‘인어공주’ 촬영 때 늦가을 바다에 한 시간 동안 들어가 있어 파래진 입술로 덜덜 떨면서도 카메라만 돌아가면 능숙한 해녀 역을 해냈고, 기자들의 카메라 앞에선 커다랗게 웃었다. 여주인공 웃음의 크기가 신문 편집 때 어떻게 반영되는가를 훤하게 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온 전도연은 “바다가 참 재미있다”고 말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0명 중 8명의 여배우가 “이러저러한 장면 찍을 때 멍이 들 정도로 힘들었다”며 영광의 상처를 자랑한다. 하지만 전도연은 험한 액션 장면을 찍고도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몸으로 때운 것이다”라고 하면서 “몸이 아프니 그나마 위로가 되더라”고 말한다.

전도연은 자기 연기에 만족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스트레스를 받진 않는다고 했다. 연기 때문에 고생하는 것을 즐긴다는 뜻이다. 독서와 운동, 사진 찍기 외엔 별다른 취미도 없고 시간이 나면 부모님과 등산을 다니는 정도다. 그녀의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보면 그녀가 자신에게 얼마나 지독한지를 짐작케 하는 글이 있다. 견디다 못해 새나오는 신음 같은 글들이다. 예를 들면 하루 종일 사진 촬영을 한 뒤 써놓은 글.

‘웃음에 경련이 일어날 때쯤, 누군가 내게 이야기한다, 수고하셨습니다. 살았군.’

또 다른 글.

‘카메라는 나를 긴장시켜. 사람들은 믿지 않지.’

오랫동안 그녀를 지켜본 이들은 전도연이 이제 여배우로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한 것 같다고 말한다. 언론이 ‘해피엔드’와 ‘스캔들’의 노출 연기를 다룬 방식 때문에 그는 혼란을 겪은 것 같다. 촬영 중 막간에 혜주의 갓난아이를 안아주던 그는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자 “사진 찍으면 이상한 기사 나갈지 모른다”고 말한다.

자신을 스타로 바라본다는 것은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판다는 뜻이다. 이는 상업적인 영화 제작 시스템에서 패턴을 만들어내, 스스로를 소진시키는 함정에 빠질 위험이 높다는 말도 된다.

전도연은 스크린쿼터 지키기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또 한국 영화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여배우의 수명이 짧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배우가 되겠다고 말한다. 사회적 책임 역시 여배우로서 자의식의 한 면이다.

정상에 서서 “연기가 제일 좋다”고 말하는 전도연의 진심을 의심할 만한 징후는 아직 발견되지 않는다. 이쯤에서 관객들은 그녀에게 물어보고 싶어진다.

“진정?”



주간동아 2005.10.11 505호 (p72~75)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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