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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고

“정의는 축구장에만 존재한다”

최영미 시인의 축구 예찬 … “운동장에서는 외모·학력·배경 필요 없이 실력이 최고”

  • 최영미/ 시인

“정의는 축구장에만 존재한다”

  • “2002년에 했던 것만큼 못할 이유가 없다”
  • 딕 아드보카트(58) 신임 축구대표팀 감독이 9월29일 입국했다.
  • 꿈★을 이루기 위해서다. 우리는 2002년 6월을 잊지 못한다. 작은 축구공은 온 나라를 해방구로, 잔치마당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왜 그렇듯 미쳤던가. 독일월드컵이 8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다시 축구의 매력에 흠뻑 빠져보자. 시인 최영미가 아드보카트 감독 취임과 함께 글을 보내왔다. - 편집자 주
“정의는 축구장에만 존재한다”
‘공은 기다리는 곳에서 오지 않는다’/ 정의는 축구장에만 있다.

“나는 곧 공은 절대로 내가 기다리는 곳으로부터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깨달음은 뒷날 내 인생에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특히 아무도 믿을 수 없는 파리 생활에서 그랬다.”

축구가 얼마나 특별한 스포츠인지를 전달하고자 대한민국 작가 최영미의 자존심을 잠시 접어두고 카뮈의 권위에 기대보았다. 알제리의 대학 팀에서 골키퍼로 활약했던 카뮈는 1957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된 뒤 또 이렇게 말했다. “내가 궁극적으로 알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윤리나 의무란 축구선수로서 내가 지녀야 할 윤리나 의무와 다르지 않다.” 카뮈처럼 나도 축구에서 재미와 함께 삶의 중요한 교훈을 얻었으니, 앞으로 쓸 에세이들로 나의 감동을 널리 공유하면 좋겠다.

“세상사는 뻔해도 축구는 뻔하지 않다”

2002 한일월드컵을 전후로 나는 대한민국의 여러 신문과 잡지에 내가 축구를 좋아하는 이유를 충분하지는 않지만 아쉬운 대로 밝혔다. 그런데 아직도 나의 순수한 동기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어 김남일과 유상철을 질투하는 한국의 뭇 남성뿐 아니라 동년배 여성들로부터도 혹시 ‘섹시한 선수들과 연애에 빠진 건 아니냐’는 질문들을 심심찮게 받는다. 그런 천박한 수준으로 나의 축구사랑을 끌어내리려는 인간들에게 나는 내 속을 다 보여주지 않는다. 진실을 말해주는 대신, 나는 이렇게 둘러댄다. 이건 완전히 딴 세계야.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운동장에 나가보지 않으면 그 묘미를 모른다고, 푸른 잔디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푸른 잔디를 누비는 인간의 육체는 또 얼마나 싱싱한지, 발레처럼 우아한 몸의 예술이라고, 축구라는 마약은 즐길수록 정열이 깊어지며 새록새록 그 맛이 달라진다고…. 열 명이 물으면 나는 열 가지 다른 답으로 응수할 수 있다.



지난 5월에 소설 ‘흉터와 무늬’를 출간한 직후 만난 잡지사 기자들이 내게 왜 축구를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도 나는 카뮈의 발언을 약간 꼬아 미리 준비한 정답을 내밀었다. “세상사가 뻔하잖아요. 그런데 축구경기는 뻔하지 않아요. 공이 어디서 올지 아무도 모르죠. 운동장에선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어요.” 물론 내가 거짓말을 꾸며낸 건 아니나, 그러나 나는 핵심을 피해갔다. 내가 요즘 축구에 열광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나는 사실 정의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정의는 축구장에만 존재한다, 라고 나는 선언하고 싶었다. 거짓된 현실을 고발하며 위선이 일상화된 사회의 한가운데 자살폭탄을 터뜨리면 나만 다칠 것 같아, 자제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나는 이 날을 기다려왔다짓밟혀도 다시 일어나는 풀처럼 강인한 그들호나우두 아이마르 제라드 그리고 박지성너희들을 우리는 기다려왔다

컴퓨터를 끄고 냄비를 불에서 내리고 설거지를 하다 말고 내가 텔레비전 앞에 앉을 때, 지구 반대편에 사는 어떤 소년도 총을 내려놓고 휘슬이 울리기를 기다린다.

우리의 몸은 움직이고 뛰고 환호하기 위한 것,서로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놀며 사랑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최선을 다한 패배는 승리만큼 아름다우며, 최고의 선수는 반칙을 하지 않고반칙도 게임의 일부임을 그대들은 내게 보여주었지

그들의 경기는 유리처럼 투명하다누가 잘했는지, 잘못했는지 어느 선수가 심판의 눈을 속였는지, 수천만의 눈이 지켜보는 운동장에서는 거짓이 통하지 않으며위선은 숨을 구석이 없다.

진실된 땀은 헛되지 않을지니, 정의가 펄펄 살아 있는여기 이 푸른 잔디 위에 순간의 기쁨과 슬픔을 묻어라.



텔레비전 앞에 앉아 위성으로 생중계되는 게임을 보며 내가 왜 정의와 진실 같은 심각한 단어를 떠올리게 되었는지. 축구장과 사회를 하나의 평면에 놓고 비유해보겠다.

“선수들 육체의 언어는 구체적이며 솔직”

가로 세로 90~120m 이내의 사각형 경기장은 하나의 거대한 수족관이다. 관객은 선수들을, 선수들은 관객을 자유로이 (경기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쳐다볼 수 있다. 즉 모두가 모두에게 개방되어, 모두가 모두를 감시한다. 선수들과 감독, 그리고 심판의 일거수일투족이 그대로 관중석에 노출되어 있다. 일단 게임이 시작되면 선수들은 각자의 생각을 몸짓으로 표현하며 서로 소통한다. (소리쳐도 시끄러워 잘 들리지 않는다.) 육체의 언어는 구체적이며 솔직하다.

둥근 공 하나가 하얀 금 안에 던져지면, 22명의 선수들이 공을 향해 돌진한다. 팔을 제외한 신체의 모든 부분을 사용해 공을 이동시켜 상대의 골대 안에 집어넣으면 이기는, 축구는 경기규칙이 매우 간단한 스포츠이다. 심판의 판정시비가 있기는 하지만, 경기의 흐름을 바꾸지는 않는다. 운동장 안에서는 외모도 학력도 배경도 필요 없이 실력이 최고이다. 실력으로 상대를 막기 어려우면 반칙으로 끊기도 하지만, 고의적이고 위험한 반칙을 자주 범하면 아예 경기장 밖으로 쫓겨난다. 선수들의 자질보다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을 앞세워 선수들을 기용하는 감독은 큰 경기에서 이기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어떤가. 사회라는 무대가 경기장만큼 진실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우리의 언어가 운동장의 언어와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말’이 있는 건 속마음을 감추기 위해서라는 격언이 있듯이, 소통 수단이 오히려 원활한 소통을 방해한다.

우리나라처럼 겉과 속이 다른 불투명한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실력보다 인간관계가 사람들을 움직이는 동네에서 ‘공’은 늘 우리와 가까운, 우리가 기대하는 곳으로부터만 온다. 나와 친교가 없고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는 사람이나 조직은 내게 공을 절대로 넘겨주지 않는다. 그래서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고, 평범한 작품이 최고로 둔갑하고, 베끼기 선수인 기술자가 예술가로 대접받는다.

오로지 이기기 위해 90분 동안 미리 짜여진 각본대로만 선수들이 움직인다면, (사실 이건 불가능하다. 아무리 뛰어난 감독이라도 공의 흐름을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다.) 얼마나 재미없겠는가. 기다리지 않는 곳에서 공이 와야 경기의 수준이 높아지는 법. 내가 기다리는 곳에서, 기다리지 않는 곳에서도 공을 주고받아야 사회도 게임도 아름다워진다.



주간동아 2005.10.11 505호 (p44~45)

최영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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