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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교양 돋보기|유리알 유희

영상시대 글쓰기 종말은 오는가

그림에서 문자 읽는 새 언어능력 필요 … ‘프로그래밍 하는 자’ 디지털 정복

영상시대 글쓰기 종말은 오는가

영상시대 글쓰기 종말은 오는가

영화 ‘매트릭스’.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는 카스탈리엔이라는 어느 유토피아에 관한 얘기다. 거기에는 선별된 사람들이 모인 종단이 있었는데, 그곳의 수도승들은 종교적 제약 없이 음악, 철학, 명상 등 온갖 종류의 학예에 몰두하며 정신적 삶을 꾸려가고 있었다. ‘유희의 명인(magister ludi)’으로 불리는 최고 책임자 밑에 열두 명의 각각 다른 학예의 명인들이 있어, 이들이 종단을 이끌고 갈 영재의 발굴과 교육을 담당했다.

카스탈리엔의 수도사들은 특별한 놀이를 하며 지냈다. “가령 유희는 어떤 별의 천문학상의 위치, 바흐의 푸가 주제, 라이프니츠 또는 우파니샤드의 한 구절에서 출발할 수도 있다. 초심자는 고전음악과 자연법칙의 공식 사이를 유희 기호에 의해 대비할 수 있고, 숙달된 사람이나 명인은 유희를 첫 주제에서 무한편성까지 마음대로 진전시켰다.” 한마디로 유사와 대조의 원리에 따라 여러 학예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놀았다는 것이다.

이 고상한 놀이를 그들은 ‘유리알 유희’라 불렀다. 이는 페토르라는 사람이 이 정신적 놀이에 필요한 문자나 수, 음표나 기호 대신에 갖가지 모양과 색깔의 유리알을 사용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마치 작곡가가 오선지 위에 음표를 배열하여 곡을 만들어내듯, 학생들은 수십 가닥의 철사에 유리알을 꿰어 처음에는 자기 분야에서,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여러 분과와 장르를 넘나들며 정신적 작곡을 했다.

보편문자

피타고라스 이래로 음악과 수학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음높이는 정확히 현의 길이에 반비례한다. 음계는 수적 비례의 문제이므로, 천체의 주기는 곧바로 음높이로 번역된다. 중세 때만 해도 악보에 종종 음표 대신 태양, 지구, 달, 화성, 금성 등 천체를 그려넣곤 했다. 여기서 수학과 음악과 천문학을 나누는 경계는 사라진다. 이것이 유리알 유희의 원형인데, 카스탈리엔의 수도사들은 이를 모든 학예로까지 확장시켰다.



자기 과목 안에서만 놀 때는 언어가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하지만 여러 학예의 경계를 넘나들려면, 각 분야의 놀이들을 하나로 묶어줄 보편기호가 필요했다. “자기 과목 안에만 틀어박혀서 찾을 수 있던 지금까지의 행복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학자들이 전문적인 학문의 울타리를 부수고 보편적인 것을 향해 나아가려 했다. 새로운 정신적 체험을 꽉 틀어잡을 수 있고 교환할 수 있는 새로운 문자나 상형어를 꿈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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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가 처음 창조될 때 만들어진 그림문자 중 일부는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왼쪽은 3000년 전에 사용되던 것이고, 오른쪽은 요즘 쓰이는 것이다. 위부터 해, 산, 나무, 중간, 밭, 경계, 문을 나타낸다. 테베 카르나크 신전 벽에 새겨진 이 상형문자는 뜻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단히 아름답다(오른쪽).

유리알 유희를 위한 ‘국제적 상형어’는 중국의 한자를 닮아서 가장 복잡한 것까지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했다. 마침내 스위스 바젤 출신의 요크라토르 바질리엔스라는 사람이 유리알 유희를 위한 상형어의 원칙을 발명한다. 이로써 유리알 유희는 학문과 예술의 모든 분리된 분야들을 신비적으로 결합하는 매개가 되고, 정신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이 종합된 숭고한 예배가 된다.

상형문자

유럽에서 상형문자는 예로부터 학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이집트의 상형문자는 그리스인들에게 ‘신성한 문자’로 여겨졌고, 북구에서 발견된 루나 문자 역시 유럽의 근대인들에게 신비한 문자로 간주되었다. 상형문자는 낭만주의적 상상력의 원천이 되기도 했으나, 이 두 문자가 모양만 그림일 뿐 실은 알파벳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에 대한 낭만적 환상도 깨지고 만다.

유리알 유희의 상형문자를 발명한 요크라토르의 실제 모델은 아마 라이프니츠일 것이다. 우리는 그가 과학의 발전을 위해 보편문자를 만드는 꿈을 갖고 있었고, 또한 중국의 상형문자에도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안다. 그런 의미에서 유리알 유희의 언어, 즉 상형문자로 된 보편문자는 라이프니츠의 꿈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게다가 그는 2진법의 발명자가 아닌가.

라이프니츠는 0과 1을 가지고 모든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세상의 모든 차이를 0과 1로 환원시킬 수 있다면, 거꾸로 0과 1을 조합해 세상의 모든 차이를 만들어낼 수도 있잖은가. 그래서 라이프니츠는 2진법에서 신의 창조의 비밀을 보았다. 실제로 디지털의 원리는 오늘날 모든 아날로그적 차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보편문자가 되었다.

기술적 형상

여기서 슬쩍 다른 텍스트로 넘어가 보자. 미디어 철학자 빌렘 플루서는 인간의 소통수단이 이미지에서 텍스트로, 거기서 다시 이미지로 넘어왔다고 말한다. 즉 선사시대의 인간들이 주술적 상상력으로 이미지를 만들었다면, 역사시대의 인간들은 세계를 문자로 기록하면서 이성적 사유를 발전시켰고, 역사주의가 종언을 고한 현대의 인간들은 기술적 상상력으로 제2차 이미지의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픽셀로 이루어진 이 2차 이미지를 플루서는 ‘기술적 형상’이라 부른다. 전통적 그림과 달리 기술적 형상은 세계의 그림이 아니라 텍스트의 그림이다. 무슨 얘기인지 감을 잡으려면, 영화 ‘매트릭스’에서 화면 아래로 문자와 기호의 열이 떨어지는 첫 장면을 떠올려보라. 인간들이 현실로 알고 살아가는 그 세계는 문자와 기호의 열로 그린 그림에 불과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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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타고라스(왼쪽)는 우주를 거대한 현금(絃琴)으로 보았고, 거기서 천구의 음악을 들었다.

매트릭스의 프로그래밍에 사용된 그 기호열도 아래로 파고 들어가면 실은 0과 1이라는 숫자로 환원된다. 하지만 그 위로 갈 수도 있지 않은가. 가령 우리는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더 이상 명령어를 입력하지 않고, ‘아이콘’을 클릭한다. 그 ‘아이콘’은 바로 명령어의 그림이다. 그렇다면 그거야말로 유리알 유희를 위한 상형문자가 아닌가?

문자의 소멸?

‘도스’ 환경에서는 프로그래머나 유저나 모두 명령어를 입력했다. ‘윈도우’ 환경에서는 프로그래머가 명령어를 입력하는 반면, 유저는 아이콘을 클릭한다. 듣자 하니 요즘은 프로그래밍에도 아이콘이 사용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문자나 기호로 된 명령어가 완전히 아이콘으로 바뀌는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 프로그래머들은 아이콘과 아이콘을 음표처럼 사용해 프로그램을 작곡하는 유리알 유희를 할지도 모른다.

그때쯤 되면 아이콘도 이집트의 상형문자와 똑같은 운명에 처할지도 모른다. 이집트의 상형문자가 결국 알파벳으로 되었듯이, 아이콘도 더 이상 그림이 아니라 사실상 문자로 전락하는 것이다. 상형문자가 한갓 알파벳으로 전락하는 역사적 과정이 성경에는 바벨의 타락으로 묘사되어 있다. 카스탈리엔에서도 비슷한 고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학교에서는 명상과 묵상의 기술에 최대의 주의가 기울여졌다. 유희의 상형문자가 단순한 문자로 퇴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

아이콘이 기호로 퇴화하는 것을 ‘명상과 묵상의 기술’로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아이콘으로 프로그래밍을 한다면, 이집트의 상형문자가 실은 알파벳이듯 아이콘도 문자로 여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래에는 글쓰기가 사라질 것”이라는 플루서의 예측과 달리 글쓰기는 살아남을 것이다. 어차피 아키텍트, 즉 디지털 가상의 최종적 프로그래머는 텍스트를 읽고 쓰는 능력을 가진 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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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철학자 칸트.

세속적 수도원

헤세의 ‘유리알 유희’는 물론 상상력을 강조한 칸트 미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가 소설로 묘사한 이 가상의 유토피아가 오늘날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 요즘 흔히 듣는 ‘횡단’이니 ‘유목’이니 하는 개념들은 경계의 무너짐을 지시하고 있다. 오늘날 학문은 각 분과들이 서로 협력하는 간(間)학문적(inter-disciplinary) 단계를 넘어, 이미 분과의 구별이 필요 없는 비(非)분과적(a-disciplinary) 단계로 진화하고 있다.

헤세의 설정에 따르면 카스탈리엔은 저널리즘의 발달로 온갖 쓸데없는 글이 난무하는 시대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났다고 한다. 지금의 상황을 보자. 정신과학은 저널리즘의 노예가 되고, 자연과학은 실용주의의 시녀가 되고 있다. 여기에 지친 이들은 타락한 아카데미즘 밖에 인류 정신문화의 고귀한 가치를 보존하는 곳을 만들자고 제안하고 있다. 지금 대학 밖에 존재하는 소규모 연구모임들은 일종의 세속적 수도원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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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성 모나리자’, 1989, 장 피에르 이브랄.

빌렘 플루서 역시 비슷한 얘기를 한다. 디지털 영상의 시대에 글쓰기가 점점 더 소수 엘리트의 것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하여 미래 사회는 오직 소수의 사람만이 읽고 쓸 줄 알았던 계몽주의 이전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한다. 미래는 정말 소수의 엘리트만이 텍스트를 읽고 쓰던 중세의 수도원 문화로 돌아갈 것인가?

새로운 문맹

분명히 그런 측면이 있다. 전통적인 글쓰기는 점점 소수의 취향이 되고 있다. 젊은 세대들의 텍스트 독해 및 작성 능력은 급속히 떨어져가고 있다. 그들은 더 이상 글이 아니라 카메라폰의 영상으로 소통하는 데 더 익숙하다. 그러다 보니 대학생 중에도 글로는 “제 뜻을 시러 펴디 못할 노미” 많아, 시험 답안지에 버젓이 화살표와 다이어그램, 이모티콘이 등장하기도 한다.

상형문자는 기호이자 그림이다. 기술적 형상은 텍스트이자 이미지다. 그것은 과거의 그림과도 다르고, 과거의 문자와도 다르다. 디지털 유리알 유희의 시대에는 그림에서 문자를 읽고, 문자로 그림을 그리는 능력이 새로운 언어능력(linguistic competence)이 될 것이다.

플루서는 앞으로 인간의 사회가 ‘프로그래밍 하는 자’와 ‘프로그래밍 당하는 자’로 나뉠 것이라고 했다. 이미지를 읽거나 쓰지 못하는 대다수는 그저 영상의 소비자로 살아갈 뿐이나, 영상을 읽고 쓸 줄 아는 유희의 명인들은 세계의 프로그래머가 될 것이다.



주간동아 2005.09.06 501호 (p5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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