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91

2005.06.28

한반도 강대국 거래 ‘잔돈’이었나

60년 전 얄타회담, 세계 운명 국제질서 결정 … 한민족 고통 등 약소국 상처 현재진행형

  • 얄타=김기현 동아일보 특파원 kimkihy@donga.com

    입력2005-06-23 16: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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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 강대국 거래 ‘잔돈’이었나

    우크라이나 크림주(州)에 위치한 얄타시 전경.

    얄타협정은 강대국이 약소국의 운명을 마음대로 결정한 부당한(unjust) 거래였다.”

    5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얄타 비판’이 나온 뒤, 크림반도에 있는 인구 10만여 명의 조용한 휴양도시 얄타가 60년 만에 다시 국제적인 관심 대상으로 떠올랐다. 얄타회담은 1945년 2월4~11일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눈앞에 둔 연합군 수뇌인 소련의 스탈린 수상과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가 전후 국제질서에 대해 논의한 회담.

    부시 대통령의 발언은 이 회담에서 동유럽을 ‘악의 제국’인 옛 소련에 송두리째 넘겨줬던 미국의 실수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낸 것. 하지만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져온 국제질서인 ‘얄타체제’에 대한 뜨거운 재평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얄타체제는 냉전으로 인해 일부 무너졌지만 ‘얄타의 그늘’은 여전히 세계 도처에 남아 있다. 우리에게도 얄타는 진행형이다. 한반도의 신탁통치 방안이 얄타회담에서 처음으로 논의됐기 때문. 해방 이후 반탁과 찬탁으로 나뉜 민족 분열이 분단으로 이어졌고, 분단은 지금까지도 한민족에게는 고통의 원인이 되고 있다.

    흔히 얄타를 러시아 땅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우크라이나령이다. 53년 당시 소련 지도자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크림반도 전체를 우크라이나에 ‘선물’로 줬기 때문이다. 소련이 한 나라였던 당시에는 행정구역 변화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에 떼어준 것.



    역사의 현장 리바디야 궁전

    그런데 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문제가 심각해졌다. 그곳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러시아계 주민들이 하루아침에 우크라이나 국민이 됐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여전히 우크라이나가 아닌 러시아를 조국으로 생각한다. 지난해 우크라이나 대선 때도 크림반도는 친(親)러시아 후보인 빅토르 야누코비치 후보에게 몰표를 던졌다. 세계의 운명을 결정지은 얄타 역시 역사의 희생자인 셈이다.

    ‘얄타체제’가 탄생한 곳은 흑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있는 나지막한 하얀 이탈리아식 건물인 리바디야 궁전.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여름휴가를 위해 지었다는 리바디야는 궁전이라고 부르기엔 소박한(?) 규모였다. 그러나 현대사의 현장답게 곳곳에 역사적 흔적이 남아 있었다.

    ‘흑해의 진주’라고 불리는 얄타는 아름다운 풍광뿐 아니라 좋은 기후와 맑은 공기로도 유명하다. 또 역대 차르(황제) 및 소련 지도자들의 별장과 휴양지가 모여 있고, 안톤 체호프와 막심 고리키 등 대문호들이 이곳에서 작품을 썼다.

    니콜라이 2세 일가는 얄타에 궁전까지 지었으나, 네 번밖에 오지 못했다. 1917년 10월혁명으로 쫓겨나 일가족이 볼셰비키에게 학살되는 비극을 맞았기 때문이다. 리바디야 궁전 2층에는 니콜라이 일가가 얄타에 내려와 지내던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한반도 강대국 거래 ‘잔돈’이었나

    ① 극동 문제가 논의된 리바디야 궁전 내 집무실. <br>② 리바디야 궁전 내 회의석상에 전시된 얄타회담 당시의 관련 자료들.

    니콜라이 2세는 역사 속에서 무기력한 통치자로 묘사돼왔다. 혁명 후 일어난 내전과 스탈린의 대숙청, 공산정권의 폭정 등으로 수천만명이 희생된 데 대한 책임의 일부가 볼셰비키 혁명을 막아내지 못한 그에게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소탈한 성격의 소유자로 가족을 사랑하는 좋은 남편, 자상한 아버지였다.

    얄타회담은 주로 1층에서 진행됐는데, 루스벨트 대통령은 회담장인 이곳에 머물렀다. 고령으로 몸이 불편한 루스벨트 대통령에 대한 스탈린의 배려였다. 스탈린 수상은 인근 유스포프 궁전에, 처칠 총리는 보론초프 궁전에 머물며 매일 회담장인 이곳까지 오가야 했다. 얄타에서 회담이 열리게 된 이유도 루스벨트 대통령 때문이었다. 아직 바람이 찬 2월에 회담 장소를 고르려다 보니 날씨가 따뜻한 얄타를 택하게 된 것이다.

    발트 삼국 러시아에 사과 요구

    루스벨트 대통령은 1층에 있는 니콜라이 2세의 서재를 침실로 사용했다. 스탈린은 회담이 열리기 전, 이 방을 루스벨트 대통령이 좋아하는 푸른색으로 꾸미는 세심함까지 보였다.

    극진한 대접에 감동받은 탓이었을까. 루스벨트 대통령의 양보로 스탈린은 동유럽의 지배권뿐 아니라 사할린과 쿠릴열도 4개 섬의 영유권까지 받아냈다. 아직까지 계속되는 러시아와 일본의 영토 분쟁의 씨앗도 얄타에서 뿌려진 것이다.

    궁전 곳곳에 걸려 있는 삼국 정상의 사진을 자세히 보면, 원래도 ‘불도그’처럼 무뚝뚝한 처칠 총리의 표정이 더 어두운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루스벨트와 스탈린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전 세계의 운명을 요리하는 것을 씁쓸하게 지켜봐야 했기 때문이었을까. 얄타회담은 ‘대영제국’이 드디어 강대국의 자리를 내놓고, 전후 세계가 미-소 양극 구도로 개편되었음을 알리는 서막이기도 했던 것이다.

    처칠 총리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스탈린에게 지나치게 양보하는 것에 대해서는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전후 공산주의와 소련의 팽창을 우려해 ‘철의 장막’의 탄생을 예고했던 처칠로서는 스탈린이 회담의 최대 수혜자가 된 것이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었으리라.

    8일 동안 리바디야 궁전에서 진행된 얄타회담의 주 회의실은 66평 정도. 이곳에 모인 참석자는 모두 700여명이었다. 이들의 손에 의해 폴란드·유고슬라비아 등 동유럽과 이란·몽골·한국 등 수억여명의 운명이 결정됐다.

    삼국 수뇌는 소련군의 대일 참전 등 한반도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 극동 지역 문제는 1층에 마련된 루스벨트 대통령의 임시 집무실에서 비밀리에 논의했다. 우리 민족에게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였던 한반도 신탁통치안도 이 자리에서 처음 나왔지만 다른 중요한 의제에 묻혀 지나가는 말처럼 흘러갔을 뿐이다.

    “우리도 그저 ‘거스름돈’에 지나지 않았구나.”

    얄타회담의 현장을 둘러보는 동안, 5월7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한 이 ‘한마디’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한 독일 방송과의 회견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에스토니아와 리투아니아, 라트비아의 발트삼국은 ‘세계 정치의 거스름돈(exchange coin in world politics)’이었다”고 말했었다.

    한반도 강대국 거래 ‘잔돈’이었나

    ③ 얄타회담을 알리는 현판. ④ 이탈리아식 건물인 리바디야 궁전.

    세 나라는 모두 1939년 옛 소련과 나치 독일이 맺은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비밀협정(독소불가침조약)에 따라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차례로 소련에 강제 합병된 비극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다.

    최근 발트삼국은 러시아에 “과거사를 사과하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은 이를 거절하면서 “발트삼국은 당시 강대국끼리의 거래에 희생됐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푸틴 대통령의 표현은 대국적인 역사 인식을 노골적이고 거칠게 나타낸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국제정치의 냉혹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사과는커녕 이런 자존심 상하는 말까지 들은 발트삼국은 분했지만 현실적으로 대응할 수단이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5월9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2차 세계대전 승전 60주년 기념행사 참석을 거부하는 것으로 불편한 감정을 표시했을 뿐이었다.

    100년 전 일본에 국권을 뺏긴 뒤 일본의 패망으로 독립의 기회를 앞두고도 강대국끼리의 거래 대상이 돼 분단을 맞은 비극적인 우리 역사는 이렇듯 얄타에서 시작됐다. 그렇다면 한반도 역시 당시 강대국의 거래에서 겨우 ‘잔돈’에 지나지 않았던 것 아닐까.

    얄타의 햇살은 뜨거웠고 흑해는 눈부셨다. 그러나 절경이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100년 전, 60년 전처럼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강대국들의 각축이 계속되고 있는 현실이 눈앞에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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