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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ㅣ고건 컴백하나

“중요한 건 타이밍 한 번에 확 낚아야”

세상살이 빗댄 고건의 강태공론 …최근 동숭포럼 참석·개인 사무실 칩거 등 정치와는 먼 ‘시계 바늘 생활’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중요한 건 타이밍 한 번에 확 낚아야”

“중요한 건 타이밍  한 번에 확 낚아야”

2004년 12월12일 고건 전 총리(왼쪽)는 제주에서 대어를 낚았다(동숭포럼 회원이 휴대전화에 달린 카메라로 찍은 사진).

대화의 끝, 팽팽한 긴장이 흐른다. 제주 중문 바닷바람. 강태공(姜太公)의 바늘엔 묵직한 게 걸려 있다. 낚시는 물짐승과의 질긴 대화(對話).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을 찰나, 단번에 끌어당겨야 한다. 시운을 놓쳐서도 긴장을 잃어서도 안 된다. 줄이 온전히 단단해져 팽팽한 긴장이 느껴질 때가 바로 시운이다.

반평생 낚시를 다녔건만 이렇게 큰 물짐승이 걸려들긴 처음이다. 100cm가 넘는 대어(大魚). 고건 전 대통령권한대행 국무총리는 지난해 12월 중문 앞바다에서 월척을 낚았다. 카페 ‘모짜르트’(서울 종로구 동숭동)에서 오전 한담을 나누는 동숭포럼 회원들과 떠난 낚시 여행에서다.

한 해가 저물 때 낚아 올린 일생의 월척. 누가 보더라도 길조다. 월척 얘기를 꺼낸 고 전 총리의 표정에도 미소가 가득하다. 낚시는 테니스와 더불어 오랜 취미라고 했다. 그는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낚시론’을 꺼내놓는다.

“낚시는 바다와의 끊임없는 대화다. 살아가는 게 그렇듯 대화를 계속하면서 팽팽한 텐션(tension·긴장)을 잃어선 안 된다. 가장 중요한 건 타이밍이다. 때를 기다리면서 긴장을 유지하다가 기회가 왔을 때 한 번에 확 잡아채야 한다.”

낚시론을 듣고 “마치 세상 사는 이치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고 추임새를 넣자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렇다”고 동의를 표한다. 야인(野人)인 그를 둘러싼 정치적 환경이 자연스레 낚시론에 오버랩된다.



“여의도나 광화문 쪽으로는 아예 발길도 돌리지 않는다”

고 전 총리의 인기가 심상치 않다. 수개월째 호감도를 묻는 여론조사에서 현직 총리니 실세 장관, 시장 지사라는 꼬리표를 단 이른바 잠룡(潛龍)들을 멀찌감치 제치고 1위 자리를 독차지하고 있다. 묵언수행 중인 그가 가볍게 시국을 언급한 사신(私信)이 “정치권에 쓴 소리를 했다”며 신년사로 둔갑해 회자되는가 하면, 수년 전 쓴 글이 새삼 신문 지면에 오르내리며 화제가 된다.

“중요한 건 타이밍  한 번에 확 낚아야”

고건 전 총리는 2004년 3월26일 대통령권한대행 자격으로 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했다.

신년 사신 얘기를 건네다 “나라가 어려운데 언제까지 침묵을 지킬 것이냐”고 넌지시 물었다. 묵묵부답. 속시원한 대답은 애당초 기대하지 않았다. “호감도가 계속 1위로 나오고 있다. 주변에서 고 전 총리를 원하는 것 같다”고 고쳐 묻자 이번엔 소이부답(笑而不答)이다. 다만 “앞으로도 한동안 (인터뷰를 안 한다는) 원칙을 지킬 것”이라면서 사무실 한쪽에 새로 내건 휘호 ‘又民(우민)’을 가리킨다.

又民. 최근 지은 그의 호다. 그는 “또 우자 ‘우민’은 ‘또다시 민초(民草)’라는 뜻으로, 부름을 받아 공직에 나갔다가 소임을 다하면 물러나 다시 근본인 민초의 자리로 표표하게 돌아간다는 뜻”이라면서 “일곱 번의 공직과 민간인 신분을 오갔던 행정가로서의 저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면서 민이 종착점이자 근본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어 마음에 든다”고 다산연구소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밝힌 바 있다.

그의 동선에서 정치적 행보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그의 표현대로 아직 스스로를 해금하지 않은 까닭이다. 그는 “여의도나 광화문 쪽으로는 아예 발길을 돌리지 않을 뿐더러 인터뷰는 물론 국내 강연이나 언론 기고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그는 ‘신동아’ 12월호에 기고한 ‘나의 아버지’가 유일한 예외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부친이 ‘동아일보’에서 일할 때 ‘신동아’ 편집을 하는 등 남다른 인연이 있어 담당기자의 부탁을 뿌리치지 못했다는 설명이다).

그의 일상은 언뜻 봐선 단출하기 그지없다. 공개되다시피 한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 터라 전략과 술수가 끼어들 틈조차 없어 보인다. 그를 만나려면 오전엔 카페 모짜르트로, 오후엔 사무실로 찾아가면 어긋남이 없다. 남대문 인근 단암빌딩에 사무실을 낸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베일 속 행보와 대비되는 대목이다.

고 전 총리는 요사이 정치 행보와 관련된 얘기는 잘 꺼내지도 않는다고 한다. 지인들과의 대화에서도 정치가 화제로 떠오르면 말을 돌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 공직을 떠난 뒤 공식 행사에 참석한 것도 지난해 9월 중국 둔황(敦煌)에서 열린 한-중-일 국제심포지엄에 참석한 게 처음이자 끝이다.

잡지·신문 꼼꼼히 읽으며 ‘이슈’ 빠짐없이 점검

주말에 테니스 치는 것을 빼면 일상은 언필칭 백수가 그렇듯 매일이 똑같다. 오전 5시에 일어나 5시30분쯤 신문을 들고 서울 종로구 동숭동 집을 나서 동네 목욕탕으로 향한다. 집에 돌아와 조찬을 하고는 모짜르트로 발걸음을 옮긴다. 모짜르트는 20년째 참석하는 동숭포럼의 모임 장소다. 그가 공직에 있을 때는 매주 일요일에 모였지만, 야인이 된 지금은 거의 매일 모인다고 한다. 회원은 대부분 동네 사람들로 이세중 변호사가 회장을 맡고 있고 정경균 서울대 명예교수, 김재순 전 국회의장 등이 단골손님이다. 카페 가운데 있는 둥근 테이블이 이들의 사랑방이다.

“중요한 건 타이밍  한 번에 확 낚아야”

2004년 3월29일 고 전 총리가 제주 서귀포시에서 열린 UNEP 8차 총회에서 환영사를 하고 있다.

모짜르트에서의 한담이 끝나면 종로구 연지동의 개인사무실로 걸어서 출근한다. 점심식사도 어지간해선 연지동 일대를 벗어나지 않는다. 인근의 단골집들도 대개 드나든 지 10년을 훌쩍 넘어선다고 한다. 10여년 전 마련한 사무실은 대여섯 평 남짓으로 검박하다. 그가 없을 땐 여비서 1명이 외롭게 사무실을 지킨다. 사무실 문은 늘 열려 있다.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수인사만 하고 정중히 물릴 때도 있지만 찾아오는 이를 홀대하는 법은 없다. 사무실 사방엔 책이 가득하고 책상에도 읽을거리가 쌓여 있다. 사무실에서 손님을 맞고 글을 읽거나 쓰는 게 호감도 1위 ‘정치인’의 드러난 일상이다.

이렇듯 일상은 평범해 보이지만 그는 세상과 치열하게 대화하고 있다.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소파 앞 테이블에 쌓인 시사주간지 신년호와 일간지들은 그가 세상과 부지런히 소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독(多讀)과 정독(精讀)은 세상을 향한 대화다. 최근엔 벤자민 양이 쓴 ‘덩샤오핑 평전’과 리콴유가 쓴 ‘일류국가의 길’을 읽었다. 그는 신문을 꼼꼼히 읽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요즘도 자신의 근황이 담긴 기사는 물론이고 그날의 이슈를 빠짐없이 점검한다.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공직생활을 시작할 때 그의 부친이 공직삼계(公職三戒)를 강조한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누구 사람이라고 낙인찍히지 마라’’남의 돈 받지 마라’‘술 잘 먹는다고 소문내지 마라’가 그것이다. 여기에 그는 ‘일일신(日日新)’이라는 경구를 덧붙였다. 온고(溫故)는 하되, 지신(知新) 역시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일일신은 세상과의 끈에서 늘 팽팽한 긴장을 유지함에 다름 아니다.

밥 먹고 책 읽고 한담 나누는 건 겉으로 드러난 일과일 뿐이다. 예의 ‘낚시론’처럼 그는 시대와 끊임없이 소통하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세와 돈은 없지만 움직이면 도와줄 이들도 곳곳에 포진해 있다. 한 측근 인사는 “정치 지형의 획기적 변화가 있으면 모를까, 바보가 아닌 이상 움직이면 손해가 될 게 뻔한데 정치 행보에 나서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야인이 될 때마다 애독서인 ‘열국지’를 읽곤 했다. 지난해 5월 총리직을 사임하면서는 출입기자들에게 ‘열국지’를 나눠주고 일독을 권하기도 했다. 그가 지금 열국지를 다시 꺼내 읽는다면 아직은 ‘영웅이 때를 만나다’(4권)를 손에 잡을 것 같지는 않다. 여야 정치권에선 그의 인기를 거품이라며 무시한다. 한때 지나가는 바람인가, 또 다른 태풍의 시작인가. 둥둥 떠오른 인기는 가라앉지 않고 있다.



주간동아 2005.01.18 469호 (p34~35)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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