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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책은 놀이동산 청룡열차다

책은 놀이동산 청룡열차다

책은 놀이동산 청룡열차다

정 은 숙 도서출판 마음산책 대표

왜 출판을 하는가. 이런 물음이 외부에서 던져지면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대답을 달리할 수밖에 없다. “출판이 좋아서” 또는 “꿈을 실현시켜주니까”. 그리고 출판계에 대해 ‘고루하다’는 식의 선입관을 갖고 있는 젊은 지망생들에게는 “돈을 벌 수도 있으니까”라는 대답을 해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물음이 나의 내부에서 던져지면 대답은 한결같다. 책 만드는 일을 하다보면 책을 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껏 많은 책을 읽고 만들어왔지만 나는 여전히 책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그래서 언제나 책에 대한 갈증을 느낀다.

일례를 들어보겠다. 프로스트와 엘리엇은 내가 좋아하는 시인이다. ‘가지 않은 길’과 ‘황무지’는 가까이에 두고 수시로 펼쳐 보는 책이다. 그렇다 보니 언제부턴가 ‘가지 않은 길’의 표현의 단순성과 ‘황무지’의 끝없는 난해성에 조금씩 질리게 되었다. 한쪽은 뭔가 인생에 대한 임팩트가 약하고 미흡한 느낌 때문에, 또 한쪽은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잘 열리지 않는 난해함 때문에 드는 갑(匣)에 꼭꼭 싸여 있는 듯한 느낌이 불편해졌달까. 그래서 어느 순간 이들 시인에 대한 애정이 비원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최근 이 두 시인에 대한 해독에 괄목할 만한 진전을 보이게 되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자연시’(신재실 지음)를 읽게 된 것이다. 이 책은 ‘프로스트를 못 읽으면 독자의 독해 능력이 없는 것이요, 파운드나 엘리엇을 못 읽으면 텍스트가 난해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그야말로 착각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저자는 ‘가지 않은 길’에는 인간이 마땅히 걸어야 할 사회적 행보 속에서 가보지 않은 길이며 숲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중층적으로 그려져 있다고 했다. 조금 비약하자면 현대인에게 이 시는 공포물인 셈이다.



엘리엇의 난해성에 대해서는 책의 성격상 상세한 논급이 없지만, 나는 이 점에 착안해 다시 그 시집들을 펼친 결과 확실히 전과 다른 느낌으로 프로스트와 엘리엇을 읽게 되었다. 이제 오랜 나의 시 독해에 한줄기 햇살이 내린 것이었다. 프로스트나 엘리엇을 넘어 또 다른 시인들의 시로 유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책을 매개로, 또 다른 책의 문을 열어나가게 된 것이다.

왜 출판하느냐 물으면 “일탈의 즐거움 때문에”

출판을 왜 하는가. 책을 잘 보기 위해서다. 한껏 무한한 것처럼 생각되는 상상의 세계와 욕망도 매개물 없이는 구체화하기 어렵다. 인간은 직·간접적으로 겪어보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존재다. 심지어 몽상이나 공상조차도 자신의 직·간접 경험세계에서 유추된 것이다. 인간은 시공간의 제약 때문에 경험의 폭과 깊이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럴 때 책은 욕망의 객관적 상관물이 되어주는 것이다.

출판을 하면 책에 대한 이해가 한층 깊어진다. 책의 사용법도 책을 잘 알아야 완벽히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무시로 책을 사용하면서도, 의외로 그것을 잘 모르는 까닭에 책을 피상적으로 사용하는 일이 많다. 앞서 예로 든 것처럼 책은 여러 형태의 읽기가 가능하다. 오랜 시간 인내를 가지고 두드려야 비로소 문을 열어주는 텍스트도 있는 것이다.

너무 당면한 효용만 찾다보면 정작 더 중요한 것을 놓치는 수가 있다. 흔히 드는 비유를 쓰자면, 아이를 목욕시킨 물을 버리다가 아이까지 같이 버리는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뜻이다. 아무리 좋은 집을 지어놓았어도 열쇠가 없으면 들어가 살 수 없는 법이다.

책이 생을 풍부하게 한다는 오래된 전언은 오늘도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진실이다. 책에는 놀이동산의 청룡열차를 탄 것과 같은 일탈을 주는 즐거운 세계가 숨쉬고 있다. 재미없다면 누가 그것을 타겠는가? 이것이 내가 출판을 하는 이유다.



주간동아 2004.10.28 457호 (p104~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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