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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외국인 투자자 파워

‘글로벌 스탠더드’로 다 바꿔!

외국자본 한국 기업문화 대대적 변화 요구 … 효율·무한경쟁 강요 임직원들 죽을 맛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글로벌 스탠더드’로 다 바꿔!

‘글로벌 스탠더드’로 다 바꿔!

볼보건설기계코리아 에릭 닐슨 사장과 임직원들. 닐슨 사장은 “볼보의 핵심 가치가 한국에서도 인정받아 기쁘다”고 말했다.

”사원에서 이사까지 가는 직급체계를 확 줄인다는데 어떤 걸 없애는 걸까.”

“외국에는 ‘과장’ ‘대리’라는 직급이 아예 없다던데….”

“그럼 직급제도가 없어지는 거야, 아니면 진급이 빨라지는 거야?”

지난해 10월 출범한 GM대우 임직원들은 교과서를 통해서만 알고 있던 서구식 경영체계를 하나둘씩 몸으로 익혀가고 있다. 순혈주의 연공서열 수직적 직급체계는 ‘지는 노래’가 된 지 오래고, 수평적 직급체계 성과급 자율경영이 ‘뜨는 노래’로 부상했다. 간부들도 ‘현장’으로 달려가고 1주일 이상 걸리던 결재는 반나절이면 끝난다.

GM 출신 임원들이 주관하는 회의는 영어로 진행되고 각종 결재서류와 보고서는 한국어와 영어로 각각 작성된다. 외국인 임원들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면 ‘영어와의 전쟁’은 필수다. 외국인 임원과 독대하는 후배들이 마냥 부러운 고참 사원에게 책상 앞에 꽂힌 영한사전 한영사전은 ‘병사의 총알’과 같은 존재가 됐다.



송두리째 바뀔 것이라는 사원들의 우려와 달리 GM대우의 직급 축소는 이사 이사부장 과장 직급이 사라지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하지만 기존의 수직적 의사결정 시스템은 무너져가고 있다. 연공서열에 관계없이 누구나 ‘포스트’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국자본이 들어온 기업에선 부장이 팀원이 되고 사원이 팀장자리를 차지해 전 부장을 ‘거느리고’ 일하는 모습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직급 파괴 철저히 실무 위주 업무 진행

‘글로벌 스탠더드’로 다 바꿔!

글락소스미스클라인사의 김진호 사장(오른쪽에서 두 번째)과 직원들이 사내 휴게실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겉으론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지만 모든 면에서 분명히 달라졌다.”

GM대우를 비롯해 외환위기 이후 경영권이 외국자본으로 넘어간 기업에 근무하는 직원들이 하나같이 하는 얘기다. 1997년 이전까지 246억 달러에 지나지 않았던 외국인 직접투자액은 1998~2002년 기간만 600억 달러에 이른다. 이처럼 쏟아져 들어온 외국자본은 눈에 보이지 않게 한국경제를 변화시킨 변화의 원천이었다. 외국자본은 또 한국식 재벌문화의 병폐에 대안을 제시하고 선진국형 기업문화를 전파하는 ‘전도사’ 역할과 한국기업들에게 글로벌 스탠더드를 가르치는 ‘참고서’ 구실을 했다. 외국자본에 의해 한국의 기업문화가 바뀌어가고 있는 것이다.

4월11일 GM대우는 홍보 및 대외협력 담당 부사장으로 GM 아시아·태평양 홍보 담당 책임자(이사급)인 롭 레커트씨를 선임했다. 그동안 홍보 파트를 맡아왔던 한국인 K부사장은 전보나 해임 대신 레커트 부사장의 ‘스태프’로 해외홍보와 기업이미지 제고 업무를 맡는 것으로 교통정리됐다. 회사측은 K부사장을 ‘전무’로 발령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물먹은’ 임원은 옷을 벗는 게 관례인 한국 기업문화에서 부사장에서 전무라는 하향인사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처럼 ‘매니저’와 ‘스태프’로 짜여져 철저히 실무 위주로 업무를 진행하는 서구식 경영문화는 한국경제 전반에 빠르게 스며들고 있다.

‘글로벌 스탠더드’로 다 바꿔!
‘글로벌 스탠더드’로 다 바꿔!

서울 광화문 동아미디어센터에 자리잡은 랜드리스코리아의 외국인 임원들이 세종로 사거리가 펼쳐진 창 앞에서 회의를 하고 있다(위) . 2002년 7월3일 부산 강서구 르노삼성자동차에서 열린 신차발표회에서 모델들이 SM3를 선보이고 있다.

△ 접대는 뇌물수수 행위다=외국자본 기업의 영업부서에서 일하는 K씨. 핸디캡이 싱글인 K씨는 ‘회사 돈’으로 ‘접대’하며 쌓은 골프 실력을 그대로 썩히고 있다. 접대비 결제가 까다로워지면서 더 이상 접대 명목으로 골프를 칠 수 없게 된 것. K씨는 “1만~2만원도 정확하게 계산하는 기업문화가 무섭다”며 “팀장 선에서 결재하던 접대비를 이젠 임원이 결재한다”고 말했다.

볼보건설기계코리아(이하 볼보)의 에릭 닐슨 사장은 1만원을 지출할 때도 지출 내역을 꼼꼼히 따져 결재한다. 액수와 상관없이 한 달 이상 고민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본인이 쓴 돈에 대해서도 1000원 단위까지 재무담당 임원 앞으로 서류를 보내 결재를 받는다. 따라서 고급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한 뒤 호화로운 요정이나 룸살롱으로 이어지던 접대문화는 옛날 얘기가 된 지 오래다.

외국자본 기업에선 연말연시나 명절 때 선물을 주고받는 행위도 사실상 금지돼 있는 경우가 많다. 또 접대를 받을 때도 윤리규정의 한도액을 넘어섰는지 걱정한다. 정치인에게 주는 기부금 한도를 정해놓고 있는 회사도 많다. 외국계 기업의 한 임원은 “경쟁업체는 돈을 펑펑 쓰는데 우리만 멍하니 있을 수는 없다”면서 “가끔씩 영수증을 쪼개 외국임원들을 속이는 편법을 사용하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 임원이 사원을 찾아온다=제롬 스톨 르노삼성자동차 사장은 직원들에게 문의할 일이 있으면 직접 해당 부서를 찾아온다. 부서를 찾아온 사장에게 서류를 내밀어 결재를 부탁하는 광경도 흔히 벌어진다. 담당자를 직접 찾아오는 것은 직원들의 소중한 시간을 약속 없이 빼앗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외국자본 기업에선 사장이 사무실에 들어오면 전 직원이 벌떡 일어나는 모습은 볼 수 없다. 사장은 선 채로, 실무자는 앉은 채로 얘기한다.

미니스에 인수된 홍농종묘 직원들은 기안서를 ‘읽고 또 읽는’ 버릇이 생겼다고 한다. 기안자가 모든 책임을 지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경영권이 미국 코스코로 넘어간 프라이스클럽은 직원 선발권한이 사장에서 부서장인 매니저(과장급)에게로 넘어갔다. 부서장이 필요한 사람을 직접 뽑는 것이다. 한국바스프 관계자는 “실무자의 권한이 막강해진 게 가장 큰 변화”라며 “격식보다는 능률이 우선이라는 서구식 사고가 직원들에게 완전히 스며들었다”고 말했다.

외국자본 기업에선 밤늦게까지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 ‘올빼미 사원’도 환영받지 못한다. 근무시간에 태만하게 일한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을 뿐이다. 휴가도 마찬가지. 휴가를 안 간다고 좋은 평가를 받는 게 아니다. 오히려 능력 없는 사람이란 소리를 듣는다.

△ ‘군살’은 필요 없다=“사무실이 비좁아 답답할 정도다.” 제일은행 본점에서 일하는 J씨는 “외국자본이 들어온 후 가장 큰 변화는 사무실이 좁아졌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뉴브릿지가 대주주가 되면서 본점 건물 22개층을 사용하던 제일은행은 13층까지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임대료 수익을 위해 세를 놓았다.

엘리베이터 제조업체 오티스LG는 사옥을 마련할 계획이 없다. 현금 흐름을 중요시하는 외국임원들이 부동산에 돈을 묵혀두는 것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오티스LG의 한 직원은 “보고를 위한 보고가 없어진 게 가장 홀가분하다”고 말했다. ‘양 채우기’식 보고서가 사라져 수억짜리 결재를 위한 보고서도 A4 용지 반 장이면 충분하다고.

볼보는 경기가 나빠 재고가 쌓이면 공장을 돌리지 않는다. 볼보 관계자는 “과거 삼성시절과 비교할 때 수요가 적으면 아예 안 만드는 서구식 경영의 합리성을 배웠다”고 말했다. 르노삼성의 한 직원은 “과거 삼성에선 과장만 돼도 결재만 하면 됐다. 회사의 군살이었던 셈이다. 외국기업에선 위로 갈수록 전문가가 된다”고 귀띔했다.

△ 우리는 ‘글로벌’로 간다= LG오티스 외국인 임원들의 취임 일성은 “더 이상 한국식 기준에 맞추지 말라”는 것. 비용은 신경 쓰지 말고 무조건 국제기준에 맞춰 엘리베이터를 제작하라는 뜻이었다. OB맥주는 글로벌 기준에 맞춰 생산현장의 관리감독이 철저해졌다. 5분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시간 기록으로 제품의 질이 높아졌음은 물론이다.

알리안츠생명은 준비금과 수익성을 분석하는 세계선진관행(best practice)인 계리시스템을 국내에 도입했다. 알리안츠생명 미셸 캉페아뉘 사장은 “외국기업들은 인수나 제휴관계를 맺는 국내기업에게 다양하고 참신한 글로벌 접근방식을 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베이에 경영권이 넘어간 옥션 직원들의 명함엔 이름과 함께 이베이 로고가 박혀 있다. 직원들은 이베이가 사용하는 첨단 데이터베이스시스템을 들여와 사용한다. 옥션에 근무하는 최상기씨는 “과거에만 의존해 결정했던 일들을 이베이 툴을 활용, 철저한 분석작업을 통해 과학적으로 처리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외국자본 기업의 임직원들은 “변화에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다”고 입을 모은다. 치열한 경쟁에 내몰리며 효율을 강요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일은행에서 일하는 김모씨(36)는 “업무 강도와 직무 수준 요구치가 매우 높아져 압박감과 자기관리 부담이 부쩍 늘었다”면서 “‘실적 지상주의’를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막상 내 일이 되니 스트레스가 상상을 초월했다. 한마디로 직장이 살벌한 전장으로 바뀌었다”고 손사래를 쳤다.

반면 기업의 순이익은 직원들의 성과급보다는 주주배당으로 돌아가기 일쑤고 스톡옵션도 직원들에겐 언감생심이다. 간단한 컨설팅도 한국업체에 맡기는 경우가 드물다. 또한 국내에 뿌리를 내리기보다는 회사를 팔고 뜰 생각부터 하고 있는 외국자본도 상당수다. 최근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직장인들이 공인중개사 시험에 몰리고 있다고 한다. 회사원들이 자격증을 따기 위해 독서실에 다니는 최근의 ‘풍속도’엔 외국자본의 ‘그림자’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주간동아 2003.05.01 382호 (p30~32)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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