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79

2003.04.10

고영구의 국정원 ‘개혁 태풍전야’

盧心 등에 업은 인권변호사 출신 … 인적 청산·탈정치화 등 거센 변화바람 이끌 듯

  • 윤영호 기자 yyoungho@donga.com

    입력2003-04-03 15: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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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영구의 국정원 ‘개혁 태풍전야’

    노무현 정부는 반(反)국정원 정서를 가진 인사들을 국정원 지휘부에 임명, 국정원 개혁을 주도하도록 했다. 원내는 고영구 국정원장 후보.

    노무현 대통령은 3월26일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 원장 후보에 인권변호사인 고영구 변호사(법무법인 시민종합법률사무소 대표)를 지명했다. 인권변호사의 국정원장 발탁은 1961년 국정원(당시 중앙정보부) 창설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과거 정보기관의 요시찰 대상이었던 인사가 국가정보기관의 수장이 됐다는 것은 앞으로 국정원에 몰아칠 변화 바람과 그 강도를 짐작케 한다.

    송경희 청와대 대변인은 3월26일 브리핑을 통해 “폭넓은 경험과 신망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대에 맞는 국정원의 위상과 역할을 재정립할 수 있는 적임자라는 평가가 중시됐다”고 발탁 배경을 설명했다. 11대 의원,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 등을 역임한 고후보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하 민변) 초대 회장을 지냈다.

    물론 과거에도 국정원에 변화 바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87년 6월 항쟁 이후 과거의 절대적 위상이 약화되기 시작한 가운데 93년 김영삼 정부의 등장으로 국회에 의한 정보기관 통제가 시작됐다.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통해 등장한 김대중 정부는 정치 개입 시비를 없애기 위해 국내 정보담당 차장을 1차장에서 2차장으로 격하하는 등 조직과 기능을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의 국정원 개혁 의지는 이를 훨씬 뛰어넘는다. 인권변호사 출신의 원장 후보 지명에 이어 북한에 대한 인식에서 진보적 성향을 보여온 상지대 서동만 교수의 지휘부 입성은 국정원 내에서 ‘혁명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서교수는 1차장 또는 3차장으로 내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기조실장에도 민변 소속 변호사가 거론되고 있을 정도다.

    진보성향 서동만 교수도 지휘부 입성



    서교수의 국정원 진입 과정에는 국정원측의 ‘저항’이 있었다는 후문. 국정원 관계자들은 서교수가 친화력이 다소 부족하다는 점을 들어 “내부조직을 제대로 장악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며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거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서교수는 고후보와 함께 이미 국정원 개혁 작업을 지휘하고 있어 그에 대한 노대통령의 신임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케 한다.

    고후보는 국정원 개혁 방향에 대해 “아직은 말할 단계가 아니다”며 함구하고 있다. 그는 국정원장 후보 내정 통보를 받았던 25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국정원장 관사가 있느냐” “역대 원장은 모두 관사에 입주했느냐” 등 자신이 궁금한 부분에 대해 묻기만 했을 뿐 국정원 개혁 방향에 대해서는 끝내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그러나 노대통령은 이미 개혁 방향을 암시했다. 노대통령은 우선 국정원으로부터 국내 정치 관련 보고를 받지 않고 있다. 국정원 직원이 그동안 정당이나 정부부처, 언론사를 출입하면서 정보를 수집해오던 관행도 금지할 방침임을 밝힌 바 있다. ‘정치 사찰’ 시비를 낳을 수 있는 활동을 금지할 국정원의 정치적 중립성을 확고히 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노대통령의 국정원 개혁 의지는 대통령 자문기구인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위상 및 기능 강화에서부터 감지되기 시작했다. 정부는 3월18일 국무회의에서 NSC 사무처를 기존의 ‘1실 2부 1과’에서 ‘3실 1센터 1부’로 확대개편하는 것을 골자로 한 NSC 운영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NSC를 명실상부한 국가안보 위기관리 사령탑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한 차원이다.

    고영구의 국정원 ‘개혁 태풍전야’

    국정원 검찰 등 권력기관 개혁을 전담하고 있는 박범계 민정2비서관(오른쪽)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정순균 대변인(현 국정홍보처 차장).

    NSC는 앞으로 외교안보 분야의 실질적인 정책조정 기구로 기능할 것으로 보인다. 국정원의 대북 및 해외 정보 등 외교안보 관련 정보도 일단 NSC를 통해 노대통령에게 보고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로써 과거 국정원이 외교안보 관련 정보 독점을 통해 외교안보 관련 다른 부처 위에 군림했던 행태도 보기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NSC 활성화는 국정원이 NSC에 보고하는 외교안보 관련 정보를 NSC 차원에서 점검할 수 있게 됐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자면 국정원의 활동을 간접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됐다는 얘기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98년 법 개정을 통해 NSC 내에 사무처를 신설하는 등 NSC 활성화를 통한 국정원 통제 방안을 마련했지만 사무처 규모가 작아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편으로 NSC 활성화는 국정원의 탈정치화를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NSC는 국정원의 국내 정치 정보 등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국정원의 국내 정보 수집 및 국내 보안수사 기능의 축소를 의미한다. 이는 또 노대통령이 이미 언급한 국정원 직원의 정당·정부부처·언론사 출입금지 방침과도 일맥상통한다.

    NSC 기능 강화는 노무현 정부 ‘개혁 교과서’로 불리는 ‘대통령의 성공조건’(서울대 박세일 교수 등이 집필)에서 제안한 내용이다. 대통령 당선자 시절 노대통령을 만나 자문에 응했던 박세일 교수는 “노대통령이 ‘그 책을 재미있게 잘 봤다. 주위사람에게도 일독을 권하고 있다. 많이 참고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로선 노대통령의 대선공약인 해외정보처 전환 방침이 실현될 수 있을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노대통령이나 문재인 민정수석, 박범계 민정2비서관 등은 이를 강력히 주장하고 있으나 문희상 비서실장 등은 이에 반대하고 있다는 후문. 문실장은 “국정원 개혁은 김대중 정부에서 상당부분 제도화됐고, 최소한의 국내 정보 수집은 필요하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노대통령이 민변 출신의 고영구 변호사를 국정원장 후보에 지명했다는 것은 아직 국정원에 대한 불신감을 완전히 해소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된다. 노대통령은 지난해 대선 유세 과정에서 “중앙정보부가 말썽이다. 안기부로 바꿔도 말썽이고, 국정원으로 바꿔도 말썽”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당시 정치권에서는 한나라당의 ‘도청의혹 공세’를 정면돌파하려는 차원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이후 노대통령의 이런 언급에는 국정원에 대한 노대통령의 실제 인식이 담겨 있다는 얘기가 나왔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이하 인수위) 시절 노대통령은 국정원 관계자들에게서 업무보고를 받은 이후 ‘도대체 저들이 말한 것을 그대로 믿어도 되는지 모르겠다. 내가 속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는 취지의 얘기를 측근들에게 털어놓았다는 후문.

    고영구의 국정원 ‘개혁 태풍전야’


    노대통령의 국정원 개혁 의지가 알려지자 국정원 내부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특히 ‘국민의 정부’에서 약진을 거듭했던 호남 출신 간부들과 앞으로 기능이 축소될 것으로 보이는 대공정책실 및 대공수사국 간부들의 동요가 상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 직원은 “‘신임 지휘부가 2급 이상 간부들을 대대적으로 물갈이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는 것도 이들의 불안감을 증폭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으로는 고후보에 대한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국정원 일각에서는 “국가정보기관에 대한 인식이 없는 인권변호사 출신 인사가 국정원장으로 부임해 조직 장악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심지어 “얼마 동안 재임할지 모르겠지만 일만 배우다가 물러나는 것 아니냐”는 노골적인 비아냥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일부 직원들은 고영구 원장 체제에 대해 상당한 기대감을 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동안 민주화시대에 맞는 국정원의 새로운 역할과 위상 정립 노력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정치사찰 시비가 제기되는 등 부정적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고원장 체제가 이런 시비를 원천적으로 차단해주길 바라고 있는 것.

    국정원 관계자들은 “고영구 원장 체제 개혁의 시작은 인적 청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무엇보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사고방식과 관행에 젖어 있는 간부들의 정리가 불가피하다는 것. 아울러 ‘정치권 줄대기’ 관행을 뿌리뽑기 위해서라도 출신 지역을 불문하고 정치권 주변에 얼쩡거린 간부들에 대한 엄정한 조사 및 조치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많다.

    이런 가운데 국정원 내 행정고시 출신들이 벌써부터 부상하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인수위 시절 외교통일안보분과 전문위원으로 파견 나갔던 모 지부 부지부장(2급) 안모씨, 국정원 검찰 등 권력기관 개혁을 전담하고 있는 청와대 민정2비서관실에 파견 나간 김모씨(3급) 등이 대표적이다.

    공교롭게도 이들 두 사람뿐 아니라 박범계 민정2비서관까지 연세대 출신이어서 “연세대, 행시 출신이 국정원 개혁을 주도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있다.

    국정원에 대한 국회의 견제 및 감시도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국회 정보위원회(이하 정보위)의 예산통제권을 강화하고 그 대신 정보위 소속 의원의 국가기밀 유출을 엄격히 제한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는 후문. 94년 국회 정보위에 의한 국정원 통제가 시작됐지만 그동안 충분한 감시 및 감독이 이뤄지지 못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노무현 정부의 국정원 개혁은 이제 겨우 시작단계라는 게 정치권의 분석. 노무현 대통령이 국내 정치 개입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깨끗이 털어내지 못한 채 부정과 비리에 연루돼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는 국정원 개혁에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는 더 지켜봐야 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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