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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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는 시누이 ‘프·독’의 속셈

유럽 대부분 美 지지에도 ‘반미 고수’ … 석유·무기 거래 등 이라크에서의 경제적 이익 상실 우려

  • 안병억/ 런던통신원 anpye@hanmail.net

    입력2003-03-26 14: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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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리는 시누이 ‘프·독’의 속셈

    베를린에서 벌어진 대규모 반전시위.

    1963년과 67년, 두 번이나 영국의 당시 유럽공동체(마스트리히트 조약이 비준된 93년 7월부터 유럽연합이 됐다) 가입을 거부한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은 사석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유럽과 미국이 갈등을 겪고 있을 때 영국은 누구 편을 들겠는가?”

    시대와 상황은 많이 변했지만 위 질문에 대한 대답은 변하지 않았다. 드골은 미국이 아닌 유럽이 주도하는, 더 구체적으로 프랑스가 이끄는 유럽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독일의 경제력을 적극 이용했고 66년 당시 소련과 무역협정을 맺는 등 미국보다 앞서 소련과 데탕트를 이루어냈다. 유럽을 앵글로색슨과 소련이 주도하는 세계질서에 대항할 수 있는 `‘제3의 세력’으로 키우려는 것이 그의 정책이었다.

    이라크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요구해온 프랑스와 독일은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러시아와 삼각구도를 형성, 미국과 영국이 주도하는 군사적 해결안을 견제하려고 했다. 반면 스페인과 이탈리아 등 서유럽 8개국과 동유럽 10개국은 각각 미국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라크 사태를 두고 유럽은 극심한 분열상을 보였다. 이라크전쟁 이후 유럽연합(EU)은 이 갈등을 봉합하고 미국을 견제하는 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을까? 아니면 영원히 `‘경제적 거인, 정치적 난쟁이, 군사적 무지렁이’로 남을 것인가?

    유럽연합은 ‘정치적 난쟁이, 군사적 무지렁이’?

    `‘샤를 드골이 부활했다’. 프랑스 언론은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의 이라크 정책을 이렇게 표현했다. 프랑스는 지난달 초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전쟁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선언했다. 프랑스의 공개적인 입장표명으로 인해 가나 등 2차 유엔 결의안에 기권 의사를 내비치던 아프리카 국가들이 전쟁 반대 입장으로 선회했다. 결국 통과되지 못할 것이 뻔한 2차 결의안은 상정도 되지 못했다. 프랑스의 물귀신 작전에 격분한 미국의 일부 의원은 프랑스에 대한 제재를 거론했고 영국 언론은 연일 ‘프랑스 죽이기’에 혈안이 됐다.



    그러나 시라크 대통령의 이라크 정책은 도덕적인 명분보다 프랑스의 전통적 외교노선인 드골주의, 즉 ‘유럽의 힘을 빌려 미국의 패권주의를 견제한다’는 정치적 이해타산이 작용한 결과다. 91년 걸프전 이전까지 서방국가 가운데 이라크에 가장 많은 무기를 판매해온 국가가 바로 프랑스다. 프랑스 정유업체 ‘토탈피나엘프’는 매장량이 200억 배럴에 달하는 이라크의 노른자위 유전인 마즈눈 유전의 개발 계약을 체결했다. 러시아와 중국 역시 이미 이라크와 유전 개발 계약을 체결해둔 상태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의 석유회사들은 이라크 정부의 거부 때문에 세계 2위의 산유국인 이라크 유전에 발도 들여놓지 못했다.

    경제·정치적 이유로 반미노선을 걸어온 프랑스는 미국에 맞서기 위해 독일과 러시아를 끌어들였다. 독일은 1, 2차 세계대전의 업보로 인해 무력 사용에는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국가다. 슈뢰더 총리가 지난해 9월 총선 때 이라크 사태에 대한 미국의 `‘군사모험주의’를 비판하는 정책을 채택한 이유는 당선을 위한 정략적인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점은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이 독일의 외교노선이라는 점이다.

    결국 독일과 미국의 관계는 최악의 상황에 빠졌지만 미국은 프랑스의 경우처럼 독일에 등을 돌리지는 않았다. 이라크전 이후 복구를 위해 독일의 경제력이 필요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독일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독일이 미국의 이라크 정책을 지지하지 않아 유감이지만 전후 이라크 복구에 독일 정부와 기업이 적극 참여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기서 뜻밖의 변수가 등장했다. 프랑스와 독일이 마치 유럽의 대변자인 것처럼 행동하자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덴마크, 그리고 내년에 EU에 가입할 예정인 체코 폴란드 헝가리 등 8개국이 연합해 미국의 이라크 정책을 지지하는 공동 성명서를 발표한 것이다. 스페인의 아스나르 총리가 주도한 이 공동성명에는 다른 회원국과 상의도 하지 않고 미국의 이라크 정책을 비판한 프랑스와 독일에 대한 각국의 분노가 깔려 있다.

    EU가 분열 양상을 보이자 이를 봉합하기 위한 정상회의가2월 중순 브뤼셀에서 열렸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 시라크 대통령이 부주의한 발언을 해 오히려 EU 가입 후보국 10개국을 모두 미국 지지 쪽으로 선회하게 만들었다. 시라크는 비속어를 섞어가며 “프랑스는 체코 폴란드 헝가리 등의 EU 가입을 방해할 수도 있다”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이렇게 되자 EU 가입을 앞둔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동유럽 10개국까지 미국의 이라크 정책을 지지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해버렸다.

    EU 공동외교안보정책 ‘속 빈 강정’으로 드러나

    1992년 2월 당시 유럽공동체 회원국은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체결, 공동외교안보정책을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외교안보 문제에 대해 회원국이 공동입장과 공동행동을 취하도록 노력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회원국 간에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공동외교안보정책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라크 사태를 두고 반미와 친미로 나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EU는 다른 회원국의 외교안보정책을 강제적으로 조정할 수 없다.

    이번 이라크 사태로 공동외교안보정책은 다시 한번 속 빈 강정임이 드러났다. EU는 내년 상반기 중에 조약 개정을 위한 정부 간 회의를 열 예정이지만 현 상황에서 공동외교안보정책의 진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미국과 행동을 같이하는 것이 국익이라는 생각이 뼈에 사무친 듯 행동하는 영국과, 미국과 영국의 패권을 견제하는 것이 외교정책의 큰 틀인 프랑스가 핵심 주권인 외교안보를 EU 기구에 넘겨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동구권 10개국이 EU에 가입해 제 목소리를 내면서 외교안보정책에 대한 입장 차이는 더 커질 전망이다.

    물론 동구권은 역사적으로 ‘독일의 뒷마당’이라고 불려왔다. 독일기업은 이 지역의 최대 투자자다. 즉 독일이 경제력을 무기로 이들 10개국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여지는 얼마든지 남아 있다. 이렇게 될 경우 영국은 상황에 따라 스페인, 혹은 다른 회원국과 연합해 독일과 프랑스를 견제하려고 할 것이다.

    영국 런던대학의 로렌스 프리드만 교수는 미국을 거대한 코끼리에 비유했다. 이 코끼리가 버스라는 국제사회에 다른 국가들과 함께 타고 있다. 코끼리가 아무리 순하게 행동한다 하더라도 다른 승객들은 불안하다. 누가 이 코끼리를 제어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해 클린턴 행정부 때 국무장관을 지낸 유럽통 로렌스 이글버거는 “미국의 일방주의를 견제하기 위해 유럽이 나서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러나 과연 유럽이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경제력으로 볼 때 EU는 미국에 뒤지지 않는다. EU는 미국과 일본을 능가하는 세계 최대의 개발원조국이며 세계 총생산의 18%를 생산한다(미국은 20%). 10개 나라가 추가로 가입함에 따라 EU는 세계 최대의 경제블록을 형성하게 된다.

    이런 경제력을 정치력, 군사력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회원국 간의 합의가 뒷받침돼야 하고 정치적 의지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라크 사태를 두고 자국의 이해득실과 외교노선에 따라 분열을 거듭하는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통일된 합의와 정치적 의지를 갖춘 EU는 아직도 요원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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