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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귀찮아…” 나? 귀차니스트

쓸모없는 新인간형 젊은이들 열광 … 세상과 담쌓고 컴퓨터가 생활의 전부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그냥 귀찮아…” 나? 귀차니스트

“그냥 귀찮아…” 나? 귀차니스트

세상 모든 것을 귀찮아하는 ‘한심한’ 인간형 ‘귀차니스트’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졸리면 잔다. 자다 지치면 눈을 뜬다. 배가 고프면 참는다. 꾹 참다 보면 다시 졸립다. 졸리면 잔다.

졸고, 자고, 참는 것만으로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사람, 이런 종류의 인간형을 ‘귀차니스트’라고 한다. ‘귀찮다’에 ‘-ist’를 붙여 만든 이 단어는 예전 표현으로 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을 뜻하는 말. 그러나 이 ‘한심한’ 인간형이 최근 젊은이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

서울 모 대학을 휴학중인 천재훈씨(23)는 자타가 공인하는 ‘귀차니스트’. 그의 별명은 폐인 천재훈을 줄인 ‘폐재훈’이다. 밥을 먹거나 화장실에 가는 것조차 너무나 ‘귀찮아하는’ 그의 유일한 낙은 컴퓨터. 모니터 앞에 침대를 붙이고 자리에 누운 채 마우스를 움직이는 때가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방 안에 혼자 있는 것이 가장 편하기 때문”이다. 그는 일주일에 3~4일은 하루 종일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지낸다.

스노우캣 캐릭터가 교과서

“그냥 귀찮아…” 나? 귀차니스트

귀차니스트들은 쿨하고 게으른 캐릭터의 고양이 ‘스노우캣’에 열광한다.

주위에서 천씨와 같은 귀차니스트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인터넷 다음 카페에서 귀차니즘을 검색하면 스스로를 귀차니스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수천명이나 등장한다. 대부분 20, 30대인 이들에게 최근 한국을 바꿨다는 젊은층의 역동성은 ‘다른 세상 얘기’일 뿐이다. 사람들을 만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대신 이들은 매일매일 피곤하고 달라질 것 없는 자신들의 일상을 반복한다.



이들은 한때 인터넷 세상을 뜨겁게 달궜던 ‘디지털 폐인’들과도 분명히 구별된다. 한 귀차니스트에 따르면 “폐인은 자신들의 패거리 문화를 형성하고 타인을 공격하지만, 귀차니스트들은 개별적으로 행동하고 쉽게 상처받으며맘에 안 들어도 그냥 내버려두는 이들”이다.

귀차니스트가 탄생한 건 ‘스노우캣(snow cat)’이라는 이름의 당돌한 고양이가 인터넷(www.snowcat.co.kr)에 등장하면서부터. 웹애니메이터 권윤주씨(29)가 창조한 하얗고 통통한 이 고양이는 자신의 도넛을 남이 빼앗는 것을 싫어하고 낮잠을 방해하면 분노한다. 하루 종일 하는 일은 ‘혼자’ 팻 메스니의 음악을 듣거나 쿨픽스 디지털 카메라를 갖고 놀고, 폴 오스터의 소설을 읽으며 주성치의 영화를 보는 것. 가끔 집 밖으로 나가면 자신을 향해 무심히 던지는 사람들의 말투와 시선에 상처를 받는다. 게으르고 빈둥대지만, 섬세하고 외로움을 잘 타는 캐릭터다.

이 쿨(cool)하고 게으른 고양이는 귀차니스트들에게 교과서와 같은 존재. ‘정신없고 귀찮아서 싫다’며 이메일 인터뷰조차 거부하는 권씨가 매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리는 ‘스노우캣 다이어리’는 각종 사이트로 옮겨지며 화제를 모은다.

“처음에는 불 꺼지기 전까지의 시간이 어색할지 몰라. 하지만 곧 익숙해질 거야.” (‘혼자서 영화 보기’)

“어쩌면 타고난 ‘혼자 놀기 염색체’ 라는 것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타고난 혼자 놀기’)

스노우캣이 담담한 어조로 고백하는 자신의 ‘외로움’은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귀차니스트들에게 깊은 공감을 일으킨다. 그의 일기에 네티즌들은 팬 카페를 만들어 피드백을 보내고, 스노우캣이 좋아하는 음악과 영화는 귀차니스트들 사이에서 마니아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그냥 귀찮아…” 나? 귀차니스트

침대에 누운 채 마우스만을 이용해 컴퓨터를 하고 있는 ‘귀차니스트’. 디씨인사인드

정말 귀찮은 걸 싫어하는 이들이라면 보낼 수 없는 열광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귀차니스트라고 부르는 이들이 사실은 고학력 문화 백수일 뿐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많다. 위악적일 정도로 강하게 ‘나는 아무것도 안 한다’고 말하지만 실은 자신과 세상의 불일치를 새로운 트렌드로 만들어낸 문화 생산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놀아도 먹고 살 수 있는’ 자신들의 여유와 문화적 기반을 ‘귀차니즘’`이라는 이름으로 근사하게 포장했을 뿐이라는 지적도 있다.

연세대 사회학과 김현미 교수는 “스스로를 귀차니스트라고 규정하는 이들은 그 속에서 자신들의 게으름을 느슨하거나 건들거리는 자유로움, 히피적 진보성으로 포장하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정말 무능한 이들은 게으를 수 없고, 정말 게으른 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해석도 있다. 문화평론가 김규항씨는 “사람들이 ‘이 더러운 세상’이라고 말하면서도 영합해 살아가는 동안 말없이 혼자 노는 ‘스노우캣’은 좌파 이상으로 급진적인 존재”라고 분석한다. 귀차니스트야말로 메트로놈처럼 꽉 짜여 돌아가는 세상, 기계적인 인간관계, 비인간적인 노동을 거부하며 진지한 소통을 꿈꾸는 ‘진보주의자’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적극적으로 추구하지 못할 뿐이다.

“세상 부적응 소심한 자구책일 뿐”

어떤 해석으로 보든 귀차니스트의 특징은 ‘귀찮아함’보다는 ‘부적응’으로 설명할 수 있다. 언제나 어머니에게 구박을 받지만 발톱을 들이대지 못하고 돌아서는 스노우캣처럼 귀차니스트들이 보여주는 특유의 ‘쿨(cool)함’과 ‘무기력’은 자신이 적응할 수 없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소심한 자구책일 뿐이다.

“난 발렌타인데이가 싫어”라고 외쳤다가 “쟨 누구야? 무섭게 생겼어. 저러니까 발렌타인데이가 싫지”라고 쑥덕대는 소리에 입을 닫아버리는 스노우캣의 모습은 세상 앞에 드러나기를 꺼려하는 귀차니스트들의 소심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스스로를 귀차니스트라고 밝힌 한 네티즌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물건은 마우스”라며 “마우스를 손에 쥐고 있으면 손가락 하나로 세상 모든 소식을 볼 수 있고, 나는 한 마디도 말할 필요가 없다. 키보드 앞에 앉아 뭔가 써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낄 때보다 마우스만 쥔 채 침대에 누워 컴퓨터를 하는 순간이 훨씬 더 행복하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귀차니스트로서의 삶은 영원할 수 없다. 그들도 언젠가는 세상에 나와 살아가야 할 것이고, 스노우캣의 문화 취향에 열광하듯 타인과의 진지한 소통을 꿈꿀 것이기 때문이다.

2002년 12월18일, 대통령선거를 하루 앞두고 스노우캣은 너무나 그답지 않은 일기를 쓴다. “내일은 꼭 투표하러 가야지.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불평만 하고 앉아 있기는 싫으니까.”

마침내 자신의 좁은 방에서 걸어나온 스노우캣처럼, 우리의 귀차니스트들도 자신들이 적응할 수 없는 부조리한 세상에 대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귀차니스트들이 이 세상을 적극적으로 거부할 때 세상엔 어떤 변화가 나타날까.



주간동아 2003.02.06 371호 (p74~75)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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