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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길의 한민족 리포트 ②

홍콩 축구 MVP ‘인생도 MVP’

왕년 한국 국가대표 골키퍼 변호영씨 … 첫 사업 실패 딛고 일어나 오붓한 생활

  • 우길 / 여행작가 wgil2000@dreamwiz.com

홍콩 축구 MVP ‘인생도 MVP’

홍콩 축구 MVP ‘인생도 MVP’

하늘에서 내려다본 홍콩 일대(위). 지하철을 타기 위해 표를 사고 있는 변호영씨. 그는 “한국 축구는 히딩크 감독을 빨리 잊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홍콩섬의 최정상 빅토리아 피크에서 내려다본 밤 풍경을 흔히 100만불짜리 야경이라 하지만 화려함이 예전 같지 않다. 최근 홍콩경제의 추락으로 실업률이 7%를 넘어섰고, 4000홍콩달러(약 60만원) 이하의 월급으로 살아가는 서민들이 30만명에 이르는 우울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파이스턴 이코노믹 리뷰’는 “홍콩 시민들에게는 샴페인보다 맥주가 어울린다”며 홍콩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다.

아직까지 GNP는 2만4700달러로 웬만한 OECD 가입국들보다 높지만 부동산 가격이 절반으로 폭락했고 개인파산자가 1000명당 1명에 이를 정도로 살림이 어렵다. 중국 반환 후 1국2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홍콩정부는 지난해 77억달러의 재정적자를 기록했다.

‘파티가 끝난’ 홍콩의 한국인들은 대부분 자가용을 소유하지 않고 MTR라고 부르는 지하철과 홍콩의 명물 2층버스를 이용하며 남의 눈치 보지 않고 검소하고 자유롭게 살고 있다.

한국인이 홍콩에 널리 퍼져 살기 시작한 것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부터다. 중국에 살던 한국인들이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홍콩을 경유하다가 그대로 눌러앉거나,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을 피해 홍콩으로 피난 왔던 사람들, 약 40가구로 시작했다.

예순 바라보는 나이 … 27년째 거주



홍콩에서 가장 오래 산 한국인을 꼽으라면 단연 홍콩 타임스퀘어의 명물 ‘아리랑’ 식당 주인 찰스 장(81·장철영)이다. 그는 독립운동가였던 부친 장두철씨를 따라 홍콩에 자리잡았고 1965년 이곳에 최초로 한국식당 ‘아리랑’을 개업했다. 이 식당은 지난 한 해 매출만 2000만 홍콩달러(약 30억원)를 기록했다.

현재 홍콩에는 약 7000여명의 한국인이 있는데 대부분 주재원과 그 가족들이다. 홍콩 한인사회의 특징은 주재원으로 입국했다 홍콩이 좋아 독립 후 눌러앉은 경우가 많다는 것. 이순정 한인회장도 1975년 대우 홍콩 주재원으로 이곳에 와 3년 근무를 마치고 귀국했다가 1981년 다시 와서 의류업을 시작했다. 중국 상하이와 칭다오에 공장을 두고 주로 중남미로 연간 1500만 달러어치를 수출하고 있다. 그는 홍콩 한국인 2세들이 다니는 국제학교의 이사장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회장을 만나기 위해 홍콩섬에 있는 한인회 사무실을 찾아갔다가 뜻밖에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 70년대 축구 국가대표팀 골키퍼였던 변호영씨. 1944년생으로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건만 짧은 상고머리와 건장한 체격은 여전했다. 그는 27년째 홍콩에 살고 있다.

변씨는 서울 배재고를 거쳐 연세대 2학년에 재학중이던 1968년 국가대표 선수로 발탁됐다. 당시 국가대표팀에는 이회택·정병탁·박희천(공격), 김정남·김호(수비) 등 쟁쟁한 선수들이 포진해 있었다. 샐러리맨 월급이 2만원 정도였던 시절인데 국가대표 선수는 축구협회로부터 각종 수당까지 월 10만원씩 받았으니 경제적으로도 부족함이 없었다. 변씨는 대학 4년 동안 연고전에서 2승2무를 기록했고 말레이시아 메르데카컵, 태국의 킹스컵, 한국의 박스컵 등 1년에 약 스무 경기를 뛰며 국가대표팀 주전 골키퍼이자 주장으로 명성을 얻었다. 메르데카컵 우승 때는 축구협회로부터 1인당 1000달러씩을 보너스로 받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서울은행 소속으로 계속 태극마크를 달았던 그가 1975년 돌연 대표팀 유니폼을 벗었다. 이유는 인도네시아 원정경기 거부. 사실 1970년대 인도네시아 원정경기는 선수들에게 지옥과 같았다. 30도가 넘는 무더위에 호텔방에까지 출몰하는 도마뱀, 도무지 입에 맞지 않는 음식 등으로 한번 원정경기를 다녀오면 몸무게가 4kg씩 줄었다. 그 기억이 너무 끔찍해서 인도네시아 원정경기를 거부했다가 ‘사퇴’라는 형식으로 사실상 대표팀에서 쫓겨났다.

‘한국 축구대표팀 골키퍼 변호영 사퇴’라는 언론보도가 나가자 당장 홍콩 프로축구팀 세이코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세이코의 구단주가 직접 서울로 날아와 그와 정식 계약을 맺었다. 처음 3개월은 월급 800달러, 그 후 1500달러에 각종 수당을 합쳐 월급 3000달러를 받기로 했다. 요즘 한국 축구선수들의 해외진출이 러시를 이루고 있지만 변씨는 이미 1976년 홍콩팀에 정식으로 입단했다.

처음 몇 달 동안은 홍콩 선수들의 견제가 심했으나 곧 많은 선수들이 신사적인 그의 경기 방식에 매료됐다. “골키퍼와 몸싸움을 하면 공격수들이 다치는 일이 비일비재예요. 골키퍼가 공을 차고 들어오는 선수에게 몸을 날려 수비하다 무릎이 부러지는 일도 있고, 센터링한 공을 향해 뛰어오던 선수가 골키퍼의 주먹에 맞아 이빨이 부러지기도 하죠. 저는 한 골을 먹을지언정 상대선수를 위협하는 수비는 하지 않았어요. 저 때문에 부상한 홍콩선수는 한 명도 없으니까요.”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손가락, 발가락, 손목, 다리 할 것 없이 부러지지 않은 곳이 없고 코뼈가 주저앉아 수술도 여러 차례 했다. 다른 선수의 이마에 받혀 광대뼈가 함몰됐고 이빨은 아래 어금니 두 개만 빼고는 모두 부러졌다. 지금 이는 틀니라고. 게다가 배를 걷어차여 한쪽 신장이 파열되는 바람에 신장 하나로 살고 있다.

그처럼 열심히 뛴 덕분일까. 변씨는 ‘한국신사’로 소문이 났을 뿐 아니라, 소속팀의 성적도 일취월장했다. 세이코팀은 변씨가 합류한 후 12개 팀이 벌이는 홍콩리그에서 5게임만 비기고 전승을 하는 홍콩 축구 역사상 두고두고 남을 대기록을 세웠다. 그는 연속 세 차례 MVP를 수상했다.

2002 월드컵 남다른 감회로 지켜봐

홍콩 축구 MVP ‘인생도 MVP’

홍콩 밤거리의 재기발랄한 젊은이들(위)과 타임스퀘어의 화려한 네온사인.

하지만 그는 1981년 서른여덟의 나이로 축구인생을 정리했다. 역시 체력의 한계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약재와 의류를 파는 잡화점을 시작했으나 3년 만에 가진 돈을 다 날렸다. 공만 차던 그에게 역시 사업은 무리였다. 첫 사업에 실패하고 다시 손댄 것이 수입의류점. 이탈리아에서 고급의류를 직수입해서 팔았는데 예상외로 돈을 좀 벌었다. 홍콩 경기가 한창 좋았던 시절이라 고급의류가 날개 돋친 듯 팔렸던 것.

약간의 목돈을 쥔 뒤 그는 번잡한 홍콩섬을 빠져나와 1982년부터 개발된 란타우섬의 디스커버리 베이로 이주했다. 이곳은 자동차라곤 골프카트와 셔틀버스밖에 없어 공기가 깨끗하고 한적하며 해수욕장, 골프장, 등산로 등도 잘 갖춰져 있다. 지금은 의류점을 접고 건강보조식품을 한국으로 수출하며 처제와 함께 중국을 상대로 한 광고회사 애드차이나를 운영중이다.

“홍콩사람들은 교통질서도 잘 안 지키고 무질서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질서가 있습니다. 정부에서 금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죠. 사실 홍콩은 한국보다도 빈부격차가 심해요. 그렇지만 있는 사람은 비싼 값 주고 호텔에서 먹고 없는 사람은 싼값으로 길거리에서 먹을 뿐 음식은 똑같은 생선, 돼지고기, 닭고기, 두부거든요. 부자가 먹는 음식과 가난한 사람이 먹는 음식이 장소에 따라 값만 다를 뿐 질은 같아요. 제가 홍콩과 홍콩요리를 좋아하는 것도 그 때문이죠.”

변호영씨는 27년 동안 홍콩인으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홍콩에서 살 계획이지만 2002 월드컵 때만큼은 한국인으로서 감회가 남달랐다고 한다.

“전원공격, 전원수비의 토털사커에 필요한 것이 체력인데 히딩크 감독이 그 점을 잘 보완한 것 같습니다. 모두 잘했지만 특히 송종국 선수가 돋보이더군요. 전천후로 활약이 대단했습니다. 김병지 선수도 훌륭한 선수인데 벤치만 지킨 것이 아쉽고요. 한국은 이제 히딩크 감독을 빨리 잊어야 합니다. 더 이상 그 신화에 얽매이면 발전할 수 없으니까요.”

그는 중매 반 연애 반으로 74년 대한항공 승무원 출신인 최숙씨와 결혼했다. 하지만 아내가 임신중에 큰 수술을 받아야 할 상황이 되자 그는 깨끗이 2세를 포기했다. 평생 자식 없이 살아온 변씨 부부는 디스커버리 베이의 한적한 동네에서 새벽산책과 밤낚시를 즐기며 오붓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주간동아 2003.02.06 371호 (p76~77)

우길 / 여행작가 wgil2000@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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