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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삶 | 아일랜드에서 온 호스피스 노라 수녀

병든 자를 위한 30년 헌신의 삶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병든 자를 위한 30년 헌신의 삶

병든  자를 위한 30년 헌신의 삶
새벽 4시, 강원 춘천시 약사동 성 골롬반 의원과 마당을 나눠 쓰는 수녀원에서 구수한 빵 냄새가 피어오른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수녀회 소속 노라 수녀(56)는 1999년부터 매일 새벽 빵을 굽고 있다. 오늘(1월22일)은 도넛과 건포도 스콘, 밀빵을 40개쯤 만들었다. 이날은 춘천의 장날이라 빵의 양을 줄였다. 장날에는 빵장사가 나오기 때문이다.

성 골롬반 의원을 찾아오는 환자들은 대부분 가진 거라곤 병든 몸뿐인 사람들이다. 오랜 병치레로 그나마 있던 재산도 날리고 더 이상 갈 곳 없는 환자들이 이곳에 도움을 청한다. 노라 수녀가 만든 빵은 병원 안에서 판다. ‘사회사업 상담실-호스피스과’라는 팻말이 붙은 방 앞의 작은 유리 진열장 안에 이 빵들이 가지런히 놓인다. 진료비도 없는 환자들에게 500원이라는 가격이 만만치 않아서인지 진열대의 빵이 고스란히 병원 식구들 몫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4년째가 되면서 단골 고객이 꽤 늘었다. 노라 수녀가 만든 밀빵의 주고객은 당뇨 환자들이고 가끔 생일 케이크 주문도 들어온다. 하루 매출은 잘 해야 2만원, 한 달에 40만원쯤 번다. 이렇게 모은 돈을 호스피스병원 건립 기금에 보태고 있다.

사람들은 그냥 노라 수녀라고 부르지만 본명은 한노라 와이즈맨. 노라 수녀의 고향은 아일랜드 남쪽 코크 지방으로 한국으로 치면 전라남도 목포쯤 된다. 이곳에서 젖소, 양, 돼지를 키우고 약간의 과수와 밀을 가꾸는 농가에서 자란 노라 수녀는 1964년 열여덟 살 생일을 앞두고 수녀회에 들어갔다.

“1973년 한국에 올 때 처음 비행기를 탔어요. 그때 수녀회가 한국, 필리핀, 홍콩, 남미 등지로 해외선교를 나갔는데 저는 선택의 여지 없이 한국이었죠. 한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와서 1년 정도 서울에 머물며 한국말을 배우고 목포 골롬반 병원 소아과와 산부인과 병동에서 9년간 있었죠.”

병든  자를 위한 30년 헌신의 삶

노라 수녀가 말기환자와 그 가족을 위로하고 있다.

어느새 서울말보다 전라도 사투리가 익숙해졌을 때 아일랜드로 귀국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4년간 아일랜드에서 노인 수녀들을 간호하는 일을 할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왠지 한국 생각이 간절했죠. 이번에는 제가 가고 싶다고 했어요. 목포에서 6개월간 있다가 1989년에 춘천으로 왔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이사하지 않을 거예요. 제 집이 여긴데요.”



스물여섯에 한국에 와서 스물다섯 해를 한국에서 보낸 노라 수녀에게는 14년째 살고 있는 춘천이 고향이다. 150cm를 조금 넘는 키에 넉넉한 몸집의 노라 수녀는, 수녀복만 아니라면 시장통 식구들과 구분하기 어렵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그 해 춘천 성 골롬반 의원에서 호스피스 활동을 시작했다. 호스피스란 죽음을 앞둔 말기환자를 돌보는 활동으로, 환자가 여생 동안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고 마지막 순간을 평안하게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물론 유가족의 고통과 슬픔을 덜어주는 일도 호스피스의 역할이다. 호스피스란 말은 중세 성지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자들이 쉬어 갈 수 있도록 마련한 숙소 ‘호스페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1989년 4월 노라 수녀와 상담자 1명으로 출발한 호스피스과는 10여년이 지난 지금 간호사 4명, 상담자 2명, 봉사자 10명으로 식구가 불었다. 노라 수녀는 새벽 4시에 일어나 2시간 동안 빵을 만들고 6시에 성당으로 가서 미사를 드린다. 그리고 아침식사를 하고 다시 기도를 한 뒤 오전 8시45분부터 병원 업무를 시작한다. 오전 9시에서 오후 5시까지 말기환자 100여명의 가정을 일주일에 한 차례씩 방문하고 있다.

기자와 만난 1월22일 오전에만 벌써 세 집을 다녀왔다. 노라 수녀의 행동반경은 춘천을 중심으로 홍천, 가평, 화천에 이른다. 병원에서 내준 차를 타고 다니지만 눈·비라도 뿌리는 날은 마음만 바쁘다. 이날 직장암 말기로 내일을 기약하기 어려운 홍천의 한 할머니를 만나고 온 터라 노라 수녀의 음성은 환자에 대한 안쓰러움으로 노기마저 서려 있었다.

병든  자를 위한 30년 헌신의 삶

“이제 춘천이 고향이요 집”이라고 말하는 노라 수녀(위). 춘천 성 골롬반 의원 호스피스과 식구들.

“벌써 3년째 버티고 계시는데 이제는 길어야 일주일일 것 같아요. 손자 둘을 혼자 키우셨고 정말 평생 깔끔하게 살아온 분인데 거동도 못하고 누우니까 돌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딸은 멀리 있고 아들은 집에 붙어 있지를 않고. 아들에게 차라리 병원으로 모시자고 했더니 싫다고 하더군요. 우리 병원에는 집에서 돌보기 힘든 말기환자들을 위한 병실이 3개 있는데, 이곳에는 보호자가 함께 들어오게 돼 있거든요. 그러지 않으면 환자를 맡기고 장례까지도 나 몰라라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의식이 남아 있는 할머니가 “같이 있어달라”고 애원할 때 노라 수녀는 무정한 가족들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어머니를 위해 시간을 쓰는 일이 그리도 어려울까. “요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봐요”라며 씁쓸해한다.

노라 수녀는 죽음이란 하나의 삶을 완성하는 순간이라고 말한다. 다음 세상으로 가기 위해 우리는 잠시 이 세상에 머물 뿐이다. 호스피스는 마지막 순간까지 환자의 손을 잡아주고 다른 세상으로 편히 떠날 수 있도록 돕는다. 매달 그렇게 떠나보내는 이가 15~20명쯤 된다.

“몸이 고통스러운 게 아니라 헤어지는 일이 힘들죠. 그래서 환자들은 가족에게 죽을 것 같다는 말을 하지 못해요. 가족들 역시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환자와 대화하기를 꺼리죠. 암환자 가족 중에는 사람이 죽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며 불안해하는 이들이 많아요.”

넉넉한 형편에 적절한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도 죽음 앞에서 약해지기는 마찬가지다. 며칠 전에는 가평에 사는 말기 암환자 가족이 병원으로 찾아와 “환자가 수녀님을 기다린다”며 방문을 청했다. 그 환자는 충분한 치료를 받고 있고 가족들이 워낙 잘 돌보기 때문에 안심하고 2주째 방문을 하지 않았다.

“환자에게 무엇을 도와주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더니 ‘매주 거르지 말고 찾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하는 거예요.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일은 기도밖에 없는데 환자는 의지할 데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안심하죠.”

하루 종일 종종걸음 쳐도 방문할 수 있는 환자는 10명 안팎. 그래서 노라 수녀는 환자들과 24시간 함께할 수 있는 호스피스 병원을 꿈꾸었다. 마침 97년 한 독지가가 춘천시 동내면 거두리에 6700여평의 땅을 내놓았다. 이곳에 50병상 규모의 호스피스 병원을 짓기로 결정한 후 노라 수녀는 빵을 굽기 시작했다. 후원금만 기다리지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해보자는 취지였다.

총 34억원이 드는 이 공사는 지난해 말 첫 삽을 떴다. 정부와 춘천시가 14억5000만원을 보조하기로 약속했으나 여전히 10억원이 모자란 상태다. 병원 식구들이 노라 수녀가 만든 빵 외에 잼, 미역, 치커리 등을 팔아 건립 기금에 보태고 있지만 이렇게 더디 벌어 언제 10억원을 모을까. 한숨을 쉬는 기자에게 노라 수녀는 “하느님이 도와주시겠죠”라며 활짝 웃었다. 청빈과 순결, 복종으로 평생을 살아온 이 ‘주님의 신부’에게 하느님 ‘백’만큼 든든한 게 있으랴.

춘천에서 성 골롬반 의원을 찾아가려면 약사동 입구 ‘수녀병원’ 혹은 ‘성당병원’을 찾으면 된다(춘천 성 골롬반 의원 호스피스과 033-241-3497).



주간동아 2003.02.06 371호 (p92~93)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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