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간동아 로고

  • Magazine dongA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허시명의 레저 기행 | 빙벽등반

모험과 도전 … 겨울 기둥 ‘짜릿한 유혹’

  • 허시명 / 여행작가 storyf@yahoo.co.kr

모험과 도전 … 겨울 기둥 ‘짜릿한 유혹’

모험과 도전 … 겨울 기둥 ‘짜릿한 유혹’

얼어붙은 구곡폭포를 오르는 사람들.

강원도 횡성과 평창 사이에 태기산이 있다. 삼한시대, 경상도 지방을 근거지로 삼았던 진한의 태기왕이 신라군에 쫓겨 들어온 산이다. 태기왕은 이곳에 산성을 쌓고 신라군에 맞섰지만 패퇴하고 말았다. 그 뒤로 이 산을 태기왕을 기려서 태기산이라고 불렀다 하니, 태기산은 근 2000년의 연륜을 지닌 이름인 셈이다.

그 태기산 자락에 태기폭포가 있다. 횡성에서 19번 지방도를 따라 홍천 방면으로 가다 보면 봉복사라는 절이 나온다. 그 절 입구에서 태기산성 방향으로 한 시간쯤 걸어 올라가면 등산로에서 비켜난 계곡 안쪽에 태기폭포가 있다. 높이 20m가 채 안 안 돼 보이는 태기폭포는 꽁꽁 얼어 있었다. 거대한 흰 천이 계곡에 걸쳐져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태기폭포는 빙벽등반의 명소는 아니다. 당일 훈련 코스로 알맞은 곳이다. 빙벽등반의 명소로는 북한강변의 강촌유원지 구곡폭포를 첫손에 꼽는다. 그곳은 평일에도 빙폭을 오르려는 사람들이 긴 줄을 이루는 곳이다. 주말이면 수많은 자일에 사람들이 줄줄이 매달려서 연쇄 추락과 낙빙(落氷) 사고가 우려될 정도다. 60m 높이의 구곡폭포에서 실력을 쌓은 사람들이 다음으로 도전하는 곳이 설악산 토왕성폭포다. 구곡폭포를 연속해서 다섯 번 오를 수 있는 실력이면 280m 높이의 토왕성폭포에 도전할 만하다.

빙벽등반 능력은 철저히 장비의 진보와 비례해왔다. 1970년대 후반 토왕성폭포의 첫 등반에 성공했을 때는 12일이 걸렸다. 등산할 때 지팡이로 쓰는 피켈로 빙벽에 계단을 만들면서 올라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40분이면 오를 수 있다. 빙벽화에 부착하는 아이젠의 앞부분을 성난 맹수의 이빨처럼 만들어서, 그 앞이빨로 빙벽을 찍어 차며 오를 수 있게 된 덕택이다. 이 기술을 ‘프런트 포인팅(front pointing)’이라고 한다.

모험과 도전 … 겨울 기둥 ‘짜릿한 유혹’

손에 든 아이스바일로 빙벽을 찍으면서 오른다.





빙벽등반을 하는 모습을 보면 아찔하고 위험천만해 보인다. 금방이라도 미끄러져 얼음덩어리와 함께 떨어져 내릴 것만 같다.

빙벽이나 암벽을 등반하는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있다. “사람이 가장 많이 죽는 곳은 안방과 병원입니다.” 하이얀산악회 정윤영 회장은 이렇게 말한다. “원래 등산은 목적지를 향해 가다 바위를 만나면 암벽등반을 하고, 눈이 쌓여 있는 곳에서는 설벽등반을 하고, 얼음폭포가 나오면 빙벽등반을 하는 겁니다. 이를 알파인 스타일이라고 하는데 요즘에 와서는 세분화돼서 스포츠 클라이밍이라는 독립된 등반 형태가 생겼죠. 나는 더 어려운 암벽등반을 하겠다, 나는 빙벽등반이 더 매력이 있다 해서 해외원정을 다니고 빙장(氷場)을 찾아다니는 경우들이죠.”

백문이 불여일견이고, 백견이 불여일행인지라, 나는 빙벽등반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인공암벽에 한번 붙어본 경험밖에 없는데도 충분히 오를 수 있다고 산악회 회원들이 나를 부추긴다. 빙벽등반은 아무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안전을 확보해주는 자일이 있고, 오를 수 있을 만큼 오르다가 힘들면 두 손을 놓고 줄에 매달려 내려오면 되니, 겁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모험과 도전 … 겨울 기둥 ‘짜릿한 유혹’

빙벽은 손 구실을 하는 아이스바일, 플라스틱 빙벽화, 아이젠(왼쪽부터 시계방향) 등 다양한 도구를 이용해 오른다.

필수장비를 건네받았다. 우선 암벽등반할 때 쓰는 것과 같은 안전벨트를 허리에 찼다. 씨름의 샅바처럼 허리와 한쪽 허벅지를 감게 되어 있다. 안전벨트를 허리에 단단히 조여맨 다음 빙벽화를 신었다. 빙벽화는 로봇신발처럼 딱딱하다. 스키화와 비슷한데 발목을 잡아주는 부분이 스키화보다는 유연하다. 빙벽화는 플라스틱으로 된 것과 뻣뻣한 가죽으로 된 것이 있는데 반드시 빙벽화를 신고 빙벽을 올라야 한다. 빙벽화 앞뒤에 아이젠을 장착할 수 있는 홈이 패어 있기 때문이다.

빙벽화 홈에 아이젠을 장착했다. 눈 덮인 산길을 갈 때 차는 아이젠은 발바닥 중간에 이빨 네 개가 달렸는데, 빙벽 아이젠은 발바닥 전체를 감싸고 이빨도 여러 개가 달려 있다. 플라스틱 빙벽화가 발목을 옥죄고 있어 앞으로 걷기가 힘들었다. 발을 나란히 해서, 옆으로 걸어야 했다. 우선 경사진 빙판에서 걷는 연습부터 했다. 발을 약간 들어올려서 힘차게 내딛어야 했다.

앞서 오르는 사람들이 얼음벽을 아이스바일로 찍으며 오르는지라, 얼음조각들이 떨어져 내렸다. 고로 헬멧은 필수다. 주먹만한 얼음조각이 떨어지면 헬멧이 벗겨질 만큼 충격이 심하므로 단단히 조여 써야 한다. 막상 빙벽 밑에 붙어서 빙벽을 올려다보니 빙벽은 빙판처럼 평평한 게 아니었다. 무수한 고드름이 서로 엉겨붙어 우둘투둘한 홈이 많고 튀어나온 배처럼 불룩했다. 그리고 물방울들이 연신 흘러내리고 있었다. 낮이라 날씨가 좀 포근해진 탓도 있지만 폭포는 원래 물길이 아닌가. 물방울이 덜 튀는 쪽으로 오르기 위해 방향을 잡았다. 이때 산악회 회원 한 사람이 고어텍스 외투를 내게 벗어준다. 방수복이다. 얼음조각과 물방울 때문에 방수복을 입어야 한다.

이렇게 완전무장을 하고서 손에는 낫처럼 생긴 아이스바일을 들어야 한다. 손바닥으로 얼음벽을 오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이스바일의 끝은 톱니처럼 생겼다. 바일로 빙벽을 찍으면, 바일 끝의 톱니가 홈을 내면서 걸리게 된다. 그러면 바일의 손잡이를 잡고 오른다.

자일에 몸을 걸고서 빙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저 앞만 보며 오른다. 앞이래야 하얀 빙벽이다. 손을 뻗어 아이스바일로 찍고, 발을 들어 발끝으로 빙벽을 힘껏 차면서 오른다. 신통하게 발끝에 달린 쇠붙이 이빨에 내 몸이 실린다.

얼마쯤 올랐을까? 밑을 내려다보고 싶었다. 인공암벽은 발 디딜 곳을 찾느라 밑을 보면서 오르는데 빙벽등반은 굳이 밑을 보지 않아도 된다. 나는 엉덩이를 뒤로 빼고 밑을 내려다보았다. 아스라했다. 덜컥 겁이 났다. 내가 이렇게 많이 올라오다니, 이래도 되는 걸까? 그러자 더 이상 오를 수가 없었다. 아이스바일을 든 팔이 제대로 펴지지 않았다. 1m 높이에서 2m 높이를 오르는 심정으로 올랐는데, 이제는 그게 아니다. 10m 높이에서 11m 높이를 오르는 거다. 뒤를 돌아본 자에게 내린 저주다. 소돔과 고모라를 탈출하던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던 순간 소금기둥이 되었던 이유를 알겠다.

빙벽은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큰 꿈을 향해 갈 때는 결코 뒤돌아보지 말라.”



주간동아 2003.02.06 371호 (p124~125)

허시명 / 여행작가 storyf@yahoo.co.kr
다른호 더보기 목록 닫기
1217

제 1217호

2019.12.06

아이돌 카페 팝업스토어 탐방기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