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68

2003.01.16

‘세대혁명’ 불길, 주류를 바꾼다

노무현 후보 당선은 정치권력 대이동 신호탄 … 재계·학계도 40대 약진, 30대 후반의 도전도 거세

  • 윤영호 기자 yyoungho@donga.com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03-01-10 10: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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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대혁명’ 불길, 주류를 바꾼다
    대한민국 메인스트림이 급격히 바뀌고 있다.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새로운 파워 엘리트가 급부상하고 있다는 얘기다. ‘세대혁명’이라 불렸던 제16대 대통령선거에서 50대의 노무현 후보가 당선된 것만을 두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이미 정치를 제외한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한국 사회의 권력은 급속히 이동중이었다. 노무현 당선자의 등장으로 정치권에서도 뒤늦게나마 이런 흐름이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이런 흐름의 중심에는 40대와 50대 초반의 ‘신주류’가 있다. 30대 후반의 도전도 거세다. 대한민국이 젊어진다는 얘기도 여기에서 비롯됐다. 무엇보다 ‘낡은 정치 청산’을 내세운 노무현 당선자의 등장 이후 예고된 ‘정치 빅뱅’은 정치권 세대교체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대선에서 패배한 한나라당이나 승리한 민주당 모두 국민적 변화 욕구를 수렴하기 위해서는 노쇠한 지도부 개편이 필수적이라는 ‘젊은’ 소장파 의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노당선자는 이미 대선 유세 기간중 50대 초반의 정동영 의원과 40대의 추미애 의원을 ‘차차기 주자’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바 있다. 1970년대 초 김대중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주도했던 ‘40대 기수론’이 30여년이 지난 2000년대 초반에 다시 등장할 법도 하다. ‘3김 시대’가 끝나면서 정치권에서 40대가 전면 부상하고 있다는 것은 역사는 돌고 돈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보여준 셈이다.

    경제계에서는 이미 50대 초반도 ‘낡은 세대’로 치부되고, 중심축이 40대로 급격히 이동했다. 최근 대기업뿐 아니라 공기업, 심지어 가장 보수적인 집단으로 분류되던 금융계에서도 40대 임원이 등장하고 있다. 경제계에서는 이미 ‘45세 전에 임원으로 승진하지 못하면 정년퇴직해 집에나 가야 한다’는 뜻의 ‘사오정’이라는 말이 유행어가 된 지 오래다.

    대기업들 40대 대표이사 발탁 잇따라



    40대의 약진은 최근 실시된 LG, SK, CJ, 한화 등 대기업 인사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CJ는 56년생인 박동호씨를 CJ CGV 대표이사 부사장으로 임명함으로써 창사 이래 최초로 40대 대표이사를 탄생시켰다. SK그룹과 LG전자의 신규 임원 평균연령은 44세에 불과하다. 한화 역시 60대 이상 최고경영자들을 그룹 운영위원으로 2선 후퇴시키면서 40대 3명을 계열사 대표이사로 발탁해 사실상 세대교체를 단행했다.

    ‘40대 돌풍’은 중견 기업과 보수적인 은행, 공기업에까지 몰아치고 있다. 최근 웅진그룹은 61년생인 문무경씨를 웅진코웨이 대표이사 상무로 임명하는 등 주력 4개사의 대표이사를 모두 40대로 채웠다. 외환위기 이후 하영구 한미은행장(당시 49세)을 선두로 40대 은행장이 등장했던 은행권에서도 지점장과 임원 승진에서 40대의 비중이 크게 높아졌고, 인사에서 보수적 성격을 띠는 공기업인 KT의 경우에도 임원의 40%가 40대다.

    이런 현상에 대해 LG 경제연구소 이춘근 연구위원은 “경륜과 모험정신, 도전의식을 함께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40대는 임원 역할에 가장 적합한 세대”라며 “실력 위주의 인사가 계속된다면 앞으로도 40대가 기업 경영진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학계에서도 세대교체의 흐름이 뚜렷이 읽힌다. 먼저 눈에 띄는 건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가들의 잇따른 퇴임이다. 지난해에만 서울대의 김윤식(국문학)·김경동(사회학)·안병직(경제학) 교수, 연세대의 박동환(철학)·이상섭(영문학) 교수, 동국대 한상범 교수(법학)와 국민대 조동걸 교수(사학)가 강단을 떠났고, 올해는 서울대 김진균(사회학)·백낙청(영문학) 교수, 숙명여대 이만열 교수(사학) 등이 줄줄이 정년퇴임을 맞는다.

    이들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이 40대 젊은 학자들이다. 특히 노무현 당선자의 등장은 이들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위원 25명 중 19명이 교수나 연구원들이며, 이들의 평균연령은 49.8세에 불과하다.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 당시부터 노당선자를 도왔던 정책자문단의 국민대 김병준 교수와 성공회대 정해구 교수, 한림대 성경륭 교수도 모두 40대의 젊은 교수들이다.

    공직사회에서도 노당선자의 등장을 계기로 세대교체 바람이 불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50대 초반의 총리실 고위 관계자는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의 장관들이 다수 발탁되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럽게 전망했다. 경제부처를 잘 아는 민주당 한 전문위원도 “DJ 정부 들어 중용된 50, 60대 경제관료들로는 개혁을 할 수 없다는 게 드러나지 않았느냐”면서 관가의 세대교체를 주문했다.

    공직사회에서는 특히 다면평가의 전면 도입에 따른 파급효과를 진단하느라 부산스러운 모습이다. 한편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임명권자에게만 잘 보임으로써 잘 나가던 구시대적 관료들이 급속히 힘을 잃고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중용되면서 급격히 세대교체가 이뤄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부하 직원들 눈치까지 봐야 한단 말이냐”는 볼멘소리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 들어 경제관료들의 물리적인 나이가 젊어진다고 해서 그것을 진정한 세대교체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참여연대 재벌개혁센터 소장 김상조 교수(한성대 경상학부)는 “대부분의 경제관료들은 시장을 말하면서도 아직도 ‘관치경제’ 시대의 의식에 젖어 있는데, 이들을 발탁해 경제개혁을 맡긴다고 해서 세대교체라고 할 수 있는지도 의심스럽고, 경제개혁도 제대로 될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세대혁명’ 불길, 주류를 바꾼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40대 젊은 학자들을 중심으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를 구성했다. 2002년 12월 30일 열린 첫 회의 모습.

    인터넷은 이번 대선을 통해 인쇄매체의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했다. 열 번째 파워를 가진 미디어로 평가받는 30대의 다음커뮤니케이션 이재웅 사장은 그 선두에 서 있다. 인터넷 미디어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는 이번 대선으로 온라인 파워 엘리트로 부상한 대표적 인사다.

    이처럼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40대 ‘젊은 피’가 급부상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 자신 50대인 박세일 전 청와대 정책기획수석비서관은 “인간이란 자기 경험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존재”라고 전제, “국가주도형 경제개발 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된 상황에서, 그 방식과 경험에서 벗어나기 힘든 50대 이상을 대신해 40대가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시대적 흐름”이라고 분석했다.

    영화계는 벌써 30대 초·중반이 중심부 합류

    대구대 홍덕률 교수는 40대는 ‘낡은 것’으로 상징되는 ‘박정희 패러다임’을 대체할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야 하는 시대적 요구에 가장 민감하다는 점에서 40대의 전면 부상을 당연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성장 제일주의, 반공 냉전주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돌진주의’ 문화, 정치세계와 인간관계에서의 권위주의 등으로 대표되는 ‘박정희 패러다임’은 젊은 세대에게는 비합리적이고, 낡았다는 느낌을 준다”면서 “이런 패러다임으로는 21세기에 우리나라가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도 자명해졌고, 40대는 대학시절 이후 이를 체험적으로 느끼며 고민해왔다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 사회의 40대는 주로 50년대에 태어나 박정희 전 대통령이 긴급조치라는 초헌법적 조치로 통치하던 70년대에 대학을 다닌 세대다. ‘긴급조치 세대’라는 얘기나 ‘475세대’라는 말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이들은 식민지 유산을 이어받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전쟁 경험도 없고, 박정희 유신독재 시대를 살긴 했지만 거기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지도 않았다고 자부한다.

    한편으로 이들에게는 그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는 피해의식이 남아 있다. 유신과 긴급조치로 상징되는 이 시대에 대학을 다녔던 시사평론가 유시민씨는 “우리는 60년대의 4·19세대나 80년대의 386세대처럼 운동권 지도자나 스타를 배출하지 못하고 모두 다 바닥에서 박박 기었다”면서 “하지만 사회 각 분야에서 스스로를 닦아가며 자기 영역을 개척해온 세대”라고 말했다.

    서울대 철학과 졸업 후 80년대 재야 청년운동에 투신했다가 지금은 변리사로 일하고 있는 오세중씨도 비슷한 입장이다. “한때 386세대가 각광받았지만 금방 뿌리가 얕다는 것이 드러났다. 반면 40대는 80년대 학생운동의 씨를 뿌렸지만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는 피해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오씨는 40대는 이제 각 세대의 특장을 한데 모을 수 있는 역량을 키웠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40대로 대표되는 이들 ‘신주류’의 능력이 검증됐느냐 하는 점. 40대로 대표되는 ‘신주류’의 소명이 막중하기 때문에 더욱 문제 된다는 것. 홍덕률 교수는 40대가 해결해야 할 국가적 과제가 얼마나 중요하고 어려운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박정희 패러다임’을 대체할 새로운 패러다임은 아직 무정형 상태지만 이에 대한 국민적 욕구는 이번 대선에서 표출된 대로다. 새로운 파워 엘리트들은 이런 막연한 국민적 욕구를 구체화하고 각 분야별로 정책화해야 한다. 그것도 세대간 권력이동에 따른 갈등을 무리 없이 관리하면서 이 작업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어려움이 있다.”

    40대 신주류의 능력에 대해서는 개혁세력 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민주당 김근태 의원이 대선 과정에서 주장한 ‘열린 연대’는 40대로 대표되는 개혁세력의 검증되지 않은 능력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김의원의 한 측근은 “문제를 제기하는 것과 이를 해결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개혁세력은 문제 해결의 경험과 기량이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개혁세력이 주도권을 잡되 개혁의 수준을 낮추거나 속도를 늦추는 한이 있더라도 광범위한 연대를 통해 실질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과거의 경험을 과연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고려대 경영학과 장하성 교수는 “과거의 경험은 이제는 더 이상 자산이 아니고 부채일 뿐”이라고 못박는다. 외환위기로 파탄난 과거 패러다임 하에서 쌓은 경험이란 더 이상 새로운 시대에서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쨌든 새로운 파워 엘리트가 급부상하는 것은 부인하기 힘든 시대 조류다. 그러나 이들이 만들어낼 새로운 사회구조가 어떤 형태를 띨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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