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53

2002.09.26

초원복집·노조테러=‘鄭風’ 시험대

대선후보 정몽준 둘러싼 5대 쟁점 … 도쿄대 교환교수 경력 진위 논란도

  • < 허만섭 기자 >mshue@donga.com

    입력2003-12-02 15: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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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원복집·노조테러=‘鄭風’ 시험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함께 대선 3강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무소속 정몽준 의원은 베일에 싸인 정치인이다.

    대선후보 지지율 여론조사에서 1, 2위를 다투는 정의원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점점 높아가고 있지만 지금까지 그는 ‘공식 대선후보’가 아니어서 검증 대상에서 제외돼 있었다. 덕분에 정의원은 월드컵 4강신화의 주역, 국제감각이 있는 전문경영인, 열린 사고를 가진 재벌2세 등 비교적 긍정적 이미지로 국민들에게 투영돼온 게 사실이다.

    그러나 정치권 일각에선 정의원이 혹독한 검증과정을 거치면 ‘정풍’도 꺼질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라이벌 정파에서 ‘정몽준 X-파일’을 이미 작성해 놓았다”는 말도 돌고 있다. 대선출마를 결심한 이상 과거 행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후보는 아무도 없다. 유권자들이 대통령후보의 과거 경력과 행적 등을 근거로 후보로서의 자질과 신뢰도를 평가하기 때문이다. 정의원의 생모문제, 정의원의 대학 재학시절 시험 부정행위문제가 이미 제기된 것도 이런 차원에서다. ‘주간동아’는 ‘대통령후보 정몽준’이 유권자들에게 이해를 구하게 될 사안들 중 일부를 미리 짚어봤다.

    초원복국집 사건과 정몽준의 역할

    1992년 대통령선거 직전인 12월 중순, 정주영 후보를 내세운 통일국민당은 “부산 초원복국집에서 부산지역 기관장들이 민자당 김영삼 후보 지지를 위한 선거대책회의를 가졌다”고 폭로했다. 10년 전 일어난 이 사건이 새삼 문제가 되는 것은 ‘정치인의 도덕성’과 관련된 사안에 정의원이 관여돼 있기 때문이다.



    ‘주간동아’가 입수한 95년 3월21일자 서울지방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안기부 현직 직원 김모씨, 국민당 당직자 문모씨는 92년 12월10일 부산 초원복국식당 유리창틀 등에 도청용 송신기 2개를 설치해, 12월11일 오전 8시 부산출신 전·현직 기관장들의 모임 내용을 녹음했다. 김씨 등은 12월11일 밤 11시40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객실에서 정몽준 의원에게 도청내용이 담긴 녹음테이프와 촬영필름을 직접 전달했으며, 정의원은 12월13일 사람을 시켜 이들에게 도피자금 2000만원을 제공했다. 국민당은 이들로부터 제공받은 불법 도청테이프를 근거로 대대적인 정치공세를 폈으나 정주영 후보는 낙선했다.

    당시 초원복국 모임에 참석했던 한나라당 김기춘 의원은 “헌법재판소에서 당시 기관장 모임은 불법이 아니었다고 최종판결이 내려져 모임 참석자들은 명예회복이 됐다”고 말했다. 초원복국 모임의 다른 참석자는 “당시의 도청행위는 ‘대선승리를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발상에서 나온 파렴치한 일이며, 이 일로 ‘통신비밀보호법’이 제정되는 등 불법도청의 비도덕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설명했다.

    초원복집·노조테러=‘鄭風’ 시험대
    정의원은 서울지법에서 ‘징역6월형,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으며 항소를 포기해 그대로 형이 확정됐다. 판결문에 따르면 정의원은 테이프를 직접 건네받고, 도피자금을 제공하는 등 불법도청 테이프라는 사실을 알고도 그 테이프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도청이 과연 안기부 현직 직원과 국민당 하급당원이 독자적 판단으로 벌인 일이었을까. 국민당 고위층의 사전 지시나 요청이 과연 없었을까”라고 지적했다.

    정몽준 의원은 당시 국민당 부산지역 선거대책본부장이었다. 정의원의 지시를 받아 도청 행위자들에게 2000만원을 건네준 사람은 국민당 고위간부인 안모씨였다. 안씨는 정의원과 도청 행위자 2명을 연결하는 중간 고리역이었던 셈이다. 안씨는 현대중공업 부사장출신으로 정의원의 핵심 측근이었으며 사건이 터진 직후 출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당시 불법도청을 직접 지시한 배후가 누구인가는 후보 검증의 중요한 사안이 될 가능성이 높다.

    노조간부 테러사건의 진실은?

    1980년대 말 현대중공업 노조는 ‘128일 파업’이라는 극한 상황을 맞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노조관계자들을 대상으로 한 세 건의 테러사건이 잇따라 일어났다. 89년 1월8일 경남 석남산장에서 수련회를 갖던 현대중공업 노조간부들이 집단구타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같은날 울산지역 현대해고근로자 복직실천협의회(현해협) 사무실도 괴한들의 습격을 받았다. 2월21일 현대중공업 사내 총무과 앞에서 노조간부 7~8명이 괴한들이 휘두른 흉기에 찔려 중상을 입은 사건이 일어났다. 정몽준씨는 당시 현대중공업 전무. 검찰수사 결과 현대중공업 한모 전무가 테러를 사주한 혐의로 구속됐다.

    그러나 파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다음은 ‘주간동아’가 확인한 89년 1월28일자 중앙일보 기사내용. “부산지검 울산지청은 28일 지난 13대 총선 당시 울산 동구에서 입후보한 정몽준 현대중공업 전무의 청년부장이었던 김모씨가 지난 1월8일 (석남산장) 테러주범 이모씨와 함께 콩코드 승용차를 타고 석남산장과 현해협 사무실까지 간 사실을 확인했다. 검찰은 김씨가 이번 테러사건에서 회사 고위층과 테러범 사이의 중간 역할을 한 것으로 보고 연행, 조사중이다. 검찰수사 결과 김씨는 정몽준 전무의 자금지원을 받는 것으로 알려진 조기축구회장을 겸하고 있으며…” 테러에 직접 가담한 혐의로 처벌을 받았던 지모씨 등 2명은 92년 3월 기자회견을 열어 “89년 1월 현대노조원 집단폭행 사건은 정몽준 당시 현대중공업 전무 등의 재가를 받아 실행에 옮긴 치밀히 계획된 사건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현대측은 “터무니없는 날조다. 사건은 한전무의 지휘로 이뤄졌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당시 현대측은 지씨 등에 대해 즉각 명예훼손 혐의로 수사를 의뢰하는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현대그룹 해고근로자 단체가 재수사를 촉구했지만 흐지부지된 것으로 알려졌다. “테러를 사주해 노조를 탄압했다”는 의혹도 대통령후보 검증과정에서 밝혀져야 할 대목이다.

    지난 30년간 현대중공업에서는 1만6000여건의 산업재해가 발생해 330여명의 근로자가 사망했다.(노조측 주장) 현대중공업 산업재해는 전국 사업장 중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조선산업의 특성상 위험한 작업이 많다는 것에 대해선 노조측도 이해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현대중공업 13기 노조는 “산업재해 발생 건수가 별반 줄지 않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지난해 520여명이 산재판정을 받은 데 이어 올해도 8월까지 353명이 산재 처리됐다. 올들어 발생한 사망자도 7명. 노조측은 특히 변압기생산부에서 4명의 근로자가 잇따라 뇌출혈로 쓰러져 이중 3명이 숨진 데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근골격계 등 직업성질환자도 상당수라고 한다. 노조관계자는 “조사를 요구하고 있지만 회사측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현대중공업측은 “자동화공정을 꾸준히 도입하는 등 재해발생을 줄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반박했다.

    현대중공업 주식취득 과정은?

    현재 현대중공업 고문인 정몽준 의원은 이 회사 주식 11%를 소유한 대주주다. 그는 29세에 현대중공업 상무로 출발해 31세(82년)에 현대중공업 사장이 됐다.(저서 ‘일본에 말한다’) 현대중공업 13기 노조관계자는 “정의원은 현대중공업 입사 초기부터 회사 주식을 소유하게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이후 차츰 지분을 늘려 정주영 명예회장 타계 이후 현재의 11% 지분을 보유하게 됐다고 한다. 그러나 자세한 상황에 대해선 경영진 이외엔 잘 모른다”고 말했다. 민주노동당측은 “재벌2세일수록 부의 축적 과정은 투명해야 한다. 정의원이 현대중공업에 입사한 뒤 이뤄진 20여년에 걸친 현대중공업 주식취득 과정이 자세하게 회사 외부에 공개된 적은 없다. 월급으로 산 것인지 혹은 증여를 받은 것인지, 일부 증여를 받았다면 세금관계는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정의원측이 소상하게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도쿄대 교환교수 맞나

    정몽준 의원의 저서 ‘일본에 말한다’에 따르면 “도쿄대학에서 ‘객원교수’라는 신분으로 사토 세이자 부교수에게 신세를 졌다”고 돼 있다.(본문 223p) 또한 사토 교수가 정의원에게 자신의 연구실을 내주는 배려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의원은 자신의 인터넷홈페이지(www.mjchung.pe.kr) 내 ‘MJ프로필’란에선 ‘1987년 도쿄대학교 교환교수’라고 기록했다. 상당수 언론사 인명록에도 정의원이 도쿄대 교환교수를 역임한 것으로 돼 있다.

    정의원이 미국 존스 홉킨스대학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취득한 시점은 93년. 87년은 정의원이 석사학위를 받은 뒤 존스 홉킨스대학 박사과정에 있던 시기로, 정의원은 ‘일본의 정부와 기업 관계’라는 제목의 박사학위 논문 자료수집 등의 목적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아들 정연씨는 미국 하와이대 동서문화센터 ‘객원연구원(Visiting Scholar)’으로 활동한 바 있다. 동서문화센터 관계자는 “객원연구원은 본인이 원해서 자비로 방문해 연구하는 사람이고, 교환연구원은 현지대학으로부터 초빙돼 월급을 지급받는 사람이어서 개념이 크게 다르다”고 말했다. 객원연구원을 교환연구원으로 바꿨다면 ‘경력을 과장했다”는 의혹이 제기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와이대측은 객원연구원에게도 연구실을 내주는 정도의 배려는 해준다고 한다.

    하와이대 사례와 정의원 사례를 단순비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87년 도쿄 체류 당시 정의원은 박사과정 준비생의 신분이었으며, 도쿄대 이외 대학에서 교수직을 갖고 있었다는 흔적이 없다. 또 본인이 자신의 한 저서에서 “도쿄대 객원교수 신분이었다”고 밝히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는 것이다. 정의원은 일본 도쿄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조건에서 연구활동을 했는지, 왜 대외적인 공식자료에는 명칭을 다르게 썼는지 설명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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