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53

2002.09.26

‘천당 밑 분당’이 ‘지옥’으로

10년 만에 ‘살기 좋은 곳’ 매력 상실 … 강남 U턴 등 하나 둘씩 떠나

  • < 구미화 기자 > mhkoo@donga.com

    입력2003-06-10 14: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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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당 밑 분당’이 ‘지옥’으로
    KT 광화문 지사에 근무하는 오만수 과장은 매일 오전 6시면 눈을 비비며 버스에 오른다. 이 시간이 지나면 꽉 막힌 도로에 발이 묶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5년째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 살고 있는 그는 매일 아침 회사에서 샤워며 아침식사 등을 해결한다. “30분만 늦게 나와도 9시 전에 회사에 들어온다는 건 엄두도 못 낼 일이죠.” 오만수 과장은 중앙공원, 율동공원 등 분당 자랑에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지만 교통난 때문에 서울로 나올 예정이다.

    대학교수 A씨는 90년대 초 서울 강남에서 분당으로 옮겨 10년을 살았다. “6년 전쯤 아는 사람의 소개로 성북동으로 나왔었는데 7개월 만에 다시 분당으로 돌아갔을 정도로 분당에 대한 애착이 강했어요.”

    그런 그가 지난 2월 다시 서울 강남 대치동에 전세를 얻었다. 올해 고등학교에 들어간 딸의 교육 문제 때문이었다. 올해 분당 등 수도권 지역이 고교평준화가 되면서 그의 딸도 첫 시행 대상이 되자 고심 끝에 내린 결단이었다.

    쾌적한 베드타운에서 벤처, 오피스타운으로

    ‘천당 밑 분당’이 ‘지옥’으로
    “평소 공부하는 데 환경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지 않았지만 딸아이가 버스를 세 번씩이나 갈아타며 학교를 다녀야 하는 게 마음에 걸렸고, 솔직히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학교에서 과연 입시 준비를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어요.” 그가 이사온 뒤 분당의 이웃들도 하나 둘 강남으로 되돌아왔다.



    A교수는 강남으로 옮기긴 했지만 처음엔 어디까지나 ‘임시’라고 생각했었다. “분당에 형성된 지식인 집단과 쾌적한 환경, 분당 고유의 지역문화는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강남을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했다. “우선 아이들이 학교와 학원에 크게 만족해하고, 교통이 편리해 분당에서 대학까지 길게는 2시간 이상 걸리던 게 이젠 길어야 40분이에요. 그리고 무엇보다 분당이 예전 같지 않아요.”

    분당에 신도시가 개발된 것은 90년대 초. 그렇다면 그동안 분당에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처음에는 강남의 주택 수요를 분산시키려는 분당 신도시 개발의 취지가 성공하는 듯했다. 우선 분당 신도시 개발 이후 강남 아파트 가격이 가파르게 떨어졌다. 이것은 89년 이후 강남 아파트 가격이 하락한 유일한 사례다. 강남에서 살던 사람들이 분당으로 옮기며 평수를 넓힐 수 있었고, 계획도시답게 뻥 뚫린 도로며 주변 녹지가 서울 사람들을 끌어들인 것. 여기에 더해 비평준화 상태에서 서현고등학교 등 명문고가 탄생하면서 강남의 일부 학무모들은 교육을 위해 분당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천당 밑 분당’이 ‘지옥’으로
    주민들도 분당 문화를 만들어내는 데 적극적이었다. 분당지역에 거주하거나, 활동하고 있는 지식인 및 전문직 종사자들이 모여 ‘21세기 분당포럼’(대표 이영해·한양대 교수)을 만들어 정기적으로 토론회를 개최하고 있고, 인터넷에는 분당 주민의 자부심이 역력히 드러나는 ‘분당사랑(www. sater.com)’ ‘id분당(www.bundangid.com)’ 등 인터넷 커뮤니티가 활성화되어 있다. 이들 커뮤니티에서는 분당지역 소식을 비롯해 분당 지명의 유래, 전설 등을 공유하고 분당을 성남시에서 분리하려는 뜻을 모으고 있다.

    그러나 2000년 경기도 용인 신도시 입주가 시작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용인~분당~서울 간 교통량이 크게 늘어 도로 정체가 심화됐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주민들의 만원버스와 지옥철에 대한 짜증도 늘어났다.

    “이제는 천당 밑에 분당이 아니라 지옥보다 더한 교통지옥입니다.” 분당 입주자 대표회의 고성하 회장은 천당으로 비유되던 분당의 환경이 교통지옥으로 전락한 것은 정부의 잘못된 신도시 개발 정책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분당은 정부가 국토개발연구원에 의뢰해 계획도시로 개발했습니다. 반면 용인 등 현재 개발되고 있는 신도시는 지방자치단체에 개발권을 넘겨줘 무차별 난개발이 성행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는 “분당의 각종 부대시설은 택지개발 비용을 부담한 분당 주민들이 만들었다”며 도로를 개발하지 않고, ‘무임승차’하려는 용인시의 정책을 비난했다.

    이영해 21세기 분당포럼 대표는 “분당시민이 원하는 것은 ‘쾌적하고 넉넉한 환경을 갖춘 `베드타운’이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최근 성남시의 벤처타운 개발 계획과 용인 수지 등 주변지역 난개발로 분당의 매력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 “베드타운이었던 분당이 벤처타운, 오피스타운 등으로 변모하면서 여유로운 환경을 원하는 사람들은 아예 용인 등지로 벗어나고, 자녀 교육 문제를 생각하는 사람은 강남으로 되돌아가는 등 분당이 딜레마에 빠졌지요.”

    이교수는 또 “지방자치단체의 무분별한 도시개발을 막아야 한다”며 “분당 주민 대부분이 서울에 생활권을 두고 있는 만큼 지하철 분당선이 조속히 완공되고, 분당을 거치지 않고 용인에서 서울로 통하는 도로가 만들어져 교통난을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최근의 강남 부동산 가격 폭등은 분당 사람들로 하여금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A교수는 “분당에 살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뿌리 일부분을 강남에 두고 있다”며 “따라서 강남의 집값 상승으로 인한 상실감이 클 수밖에 없고, 어떻게든 강남의 끝자락이라도 잡아보려는 생각에서 강남을 바라보고 있다”고 말한다.

    직장인 김기중씨(28)는 최근 예전에 살던 서울 개포동 주공아파트가 6억원이 넘고, 은마아파트를 8억원에도 안 판다는 등의 이야기를 듣게 될 때면 아쉬운 마음이 없지 않다. 김씨의 부모도 “우리가 바보 멍청이라 분당으로 옮겼다”며 한숨을 내쉬곤 한다. 그는 94년 서울 개포동에서 분당의 양지마을로 이사했다. 김씨는 “강남이라는 이름이 주는 매력을 떨칠 수 없고, 직장 등 주 생활권이 서울이기 때문에 굳이 분당에 머무를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모두 강남으로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 김현아 연구원에 따르면 실제로 분당에서 강남으로 옮겨간 사람들은 많지 않다. 강남 사람들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강남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이야기다. 수요는 있는데 물건이 나오지 않다 보니 강남의 아파트 값은 더 오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신도시 개발 정책의 실패로 강남 사람들을 밖으로 분산시키기는커녕 강남에 대한 수요를 더욱 늘리고 있어 악순환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문제는 분당의 상황이 앞으로 더 악화될 수밖에 없다는 점. 판교 개발이 본격화되면 그에 따른 피해를 분당이 고스란히 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경기 성남시 판교동 일대 281만8000여평의 택지개발지구에 2008년 완공을 추진중인 판교 신도시는 서울까지의 거리가 분당신도시보다 가까워 강남을 대체할 최고의 주거지로 주목받고 있다. 분당 입주자 대표회의 고성하 회장은 “용인과 판교 사이에서 분당이 자칫 샌드위치 도시로 전락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전문가들은 “분당의 경우처럼 주변지역 난개발로 10년 만에 강남 회귀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본보기로 삼아 신도시 개발 정책을 마련할 때는 기반시설에 대한 투자가 선행되어야 하고, 교육환경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앞으로 신도시 개발 정책은 최소한 몇 십년 후를 내다보고 ‘신도시=고밀도 아파트단지’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운 유형의 주거환경을 시도해보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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