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31

2002.04.25

스포츠 민족주의는 이제 그만!

  • < 윤평중 / 한신대 교수·철학 >

    입력2004-11-02 13: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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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츠 민족주의는 이제 그만!
    월드컵 축구대회 개막일이 다가오면서 스포츠 민족주의의 세찬 열풍이 다시 한번 불어오고 있다. ‘코리아 파이팅’을 외치는‘붉은 악마’의 응원가가 메아리치고, 국가대표 선수단의 일거수일투족이 대서특필되고 있다. 16강 고지에 올라 한국축구의 오랜 한(?)을 풀고 국위를 선양하자는 바람이 모아지고 있다.

    스포츠를 즐김으로써 우리는 찌든 일상에서 벗어나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친목을 도모하며, 건강을 증진시켜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 또 축구나 야구와 같은 스포츠를 관람할 때는 연고지 팀을 응원하거나 국가대표 팀을 성원함으로써 일상에서는 맛보기 어려운 공동체적 일체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스포츠 민족주의의 이면에는 동시에 많은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다. 자고로 모든 정치체제가 운동 경기를 사회 통합의 수단으로 이용해 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근대 민족국가의 등장 이후, 국가 대항전은 가장 효과적인 ‘국민 만들기’ 수단 가운데 하나였다. 특정 국가체제에 헌신하고, 그것을 떠받치는 지배적 정치·사회 이념을 내면화한 충성스러운‘국민’을 형성하는 데 스포츠는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일본과의 국가 대항전에 우리가 유난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일 것이다. 민족주의가 강력한 정서적 호소력을 발휘하는 우리 사회의 풍토와, 운동 경기에서의 경쟁을 민족(또는 국가) 사이의 대결로 받아들이는 집단 심리는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지난번 솔트레이크올림픽 쇼트트랙 1500m 경주를 둘러싼 파동은 스포츠 민족주의가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1위로 들어온 김동성 선수를 실격 처리하고, 2위인 미국 선수에게 금메달을 준 심판위원회의 결정에 대해 전 국민이 격분해 마지않았고, 온 나라가 주최국인 미국의 농간(?)을 규탄하며 반미 열풍에 휩싸였었다. 우리 언론은 연일 미국이 김동성의 금메달을 ‘강탈’해 갔다는 기사와 논평으로 도배하다시피 했다.

    심판위원회의 결정에 나름대로의 전문적 논리가 있었음을 한국 언론이 다루지 않았고, 그 논리에 대해 우리 국민 절대 다수가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스포츠 민족주의의 엄청난 위력을 증명한다. 최근 이 문제에 대해 우회적으로 언급한 동아일보 모 논설위원의 칼럼이 시민들의 격렬한 항의 공세에 시달린 것도 매우 시사적이다.



    스케이팅 경기 자체가 심판의 주관적 판단이 많이 개입되는 종목이며, 모든 국제 대회에서 주최국의 텃세가 어느 정도 반영된다는 것은 대부분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 김동성 선수의 금메달 박탈 사건은 김선수의 반칙 여부에 대해 심판위원회의 판정과 한국 선수단의 항의가 첨예하게 대립했던, 즉 해당 전문가들의 관점이 날카롭게 충돌한 경우라고 해석될 수도 있다. 물론 이런 언명은 최근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전관왕을 차지한 데서 입증된, 김동성이 세계 최정상급 선수라는 사실과 서로 모순되지 않으며, 그가 흘린 땀과 노력을 부인하는 발언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론의 여지가 있는 사건이나 대상에 대한 냉정하고 입체적인 인식을 민족주의가 저해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다. 민족주의 자체가 뜨거운 감정의 덩어리인 것처럼, 스포츠 민족주의에도 맹목성과 단순성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원적 해석이나 반론의 공간을 질식시켜 한 사회를 평면화한다. 역대 군사 독재 정권이 우민정책의 일환으로 스포츠 민족주의를 부추긴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운동 경기를 민족주의로부터 분리해 삶이라는 요리를 다채롭게 만드는 양념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국가대표 선수들이 경기를 사생결단식이 아니고 ‘즐기면서’ 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 사회는 한층 성숙해질 것이다. 또한 스포츠 민족주의의 이름 아래 용인되어 왔던 국가 주도의 엘리트 스포츠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투자 대신,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동네 잔디 축구장, 소규모 실내 수영장 등의 체육 기반시설들을 방방곡곡에 지어야 한다. 스포츠를 스포츠 자체로 즐길 수 있는 물적 기반과 마음의 여유가 갖추어질 때 비로소 우리 삶의 질은 크게 높아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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