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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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과 그리움…캔버스 앞에 서면 9살 동심”

  • < 구미화 기자 > mhkoo@donga.com

    입력2004-11-01 16: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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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독과 그리움…캔버스 앞에 서면 9살 동심”
    방송인 이계진씨가 1996년 한 화가의 순박하고 동화 같은 삶을 ‘이계진이 쓴 바보 화가 한인현 이야기’라는 제목의 책으로 펴내기 전까지 한인현씨(71)는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개인전 한번 열지 않은, 화가답지 않은 화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 만한 화려한 그림보다는 자신의 한과 슬픔을 담아낸 그림만을 고집한다.

    화가 한인현은 이름난 요리집에서 양념을 공개하지 않듯, 절대 밝히지 않는 혼합재를 이용해 만들어낸 색으로 한지와 도자기 등에 그림을 그린다. 닳아빠진 붓을 마다하지 않고, 때로는 이쑤시개나 성냥개비 등을 붓 대신 쓰기도 한다. 물감이 없을 때는 담배를 물에 적셔 색을 낸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화려한 색채를 띠지 않는다. 모두 저녁 어스름의 쓸쓸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어두운 색채, 암울한 분위기에서도 진실을 담아낸다면 좋은 그림이지요. 저는 잘 그린 그림보다 좋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한인현 화백은 4월23일까지 ‘갤러리 도올’에서 초대전을 연다. 물론 초대전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번 그림에도 향수와 기다림이 짙게 깔려 있다. 한국전쟁중 홀로 월남하기 전 한화백은 고향인 함경남도 흥남에서 아홉 살 때부터 하숙을 했다. 외아들 버릇 나빠질까 걱정하신 부모님이 그를 따로 떨어져 살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어머니가 보고 싶고, 할아버지 품에서 부리던 어리광이 그립다. 그의 그림은 아홉 살 외로운 유년 시절에 멈춰 있는 듯 고독함과 그리움이 가득 배어 있다.

    1995년 내한한 우즈베키스탄 미술대학의 쿠지예프 총장은 한화백의 1994년 작품 ‘기다림’을 보고 “말이 필요 없고, 다만 심장을 아프게 한다”고 했다. 1992년 인사동 한 화랑에서 열린 초대 전시회를 관람한 미술평론가 강성원씨는 “시대의 동향과 거리를 두고 있지만 그 기량과 정서의 고전성이 오히려 눈길을 끈다”고 평했다.



    한화백이 그림에 빠지게 된 것은 흥남고급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인 12세 때. 시장 서점에서 회색 표지로 된 빈센트 반 고흐 화집을 발견한 그는 집으로 달려가 쌀을 퍼다 장에 내다 팔아 화집을 구입했다. 그 시절 반 고흐가 누구인지 알 리 없는 그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끌리는 데가 있었고, 고흐는 그렇게 그의 인생에 들어왔다. 그 일로 부모님께 호된 꾸지람을 듣고 매도 맞았지만 그는 틈만 나면 화집을 펼쳐놓고 반 고흐의 초상화를 그렸다.

    아마도 반 고흐의 예술혼이 그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가족들은 의사가 되길 바랐지만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그는 부모님 몰래 해주미술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친구들과 작전을 짰다. 흥남시립문화학원에 함께 다닌 친구 두 명과 함께 문화학원장의 방에 몰래 들어가 황해도에 가기 위해 필요한 여행증에 원장의 도장을 찍어 달아났다. “기차는 서두르라고 기적을 빽빽 울려대는데 가슴이 두근두근했지요.” 그는 그림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한화백은 자신을 이토록 무모한 그림쟁이로 만든 반 고흐를 지난해에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반 고흐가 죽기 전에 머물렀고 그의 묘소가 자리잡고 있는 프랑스 오베르를 방문한 것. 반 고흐를 그림으로 만난 지 58년 만이다.

    한화백이 고흐의 묘소를 찾은 시간은 한밤중인 새벽 1시경이었다. “그날이 마침 정월 초하루였어요. 한국에서 챙겨간 소주를 들고 세배하러 갔습니다.” 아무리 좋아하는 고흐의 무덤이지만 비가 퍼붓는 한밤중에 공동묘지에 찾아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누군가 뒤에서 목덜미를 잡아당길 것만 같더군요. 그래도 우리 고흐 영감님 성깔이 있으니 천방지축 날뛰는 귀신들에게 불호령 내릴 것이라며 안심했지요.” 한화백은 고흐 영감과 술잔을 주고받으며 술기운으로 공동묘지의 스산함을 떨쳐냈다.

    “고독과 그리움…캔버스 앞에 서면 9살 동심”
    그리고 6개월 후 한화백은 오베르를 다시 찾았다. 이번에 한화백은 자신의 작품 몇 점을 고흐기념관에 남겼다. 사연을 전해 들은 고흐기념관측에서도 그의 작품을 감동적으로 받아들였고, 고흐기념관 회원들만 소유할 수 있는 기념관 열쇠를 그에게 선물했다. 이제 한화백은 반 고흐의 집 주인이 된 셈이다.

    “다시 태어나면 까마귀가 되어 오베르의 밀밭을 날고 싶어요. 그럴 자격이 없다면 까마귀 발톱이라도 될 수 없을까요?” 한화백은 12세 동심 그대로 고흐를 가슴에 담고 있다.

    요즘도 하루 2∼3시간씩 자며 작업에 몰두한다. 이렇게 해서 창조해 낸 많은 작품을 한화백은 절대 팔지 않는다. 자식 같은 작품들을 뿔뿔이 흩어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화백은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화가는 아니지만 그의 작품을 접해본 사람들은 그의 그림이 뿜어내는 깊이와 철학에 작품을 욕심낸다. 일본에서 전시회를 할 때도 그의 작품을 사고 싶어한 일본인이 많았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참 고마운 분들이지요. 하지만 제가 팔아버리면 저 녀석들(작품) 보고 싶을 때 일본까지 가야 하잖아요.”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작품들을 한순간에 날려버린 적도 있었다. 월남 후 얻은 직장이었던 아시아반공연맹 근무 시절, 상관의 배려로 작업실을 마련한 한화백은 그곳에 980여 점의 작품을 보관했다. 그런데 4·19 혁명 때 아시아반공연맹 건물이 불타면서 그림도 모두 재가 되고 말았다. 또 수해를 당해 많은 작품을 ‘수장’시킨 적도 있었다.

    작품을 팔지 않는 그의 고집은 돈에 좌우되지 않는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을 보여주지만 가족의 고생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한국전쟁 때 홀홀단신으로 월남한 그는 서른다섯 살 늦은 나이에 상주환 여사를 만났다. 상주환 여사의 집에서 자취를 한 게 인연이 되었고, 이듬해 결혼했다. 부엌도 없는 단칸방에서 시작해 두 딸을 키우는 동안 가난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지만 부인 상주환 여사는 언제나 모델 겸 든든한 후원자가 돼주었다.

    전쟁 후 아시아반공연맹, 농업진흥공사 등의 직장을 다니면서도 붓을 놓지 않았던 그는 1979년부터 직장을 그만두고 그림에 몰두했다. 삽화와 책 표지를 그리는 것이 생계를 잇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며칠을 밤새워 그린 그림을 출판사에서 퇴짜 놓을 때마다 실의에 빠졌지만 그의 아내는 “백기를 들지 말라”며 응원했다. 아내는 늘 화가 남편을 자랑스러워했다.

    “저는 돈복은 없지만 일복과 인복은 타고났지요.” 그의 곁에는 모델료가 없어 수없이 화폭에 담았던 가족을 비롯해 그를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최근 서울 인사동에서 팔판동으로 자리를 옮긴 갤러리 도올은 이전 개관 기념으로 이름난 화가가 아닌 한화백을 초대했다. 도올의 신동은 대표는 2000년 3월 한화백의 고희 소묘전을 함께 하며 그가 ‘가식 없고 소박한 사람’임을 알았다고 했다. 1983년 도쿄국제미술대전에 출품하기 위해 관련 사무실을 찾았다가 처음 만난 방송인 이계진씨와는 20년 가까이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한화백의 홈페이지를 직접 만들어 운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 고흐를 만나게 해주기 위해 프랑스 여행을 주선한 젊은이도 있다. 이 두 사람은 한화백을 사랑한 게 인연이 되어 결혼했다. 하지만 이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행동이 한화백에게 괜한 소란스러움을 가져다 주지 않을까 염려한다. 한화백이 바보스러울 정도로 맑고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화려한 색채의 기교보다 자신의 온 고독과 슬픔을 담은 진솔한 작품을 그려온 한인현. 그는 고흐처럼 ‘바보 같은 천재’일지 모른다.



    사람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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