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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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경부가 ‘민간의보’ 고집하는 까닭은

각계 반발에도 조기 도입론 다시 꺼내 … ‘시장개방 대비 충격 줄이기’ 의도인 듯

  • < 최영철 기자 > ftdog@donga.com

    입력2004-10-27 14: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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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경부가 ‘민간의보’ 고집하는 까닭은
    최근 ‘존 큐’라는 미국 영화가 의료계에서 큰 화제가 되고 있다. 화려한 캐스팅(덴젤 워싱턴 주연)에도 불구하고 국내 흥행에 완패한 이 영화가 뒤늦게 의료인들의 입에 회자되는 이유는 미국 민간의료보험의 폐해를 다룬 내용 때문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평범한 미국의 중산층 존 큐. 어느 날 갑자기 야구장에서 그의 아들이 쓰러진다. 그러나 자신이 가입한 민간의료보험의 등급이 낮다는 이유로 아들은 심장이식 수술 대기자 명단에서 삭제된다. 그러자 존 큐는 병원을 점거하고 인질극을 벌이며 민간의료보험의 허상과 비인간성을 비판한다.

    재경부가 ‘민간의보’ 고집하는 까닭은
    보험료를 얼마나 내든 똑같은 의료서비스를 받는 건강보험(공보험) 체계에 익숙한 우리 국민에겐 이 영화의 내용이 생소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공보험이 한 보험회사의 민간의료보험보다 규모가 작고 그 가입 여부도 개인의 선택에 맡겨져, 전 국민의 40%가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미국에서라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미국 민간의료보험의 경우 내는 보험료에 따라 단계별로 가입자에 대한 진료의 폭과 서비스 수준이 달라지기 때문에, 민간의료보험의 등급이 그 사람의 지위나 부를 상징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민간의료보험 도입을 둘러싸고 정부와 시민단체가 치열한 공방을 벌이는 상황에서 개봉된 이 영화는 양쪽 모두에게 민감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민간의료보험의 조기 도입을 주장하는 정부(재정경제부)에게 이 영화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영화다. 민간보험 도입론자들의 모델인 미국 민간의료보험의 허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셈이기 때문. 그러나 민간의료보험 도입을 반대하는 시민단체로서는 훌륭한 원군을 만났다.

    사실 민간의료보험 문제는 지난해 보건복지부가 도입을 검토하다 시민단체의 극렬한 반발에 부딪혀, 건강보험 재정적자가 해소되는 2006년 이후로 논의 자체가 연기되었다. 그동안 민간보험의 도입을 주장해 온 대한의사협회조차 “도입 원칙에는 찬성하나 시행 시기는 많은 고려를 거쳐야 한다”며 신중론을 펴고 있는 상황. 그런데 지난 3월17일 재경부가 갑자기 민간의료보험의 조기 도입을 검토하겠다고 나서면서 논쟁의 불씨가 되살아났다. 시민단체들은 즉각 “민간의료보험 조기 도입은 의료서비스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초래하고 보험 재정난을 더욱 악화해 종국에는 공보험 체계를 붕괴시킬 것”이라며 반발하고 나섰다. 하지만 재경부는 시민단체의 이런 반박에 쉬 물러서지 않을 태세다.



    재경부가 이날 발표한 민간의료보험의 얼개는 지난해 12월 보건복지부 민간의료보험 특별팀(위원장 김한중 연세대 보건대학원장)이 낸 보고서와 별다를 게 없다. 일단 공보험(건강보험)에는 현재처럼 의무적으로 가입하되 MRI나 CT 촬영 같은 고가장비 시술비나 간병비, 특진료, 고가 약품비 등과 같은 비급여 부분, 환자 본인 부담금은 민간보험에서 지급받도록 한다는 것이다. 재경부는 “고급의료에 대한 수요가 엄존하고 해외 원정 진료로 상당한 국부 유출이 이루어지고 있는 만큼 민간의료보험을 도입하면 경쟁체제로 인해 의료서비스의 질이 향상되는 것은 물론, 해외 원정 진료도 막을 수 있다”고 조기 도입의 불가피성을 역설했다. 즉 기초적인 진료는 공보험인 건강보험으로 해결이 되니, 여유 있는 사람은 민간보험에 가입해 고급 의료서비스를 받으면 된다는 논리다. 재경부 한 관계자는 특히 “암보험 등 유사 민간의료보험 시장이 건강보험 재정에 육박하는 상황에서, 민간의료보험의 전면적 도입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시대의 대세”라고 설명한다. 과연 그럴까.

    시민단체들은 우선 공보험이 지불하는 보험급여액이 전체 진료비의 50%에도 못 미치는 현실에서 민간의료보험이 전면적으로 도입되면, 그 수요가 폭증하면서 중산층을 중심으로 공보험에 대한 보험료 지불 거부 현상이 광범위하게 발생할 것이며, 이는 결국 보험재정 파탄으로 이어져 건강보험이 와해될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이 과정에서 현재 헌법재판소에 위헌심판 계류중인 건강보험 요양기관 강제 지정제도가 사문화되면서 병·의원들은 건강보험공단의 공보험 요양기관 지정을 거부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병원들이 모두 민간보험사와 의료보험 계약을 체결해 공보험은 설 자리가 없어진다는 것. 민간보험사와 1대 1 계약을 맺은 일반 병·의원은 민간보험 가입자 우선 진료제도를 도입해 건강보험 가입자들을 기피할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라는 게 시민단체의 주장이다. 이 주장대로라면 건강보험에만 가입한 서민들이 현재의 의료보호 대상자보다 못한 처지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 문제다.

    국회 보건복지위의 한 관계자는 “민간보험이 제대로 정착한 독일과 영국의 경우 총 진료비 중 공보험의 급여 비중이 80%에 이르기 때문에 민간보험은 초고가 진료비가 필요한 일부(희귀병 수술)에 한정된다”고 반박한다.

    민간의료보험 도입의 문제점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재경부는 심지어 민간의료보험이 도입될 경우 건강보험공단이 가지고 있는 개인 병력 자료를 모두 민간보험사에 넘긴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인도주의실천 의사협의회 우석균 정책실장은 “이는 정부가 보험사에게 병력자의 보험 가입을 거부하라고 시키는 꼴이나 마찬가지다. 만약 이런 상태에서 공보험이 무력화할 경우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소위 차상위 계층을 양산하는 결과를 빚을 것”이라고 비판한다. 우실장은 또 “돈 많은 환자들이 원정 진료를 받는 것은 의료기술의 질에 관한 문제인데, 병원이 경쟁한다고 의료기술이 모두 발전한다는 논리는 문제가 있다. 더욱이 외국계 민간보험이 들어올 경우 원정 진료는 더욱 심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재경부가 ‘민간의보’ 고집하는 까닭은
    그렇다면 이런 비판을 받으면서도 재경부가 공보험을 책임지는 복지부 동의도 없이 민간보험 조기 도입을 일방적으로 발표한 속내는 뭘까. 이에 대한 국회 보건복지위 소속 한 의원(민주당)의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우루과이 라운드 후신인 도하개발아젠다(DDA)가 출범함에 따라 재경부는 지금 어떤 시장과 상품을 개방해야 할 것이냐는 결정을 올 6월까지 내려야 한다. 금융시장 개방 문제에 맞닥뜨린 재경부는 결국 민간의료보험 시장을 추가 개방 대상으로 선정한 것이다. 2005년부터 미국에 민간의료보험 시장을 개방하자니 먼저 국내 의료보험 시장부터 민영화해야 그들이 들어올 때 마찰이 적어지므로 재경부 행보는 그만큼 바빠질 수밖에 없다.”

    재경부도 이런 속내를 굳이 감추려 하지 않는다. 재경부 한 관계자는 “올해부터 시작될 DDA협상이 3년 과정을 거쳐 타결될 경우, 이미 이루어진 보험시장 개방과 함께 의료시장 개방 확대가 불가피하다. 따라서 국내에 진출할 외국 의료법인 등을 국내 의료체계 내에 끌어들이려면 거기에 맞는 의료보험 체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즉 자국 내 민간보험사와 의료보험 계약을 맺고 있는 미국 의료법인이 국내에 들어오면 건강보험(공보험)과 마찰을 일으키게 되므로, 우리도 미국처럼 민간의료보험 체제로 빠르게 전환해야 한다는 게 재경부 입장.

    “돈 많은 사람은 외국 민간보험에 가입해 해외로 원정 진료 나가고, 건강보험에만 가입한 서민들은 일반 병·의원의 진료 거부로 보건소와 국립·시립 병원 앞에 줄 서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한 시민단체 간부의 이런 우려는 단지 기우일까? 사람의 생명과 직결된 의료보험 문제는 정치적 고려에 의한 ‘흥정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게 시민 대다수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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