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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엔지니어들 ‘엑소더스 행렬’

캐나다는 물론 동남아, 북유럽 국가에 취업… LG 출신 하이닉스 직원들 행보에 주목

  • < 성기영 기자sky3203@donga.com >

반도체 엔지니어들 ‘엑소더스 행렬’

반도체 엔지니어들 ‘엑소더스 행렬’
지난해 말 삼성전자 연구원직을 그만두고 취업비자를 받아 캐나다 오타와의 반도체 업체인 앳모스에 취업한 성재승씨(33). 성씨가 최근 직장일 이외에 또 하나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는 일이 있다. 바로 국내에서 문의해 오는 동료 엔지니어들의 자문에 응하는 일이다. 직장 동료는 물론 거래업체 직원, 대학 동기 심지어 구인구직전문업체인 서치 펌(search firm)을 통해 성씨의 전화번호만을 소개받고 전화를 하는 생면부지의 사람들도 있다고.

전화나 이메일로 문의해 오는 국내 엔지니어들의 공통 관심 사항은 한결같이 캐나다 취업 방법에 대해 알려달라는 것. 그만큼 국내에서도 경기불황에 대한 우려와 구조조정에 대한 불안감, 특히 하이닉스반도체(현대전자)의 유동성 위기에 따른 이직 수요 등으로 반도체 분야에서 해외탈출을 꿈꾸는 엔지니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다.

‘기술자들이 존경받는 사회’

반도체 엔지니어들 ‘엑소더스 행렬’
반도체 엔지니어들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성씨는 “캐나다에서도 불황의 여파로 통신업체들이 일부 해고를 단행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기초 분야인 반도체의 경우 아직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미국 실리콘 밸리가 닷컴 붕괴론의 여파로 부진을 면치 못하는 반면 그나마 캐나다의 반도체 인력 수요가 수그러들지 않고 호황 시절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 실리콘밸리행을 선택한 일부 한국인 엔지니어들은 비싼 집값과 고물가를 견디지 못하고 캐나다로 이주해 오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고.

캐나다 사람들이 노던 실리콘 밸리(Northen Silicon Valley)라고 하는 수도 오타와의 IT단지는 세계적인 IT기업들의 R&D센터가 다수 모여 있는 곳. 이곳에는 지난해부터 한국인 엔지니어들의 진입이 급증하고 있다. 모스에이드라는 반도체 설계업체에 근무하는 편홍범씨는 캐나다행을 결정하기 전 LG반도체에서 11년을 근무하고 현대전자와의 합병 후 2년 가까이 근무한 뒤 3~4년 예정으로 캐나다 취업을 선택했다. 그는 캐나다에 처음 올 때만 해도 영구 이민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최근 생각을 바꿔 영주권을 신청했다. 10세와 7세인 아이들의 교육 문제와 캐나다에서 경험해 본 자유로운 근무 조건을 보고 마음을 바꾼 것.



LG반도체 출신인 편씨는 현대전자와의 합병 후 경험한 상이한 조직 문화도 해외 취업을 부추긴 이유 중 하나였다고 기억한다. 엔지니어들의 창의력을 존중하기보다는 수직적인 군대문화가 지배한 합병 현대전자의 분위기가 엔지니어들의 이직을 재촉하는 이유가 되었다는 것. 편씨가 일하는 회사에 근무하는 한국인 기술자 중 60%는 현대전자 출신이며 나머지 40%는 삼성, LG 출신 직원들이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해외 이민을 선택한 엔지니어들이 한국을 떠난 이유 중 빼놓지 않는 것이 바로 ‘기술자들에 대한 인식 부족’이다. 속칭 ‘공돌이’라는 비하적인 호칭부터가 ‘기술자들이 존경받는 사회’와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것.

그래서 반도체 엔지니어들의 엑소더스 행렬은 캐나다뿐만 아니라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국가, 그리고 최근에는 네덜란드 핀란드 등의 북유럽 국가로도 이어지고 있다. 인력 컨설팅업계의 한 관계자는 “반도체 엔지니어들이 그동안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으로 많이 나갔지만 최근 들어서는 중국 태국 등에 새로운 공장이 들어서면서 진출 국가들도 다변화하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중국이나 태국의 경우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 등에 비해 아직 주거`-`교육 등의 환경 미비로 인해 가족들이 살기에는 상대적으로 적합하지 않은 것이 사실. 따라서 이들 지역에는 미혼 엔지니어들을 포함해 상대적으로 젊은 층의 인력들이 몰린다는 것이다.

게다가 지난 99년 현대전자가 LG반도체를 인수한 뒤 LG 출신 직원들의 고용보장에 합의한 2년이란 기간이 오는 7월 만료하는 것도 또 하나의 변수이다. LG 출신 직원들 입장에서는 언제라도 다른 직장을 선택할 수 있는 안전판을 만들어 놓아야 할 판이다. 현재 하이닉스반도체측은 LG 출신이든 현대 출신이든 간에 구조조정 차원의 인력 감축은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정작 LG 출신 엔지니어들이 회사의 강제적 인력 감축 여부와 관계없이 독자 행보를 모색하고 있다는 소문은 공공연하게 퍼지고 있다. 반도체 분야 엔지니어들의 동향에 밝은 헤드헌팅업계의 한 관계자는 “고용 보장 기간이 끝나가면서 해외 취업 관련 문의를 해오는 하이닉스반도체 직원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고 말해 이런 분위기를 뒷받침했다. LG 출신의 한 하이닉스반도체 관계자는 “회사가 어렵기 때문에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지는 못하지만 대부분 이제 ‘살길’을 모색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현재 하이닉스의 반도체 분야 연구인력은 약 4000여 명 수준. 이중 40%가 LG반도체 출신이다.

하이닉스반도체의 한 관계자는 “회사가 어려움을 겪지만 반도체 엔지니어들의 경우 ‘내보내야 한다’는 고민이 아니라 ‘어떻게 사람을 끌어와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하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이미 ‘빠져나간’ 엔지니어들의 빈 자리가 크다는 말이다. 하이닉스의 인사담당 임원은 “지난해보다 올해 상반기 이직률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며 인력 유출 우려가 없다고 장담한다.

그러나 합병 2년이 다가오면서 자의로 직장을 옮기거나 해외 취업을 선택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머지 않아 ‘현대 잔류냐, 독자 행보냐’를 결정해야 할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는 점에서 이들의 행보가 최근 주춤한 반도체 인력 유출 현상을 부채질할 것인지 관심을 모은다.

특히 캐나다의 경우 벤처기업들이 우리처럼 거품이 심하지도 않고 알짜배기 사업만을 내실 있게 하기 때문에 경기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한국인 엔지니어들의 몸에 밴, 조직에 대한 충성심 등은 캐나다 기업인들이 전혀 경험하지 못한 것들이어서 한국인 엔지니어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는데 일조하고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쾌적한 환경에 좋은 교육환경까지를 감안하면 기술 이민자들에게는 최적지로 꼽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들은 기술자들의 해외 이민을 무조건 우려하거나 배척할 일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렇다고 경제적 기반과 사회적 인식이 뒷받침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들을 붙잡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들의 엑소더스 바람이 반도체 선진국 한국의 산업경쟁력을 갉아먹을 정도라면 정부 차원에서라도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들의 이민 열풍은 바로 정부와 업계를 향해 이런 메시지를 보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주간동아 2001.06.07 287호 (p40~41)

< 성기영 기자sky3203@dong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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