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 전도사’로 불리는 이재오 특임장관이 손에 든 ‘개헌노트’에는 그동안 개헌에 대해 공부한 내용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개헌 추진에 대한 이 장관의 강력한 의지가 엿보인다.
하지만 공론화에는 번번이 실패했다. 잠시 개헌 논의에 불이 붙는가 싶다가도 금세 사그라지곤 했다. 인사청문회와 국정감사, 예산안 심의 등 바삐 돌아가는 국회 일정 속에 김태호 국무총리 후보자의 낙마,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예산안을 둘러싼 여야 대치에 이은 야당 장외투쟁, 구제역 창궐 등 악재가 겹친 탓이 크다.
개헌 논의를 위한 동력도 부족했다. 민주당 등 야당은 물론 한나라당 내 친박(친박근혜)계까지 개헌에 반대하고 있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친이(친이명박)계 내부에서조차 찬반이 엇갈렸다. 결국 한나라당은 1월 25일 열기로 했던 개헌 논의를 위한 의원총회(이하 개헌 의총)를 음력설 연휴 이후인 2월 8~10일로 연기했다. 정치권에서는 개헌 논의가 사실상 물 건너간 것 아니냐는 게 중론이다.
2월 7일 대표적인 친이계 모임인 ‘함께 내일로’의 개헌 토론회에 이은 개헌 의총은 예상대로 친박계 의원들의 침묵 속에 반쪽짜리 행사로 끝나고 말았다. 친이계 의원들이 ‘같은 주장’만 되풀이하면서 의총 기간도 3일에서 2일로 줄었다. 이번 의총에서 의원들이 당내에 구성하기로 합의한 ‘개헌 논의를 위한 특별기구’도 친박계의 태도 변화 없이는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 미지수다.
과연 개헌이 가능하기는 한 걸까? 이 장관의 생각이 궁금했다. 당초 개헌 의총에 참석할 것으로 알려졌던 이 장관은 이틀간 모든 일정을 취소한 채 장관실에서 개헌 관련 자료를 검토하면서 트위터로 개헌 논의에 불을 지피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개헌 의총 두 번째 날인 9일 오전, 서울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집무실에서 이 장관을 직접 만났다. 이 장관의 손에는 개헌과 관련된 내용이 깨알같이 적힌 ‘개헌 노트’가 들려 있었다. 인터뷰 중간 중간 이 장관은 이 노트를 보며 질문에 답했다.
개헌 논의 불 지피기 위해 안간힘
▼ ‘개헌 전도사’로 불린다. 그만큼 개헌에 적극적이라는 이야기인데, 동의하나.
“내가 좀 열심히 한다(웃음). 난 원래 2007년 1월 9일 노무현 대통령이 원포인트 개헌을 하자고 했을 때 반대했던 사람이다. 개헌 내용을 반대한 게 아니라 시점이 문제였다. 한나라당 대선 경선이 그해 7월이었다. 6개월 앞두고 개헌을 하자고 하면 대선판을 뒤집자는 건데 그걸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2012년 대선까지는 2년이나 남았기 때문에 충분히 논의할 수 있다. 1년 동안 개헌 마무리 짓고, 남은 1년간 대선을 치르면 된다. 누가 정권을 잡든 우리는 임기를 마치고 정권을 물려주면 된다. 다만 다음 정권이 우리나라를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도록 정치적 틀을 만들어주려면 개헌이 필요하다. 그것이 현 정권의 의무이고, 지금 대통령의 시대적 소명이자 정치적 과제다.”
▼ 이명박 대통령에게서 뭔가 역할이나 주문을 받은 게 있나.
“한나라당은 2007년 4월 18대 국회 주도로 개헌을 추진한다는 당론을 채택했다. 이 대통령이 2009년 8·15 경축사에서 국회에서 개헌 문제를 논의해달라고 이야기를 꺼낸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이후 지금까지 8차례나 국회 차원의 개헌 논의를 해달라고 이야기했다.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서 움직이는 특임장관이 그 이야기를 그냥 넘길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국회에서 개헌 논의를 하도록 노력해야지….”
▼ 18대 국회에서 개헌을 추진하기로 당론을 정했다면 18대 국회 초기부터 개헌 논의를 시작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정권을 잡자마자 촛불사태와 쇠고기 파동, 국제 금융위기, 천안함 폭침사건 등이 줄줄이 터졌고 세종시와 4대강 논란도 끊이지 않았다. 그 와중에 어떻게 개헌을 논의하자고 할 수 있었겠는가. 다행히 올해는 큰 선거가 없으니까 논의해보자는 것이다.”
▼ 18대 총선을 통해 상당수 의원이 바뀌었다. 당내 일각에서는 17대 의원들이 한 약속을 18대 의원들이 지킬 필요가 있느냐는 주장도 있다.
“그런 주장을 할 수는 있지만, 당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당이 당론으로 정한 것은 다수가 달라졌다고 해도 지켜야 한다. 그걸 부인하면 가뜩이나 심각한 정치 불신만 가중시킬 것이다.”
▼ 야당은 물론 친박계가 반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말 개헌이 가능한가.
“내가 지금 야당이라도 반대한다. 집권 여당이 예산안을 강행 처리했으니, 야당으로서는 당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욱이 두 달 동안 장외투쟁까지 하면서 싸웠는데, 여당이 별다른 말도 없이 덮어놓고 개헌하자고 하면 어떤 야당이 선뜻 응하겠는가. 친박 쪽도 마찬가지다. 개헌의 진정성을 믿지 못하는 판인데, 개헌 논의에 적극 참여하기 어렵지 않겠나. 개헌을 해도 자신들에게 불리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서려면 더 많은 설득과 이해가 필요하다. 시간을 두고 토론을 자꾸 하다 보면 의견이 좁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서로에 대한 오해가 풀리고 개헌에 대한 진정성도 받아들여질 것이다. 친박계도 개헌에는 반대하지 않고, 야당도 기본적으로 개헌하자는 쪽이었으니까.”
▼ 친박계는 현재 이 장관 중심의 개헌 논의에 대해 친이계의 결집을 유도하고, 동시에 박근혜 전 대표를 견제하기 위한 정략적 판단에 따른 것이라는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정치인이라면 어떤 사안이든 ‘정략적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은데.
“내가 친박계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일고의 가치도 없는 오해다. 왜 오해냐. 대통령이 국회에서 개헌을 논의해야 한다고 하는데, 국회와 당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당연히 특임장관이 나서서 개헌 논의 필요성을 제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특임장관이 손 놓고 가만히 있으면 그건 직무를 방기하는 거다. 그게 계파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리고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당내 경선에 나설 사람이 박 전 대표 혼자인가.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다. 굳이 친이계가 박 전 대표를 겨냥해서 개헌판을 만들 이유가 없는 것이다. 임기 2년 끝나면 그만둘 정권이 다음에 어떤 정권이 들어서든 좋은 국가의 틀을 만들면 되는 것이지, 그 판을 흔들기 위해 개헌이라는 큰일을 꾸밀 이유가 없다. (친박계의 그런 주장은) 그야말로 정치적 단견이자, 일종의 정치적 음해라고 봐야 한다.”
▼ 이 대통령은 ‘본인이 나서면 (개헌이) 될 것도 안 된다’고 하면서도 개헌의 필요성을 여러 차례 직접 언급했다. 결국 이 장관을 매개로 이 대통령이 개헌을 추진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는데.
“그것이야말로 개헌 반대론자들의 음모이자, 정치 불신에서 비롯된 근거 없는 주장이다. 국회에서 개헌 논의를 하고 당이 당론을 따랐으면 내가 굳이 직접 나설 이유가 없다. 아무런 논의가 없으니까 내가 나선 것이다. 결정된 당론대로 하자는데, 이제 와서 왜 당신이 나서냐고 하는 게 말이 되는가.”
▼ 그렇다면 당 대표와 지도부가 왜 그동안 개헌 논의를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나.
“…그거야 본인들이 가장 잘 알지 않겠는가.”
▼ 만약 친박계의 반발로 여당 단일안 도출에 실패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때 가봐야 알겠지…, 우리는 시간을 갖고 계속 설득하고. 개헌이 친박과 갈등을 일으키거나 얼굴 붉힐 일은 아니다. 반대한다면 반대하는 대로, 찬성한다면 찬성하는 대로 의견을 나누자는 것이지 이것이 갈등의 씨앗이 되거나 계파 분열의 고리가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자제해야 한다.”
▼ 그렇다고 언제까지 설득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이 대통령도 언급하셨지만, 올해 말까지는 노력해볼 생각이다. 2007년에 정한 당론에는 대통령 임기 말까지 노력해야 한다고 돼 있는데, 대선이 치러지는 내년까지 개헌 문제를 끌고 가는 것은 무리다.”
▼ 얼마 전 박 전 대표의 개헌안인 4년 중임제를 수용할 수 있다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친이계가 4년 중임제 개헌안을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인가.
“지금은 그런 것을 가정할 수 없다. 개헌 논의를 친이, 친박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야당과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야당과 합의 없이는 개헌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개헌기구를 만들어서 다 열어놓고 논의하자는 것이 지금 우리(친이계)의 요구다.”
▼ 제1 야당인 민주당의 당론도 4년 중임제다.
“친박계의 4년 중임제와는 다르다. 민주당은 분권형 4년 중임제다. 또 연임에 한해서만 중임을 허용하는 1차 중임제다. 이 제도를 친박계와 야3당이 모두 동의한다면, 그리고 한나라당에서 일부만 반대한다면, 그 반대하는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는 게 맞다.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정상적이라면 그게 가장 좋은 방안이 아니겠는가.”
박근혜 전 대표 관련해선 말 아껴
이 장관은 개헌 문제에 대해서는 의연하면서도 거침없이 답했다. 하지만 박 전 대표에 대한 질문에는 극도로 말을 아꼈다. 사실 이 장관이나 친이계로서는 박 전 대표와 관계를 정상화하지 못한다면 개헌 논의도 무의미하다. 박 전 대표에 대한 친박계의 충성도를 감안하면 박 전 대표가 반대하는 개헌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장관으로서는 박 전 대표를 자극할 수 있는 발언은 최대한 억제하거나 신중할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이 장관에게 박 전 대표는 ‘딜레마’다.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큰 꿈’을 꾼다. 이 장관이 큰 꿈을 이루려면 박 전 대표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다. 그러면서도 개헌을 위해서는 무작정 넘을 수도 없다. 이 장관이 대권 도전 의사를 묻는 질문에 늘 ‘이명박 정부의 성공을 위해 남은 인생을 다 바치겠다’고 에둘러 표현하는 것도 이런 상황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1월 24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이제는 개헌이다’는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한 사단법인 ‘푸른한국’은 이 장관의 외곽조직으로 알려져 있다. 700석 정도 준비된 이날 토론회장에는 전국 각지에서 2000여 명이 몰려 이 장관의 영향력을 실감케 했다. 이날 행사를 두고 일각에서는 이 장관이 대권 도전 의지를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냐고 해석한다. 이에 대한 질문에 이 장관은 또다시 에둘러 답했지만 속내를 다 숨기지는 않았다.
“한나라당 정치지도자 중 대권에 꿈이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은 자기 개인의 꿈을 가꿀 것이 아니고 이 정부가 성공하는 데 바쳐야 한다. 실패한 정권에 또 기회를 주겠는가. 다음 정권을 생각한다면 지금 정권을 성공시키는 게 중요하다. 그러니까 내가 개헌에 몇 개월째 올인하다시피 매달리는 것이다. 왜? 현 정권 아래서 제대로 된 헌법을 만드는 것 자체가 정치적 성과이고, 업적이다. 대통령을 위한 정치가 곧 내 정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