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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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힐 듯한 꿈은 멀고 좌절과 패배는 닥치고 ‘시나리오’는 서럽다

늦깎이 신수원 감독의 영화판 분투기 “최종 단계서 쓰레기통 들어가기 일쑤”

  • 신수원 영화감독 passerby3@naer.com

    입력2011-02-14 10: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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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주세요.’ 촉망받던 젊은 작가 최고은씨가 홀로 죽음을 맞았다. 나이는 서른둘, 사망 원인은 지병과 굶주림. 월세는 몇 달째 밀린 상태였고, 가스도 끊겨 있었다. 이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이 신수원 감독의 영화 ‘레인보우’를 떠올렸다.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는, 주인공 지완이 영화계에서 부딪치며 깨지는 과정을 리얼하게 보여준다. 신 감독이 영화계에서 보고, 겪고, 들은 경험을 보내왔다.

    잡힐 듯한 꿈은 멀고 좌절과 패배는 닥치고 ‘시나리오’는 서럽다

    영화 ‘레인보우’의 주인공인 지완의 책상. (작은사진) 지병과 생활고로 숨진 고(故) 최고은 씨.

    ‘뒤늦게 영화판에 뛰어들었다. ‘레인보우’는 내가 영화판에 들어온 지 9년 만에 만든 첫 장편영화다. 늦은 나이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 전문사 과정에 입학해 시나리오를 전공했다. 그리고 16mm 필름으로 첫 단편을 찍었다. 내가 쓴 시나리오가 스크린에 영사되는 순간, 말할 수 없는 매력에 빠졌다. 결국 사표를 썼다. 펜을 쥔 손이 떨렸다. 안정된 생계 수단의 종식을 고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선택한 길이다. 꼬박꼬박 타먹은 월급보다는 풍족하지 못하더라도 원하는 길을 가겠다는 의지가 있었다(신수원 감독은 10년 넘게 중학교 교사로 일했다).

    영화 엎어지면 너도나도 피해자

    그 후 몇 년간 작가로 활동했다. 자금 사정이 괜찮은 제작사에 들어가 제대로 계약을 하면 돈을 받는다. 혹은 유능한 감독을 만나 함께 작업을 하게 되면 영화가 완성될 확률이 높다. 그러나 시나리오는 무형의 자산이다. 영화가 제작되면 가치를 발산하지만, 상업영화로서 장점이 없거나 배우를 캐스팅하지 못했을 때, 그래서 투자를 받지 못했을 때는 휴지통으로 가버린다.

    시나리오는 프리프로덕션(사전제작)의 기초가 된다. 많은 제작사와 투자사가 1년에서 5년까지 열정과 돈을 시나리오 개발에 쏟아붓는다. 그 돈으로 제작사는 일부를 회사 운영비로 쓰고, 일부는 작가에게 고료를 지불하거나 감독 계약을 한다. 이렇게 해서 나온 1차 완성대본을 보고 투자사는 판단을 한다. 과연 이 시나리오에 수억, 수십억 원을 투자할 수 있는가? 아니라고 판단하면 영화가 ‘엎어진다’. 물론 투자사에서 쓴 기획 개발비도 손실처리된다.



    영화가 ‘엎어지면’ 그 프로젝트에 참여한 집단에는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같은 심리적 공황이 온다. 작가뿐 아니라 감독, 프로듀서, 제작사, 손실금을 떠안은 투자집단까지 피해갈 수 없다. 결국 늘어나는 것은 술과 빚이요 줄어드는 것은 통장의 잔고로, 도산을 맞게 된다.

    이게 현재 충무로의 현실이다. 영화는 공장에서 찍어내는 상품처럼 재료를 투자한 만큼 결과를 볼 수 없는 생산물이다. 재료와 노동을 쏟아부어도 생산라인의 최종 단계에서 사라질 위험이 있다. 결국 운 좋게 영화 제작에 들어가면 각자의 영광이 되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좌절과 패배감만 남는다. 이것은 비단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영화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일이다.

    가난한 제작사에 들어가면 리스크는 더 커진다. 나는 약 1년간 수습작가로 일하면서 세 작품 정도는 초고나 각색 작업까지 진행했다. 그러나 제작사 사정이 좋지 않았다. 첫 번째 작품이 수익을 내지 못해서 여유자금이 없었다. 결국 진행되는 일 없이 점점 지쳐갔다. 누군가는 나에게 조언을 했다. 운 좋은 경우를 제외하곤 작가 타이틀을 따는 데 보통 7년이 걸린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참담했다. 그렇지만 그게 현실이다.

    가난한 제작사는 작가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제작사나 프로듀서가 가난해도 믿을 만하고 일을 잘하면 의리로 뭉치기도 하지만, 돈 없이 시간 앞에서 버틸 장사는 없다. 과거에 투자사들은 시나리오만 보고 기획이 좋으면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대의 기획 개발금을 줬지만 요즘 투자사들은 사전 기획 개발비를 넉넉하게 주지 않는다. 자연히 제작사나 프로듀서들은 작가들에게 처음부터 작가료를 주지 못한다. 나중에 투자를 받으면 돈을 주겠다고 약속할 뿐이다. 하지만 투자를 받지 못하면 아무것도 보장해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특히 처음 기획부터 참여하는 시나리오 작가는 이런 과정을 온몸으로 견뎌야 한다. 소설은 작가가 원고를 완성하는 순간 그대로 책이 돼서 나온다. 하지만 시나리오는 영화의 재료일 뿐이다. 작가의 손에서 떠나 많은 손길을 타게 된다. 때문에 이런 과정을 견디지 못하는 작가는 방송 쪽으로 가거나 소설가가 된다. 결국 이 과정을 감수하면서 작가가 되겠다는 사람들만 남는 게 이 바닥의 생리다.

    나는 내가 직접 기획하고 쓴 시나리오로 연출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오랫동안 시나리오 작업에 매진했다. 하나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두 편 모두 만들지 못했다. 특히 두 번째 영화사는 비교적 좋은 조건에 계약을 했고 꽤나 합리적인 곳이었다. 하지만 그곳 역시 2006년 말부터 시작된 충무로의 공황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기획 개발비를 감당할 수 없었던 제작사는 프로젝트 중 몇 개를 정리해야 하는 상황을 맞았다. 그 과정에서 많은 프로듀서와 감독, 작가가 자신의 둥지를 떠나야만 했다.

    시나리오는 영화의 출발

    보통 계약에 묶여 자신의 프로젝트를 두고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다행히 제작사에서 시나리오를 갖고 나가는 것을 허용했다. 잔금 대신 시나리오를 선택했다. 물론 나와서 몇 군데 제작사를 돌아다녔으나 모두 사정이 좋지 않았다. 다들 문을 닫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신인 감독을 받아줄 여력이 없었다.

    나는 더는 제작사에 가지 않았다. 혼자 시나리오를 썼다. 돌아다녀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인생에서 가장 바닥이었던 1년, 거의 폐인처럼 지냈다. 사람들을 만나면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은 늘 울고 있었다. 오랜 고민 끝에 내 힘으로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고, 스태프와 지인들의 도움으로 ‘레인보우’라는 영화를 만들게 됐다. 신인감독이 충무로에서 영화를 준비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충무로는 꿈을 만들고, 꿈을 팔고 사는 공장이다. 서로의 꿈과 이상을 갖고 출발한 사람들이 모인 독특한 공간이자, 무형의 자산을 거래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영화에 종사하는 이들은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무형의 자산을 거래하는 곳에서도 최소한 지켜야 할 룰이 있다. 그러나 가끔 ‘관행’이라는 이름을 앞세워 기본적인 상식과 신의를 지키지 않는 사람을 만난다. 영화는 시나리오에서부터 출발한다. 좋은 시나리오 없이 좋은 영화는 나올 수 없다.

    나는 언제나 무거운 가방을 메고 다닌다. 그 안에는 책과 노트북, 작업 중인 시나리오가 들어 있다. 약 5kg의 가방이 나에겐 걸어 다니는 이동도서관인 셈이다. 개인 작업실이 없기 때문에 커피숍에서 노트북을 펼치고 작업을 한다. 그래서 이 가방은 이젠 내 몸의 일부가 돼버렸다. 내 체중에 추가된 5kg은 내 영혼과 꿈의 무게다. 나를 지탱해주는 꿈이자, 나를 일으켜주는 지렛대다.

    한 작가가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인터넷에 고인의 죽음이 보도된 뒤 합리적인 제작자나 영화판 전체를 매도하는 글이 올라온다. 타인의 죽음을 이용해서 자신의 주장만 펼치는 글을 보면서 마음이 좋지 않다. 글을 마치며 그녀의 가방 무게를 생각해본다. 짐스럽지만 꿈이 담긴 그 가방을 놓고 편안히 떠났으면 좋겠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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