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공단 납치억류 국민석방운동 시민연대는 7월7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 후문에서 억류 100일째를 맞은 현대아산 근로자 A씨의 석방을 촉구했다.
북한은 올 1월20일(미국 시간)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등장하면서 대외 공세의 중심을 대남에서 대미로 옮겼다. 북한은 한미 연례 합동군사연습에 반대하며 3월9~20일 남북 육로 통행을 차단하고, 4월5일 장거리 로켓을 쐈다. 그리고 5월25일 2차 핵실험을 하면서 미국을 강하게 몰아붙였다. 그 대신 남한에는 4월16일 개성공단 회담을 제의한 뒤 경제 이슈를 들고 나와 접촉을 가지면서 위기관리 모드를 취하게 된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8월4~5일 평양을 방문해 미국인 여기자 2명을 인도받아 나온 ‘사건’은 지금까지 진행된 북미관계와 남북관계의 곡선에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 정부는 인도적 문제인 여기자 석방과 북한의 비핵화 문제는 별개라고 강조하지만, 이전의 북미관계와 이후의 그것은 다를 수밖에 없다.
남북관계, 북미관계와 동조화냐 차별화냐
북한대학원대 양무진 교수는 “북한이 미국인 여기자들을 석방한 이후 북미관계는 기존의 갈등 일변도에서 갈등과 대화가 공존하는 위기관리 국면으로 진입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문제는 남북관계다. 북미관계의 진전과 함께 개선될 것인가, 아니면 통미봉남의 전략에 따라 경색국면을 지속하거나 심지어 더 악화될 것인가. 동조화냐? 차별화냐? 이것이 문제다. 칼자루는 북한이 쥐고 있다.
개성공단 내 현대아산 근로자 A씨(이 사람의 성은 널리 알려졌지만 필자는 여전히 A씨라는 표기를 고집한다. 아무런 객관적 증거도 없이 북한 땅에서 범죄인으로 몰린 피해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므로)와 ‘800연안호’ 선원 4명이 억류돼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북한이 남북관계를 진전시키고 싶다면 억류자를 석방할 테고, 반대의 경우 잠자코 남한 정부와 국민의 속을 태우면 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남한, 특히 정부는 매우 수동적인 입장에 있다. 지난해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남북관계의 경색 과정에서 과거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깔아놓은 남북 당국 간 채널은 완전히 단절됐다. 4월18일 시작된 개성공단에서의 제한적 대화도 7월2일을 마지막으로 끊겼다. 통일부 천해성 대변인은 8월6일 정례 브리핑에서 “북한 측이 일방적으로 단절, 차단해 현재 남북 당국 간 별도의 채널이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전날 한나라당 정몽준 의원이 A씨 석방 등을 위한 대북 특사 파견을 제의했지만 천 대변인은 “억류자 석방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겠지만 특사 파견 등 구체적인 방법은 현재 검토 중인 것이 없다”고 답변했다. 이 때문에 정부 당국자들은 8월5일 미국인 여기자 석방 이후 국내외 여론의 관심이 한국인 억류자 석방 문제로 쏠리자 부담스러운 기색이 역력하다.
미국은 자국민 보호를 위해 북한과 대화하고 전직 대통령이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는데 한국 정부는 무엇을 하느냐는 비판 여론이 비등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비교효과’다. 별다른 수단이 없는 상태에서 정부는 클린턴 전 대통령이나 현대아산 등 북한과 대화할 수 있는 주체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이번 방북 과정에서 북측에 한국인 억류자의 석방을 촉구한 것으로 확인됐다. 8월6일 외교통상부 문태영 대변인은 “클린턴 전 대통령이 인도적 견지에서 우리 근로자와 연안호 선원들이 석방돼야 한다는 점을 북측에 전달한 것으로 안다”며 “조속한 진전이 있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 국무부 고위 당국자가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 이후 이 같은 내용을 알려왔다고 소개했다.
다른 당국자 역시 “정부도 단시일 내에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북한도 A씨의 장기 억류에 부담을 느껴 조만간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현대아산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현대아산 현정은 회장은 클린턴 전 대통령이 방북한 8월4일에 금강산을 방문, 북한 조선노동당 통일전선부 산하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이종혁 부위원장을 만나 A씨의 석방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당국자들에 따르면 현 회장은 이날 이 부위원장에게 A씨의 석방을 요청했으며, 이 부위원장은 “그 문제를 논의해 보자. 올라오라”고 대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상황에서 전문가들은 8월15일 광복절까지가 남북관계의 향배를 결정짓는 ‘중대한 고비’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북한이 한국인 억류자를 조기 석방하는지, 남한이 이에 화답해 금강산 관광 재개 등 대북 지원을 재개하는지가 관건이다.
북한 주변에서는 몇 가지 긍정적 신호들이 나오고 있다. 북한 매체들이 이명박 대통령을 실명으로 비방한 보도가 7월 들어 전달의 60% 수준으로 급감했다. 정부에 따르면, 라디오 방송인 조선중앙방송과 평양방송 등을 기준으로 한 북한 매체들의 이 대통령 실명 비방 보도는 6월 454건으로 월별 최고치였다가 7월 275건으로 줄었다.
정부 당국자는 “비방 횟수가 줄었을 뿐 아니라 비방하는 기관의 급도 낮아졌으며 내용도 순화됐다”고 말했다. 한 민간 대북지원 단체 대표는 “중국에서 만난 북한 당국자가 ‘남측이 뭐 이상한 짓만 꾸미지 않는다면 (A씨 석방 등을 포함해) 남북관계가 풀릴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조기 석방 땐 깜짝 놀랄 제안?
최선의 시나리오는 북한이 인도적 차원에서 A씨와 ‘800연안호’ 선원 등 한국인 억류자들을 조기 석방하고 남한 정부가 8·15 경축사 등을 통해 대북 지원책을 내놓으며 화답하는 것이다. 정부는 그동안 북한이 남측에 대한 공세를 멈출 경우 적극적인 대화와 지원에 나설 것이라고 밝혀왔다. 북한이 인도적 문제를 먼저 해결할 경우 정부가 8·15 경축사에서 ‘깜짝 놀랄 만한’ 대북 제의를 할 수도 있다.
기은경제연구소 조봉현 연구위원은 “금강산 관광의 재개와 대규모 개발 원조, 녹색성장 관련 남북 공동 프로젝트 등을 제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경우 북한의 나쁜 행동에 보상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보수 여론의 비난이 제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일부 당국자들은 신중한 반응이다. 한 당국자는 “억류자가 석방되더라도 금강산 관광 재개 이외에 쌀과 비료 지원 등을 바로 재개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최악의 상황은 북한이 한국인 억류자 문제 해결을 늦춰 남한 내부의 여론 분열을 꾀하는 경우다. 한 전문가는 “남한 내 일부 여론이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난하게 만들어 남남갈등을 유발하는 전략을 구사할 가능성이 있다”고 걱정했다. 이런 경우에 대비해 정부는 적극적인 대국민 설명 방안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