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07

..

무섭도록 슬픈 사랑이야기 스릴러야? 멜로야?

  • 하재봉 영화평론가

    입력2007-10-19 09:32: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무섭도록 슬픈 사랑이야기 스릴러야? 멜로야?
    제12회 부산국제영화제 최고의 화제작은 이명세 감독의 ‘M’이었다. 이 감독의 기자회견은 100명이 넘는 기자들이 몰려들어 20분가량 지연됐다. 한국 측 기자보다 일본 대만 홍콩 등지의 기자가 더 많았다. 이 감독의 ‘형사’가 동남아시아에 배급되면서 강동원의 인기가 급상승하고 있는 것이다.

    이명세 감독의 신작 ‘M’은, ‘첫사랑’으로 데뷔한 뒤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한 스타일리스트의 중간 결산이다. 사실 ‘M’의 스토리는 단순하다. 그렇게 단순한 이야기를 왜 어렵게 표현하느냐는 질문이 당연히 쏟아질 수 있다. 그러나 이 감독에게 중요한 것은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는 것이다. ‘M’에는 집념과 끈기로 자신의 미학적 세계를 극단까지 밀어붙인 장인의 고독이 배어 있다.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성공하고, ‘양들의 침묵’을 만든 조너선 드미 감독이 이 영화를 보고 박중훈을 ‘찰리의 진실’에 캐스팅하면서 이 감독의 국제적 지명도가 상승되자 그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5년 넘게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귀국 후 만든 ‘형사’는 할리우드 제작자들을 의식해 동양적 스타일리스트로서 자신의 감각을 보여주려는 목적이 지나치게 강했다.

    몇 달 전 조성우 음악감독을 인터뷰하기 위해 그의 스튜디오를 찾았을 때, 그곳에 ‘M’ 음악작업을 위해 이명세 감독이 와 있었다. 그리고 이 감독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다시 만났다. ‘M’의 제작사인 M·FC가 주최하는 파티에서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M’의 영화상영이 끝난 뒤 이 감독과 ‘M’의 음악을 맡은 제작자 조성우, 그리고 여주인공 이연희가 무대로 나와 관객과 대화를 나눴다.

    잘나가는 소설가 첫사랑과의 우연한 만남



    “비주얼이 지나치게 강하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점이 거부감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야수파의 마티스 그림을 보면 정말 야수 같은 감각이 살아 있다. 인상파의 세잔이나 고흐의 그림도 인상적인 풍경이 드러난다. 내 영화는 비주얼 효과를 추구한다. 그것은 영화의 한 표현방법이다. 결국 이야기를 중시하는가 표현을 중시하는가, 취향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명세 감독의 이 말은 ‘M’의 스타일에 대한 설명이자 전작 ‘형사’의 비판에 대한 답변이기도 했다.

    “한민우와 미미의 첫사랑 감정이 살아나면서도 긴장감이 지속될 수 있었던 데는 상당 부분 음악에 빚지고 있다. 조성우가 아니었다면 이 영화는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소설가 한민우는 거리에서 누군가 자신을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골목길에 있는 루팡이라는 바에 들어간다. 그는 그곳에서 첫사랑 미미(이연희 분)를 만난다. 그러고 보면 이명세 감독은 유난히 첫사랑에 집착한다. 데뷔작도 ‘첫사랑’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M’은, 이 감독이 ‘형사’에서 비판받았던 장식성의 과잉을 딛고 초심을 찾기 위해 다시 첫사랑으로 돌아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자신이 이룩한 미적 세계에 순수함을 접목하고 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M’은 스릴러 구조를 갖고 있지만 본격적인 스릴러 장르는 아니다. 이 감독이 하고 싶은 것은 가슴 떨리는 첫사랑의 순수함이다. 이미 첫사랑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었던 그는, 이번에는 소재의 위대함이 아니라 그 드러냄의 위대함에 몰입한다.

    무섭도록 슬픈 사랑이야기 스릴러야? 멜로야?

    ‘M’의 주연 강동원과 함께한 이명세 감독(왼쪽).

    베스트셀러 작가인 한민우(강동원 분)는 재력 있는 약혼녀(공효진 분)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 그는 알 수 없는 슬럼프에 빠진다. 출판사와 계약한 소설도 잘 써지지 않는다. 출판사에서는 그가 소설을 써주기만 하면 얼마든지 기다리겠다고 한다. 이미 그는 선인세로 많은 돈까지 받았다. 영화 속에서 일식집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출판사 편집장과 한민우가 일식집에서 만나는 장면은, 똑같은 방에서 똑같은 대사로 상황만 바꿔가면서 여러 번 반복된다. 나중에는 역할까지 바뀌어서 처음에 편집장이 했던 대사를 한민우가 똑같이 한다.

    “이 영화의 중심에 일식집 장면이 자리잡고 있다. 어떻게 보면 데자뷔(기시감)로 볼 수도 있는 장면이다.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 보일 수도 있는 게 사물이고 사건이며, 우리의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M’에서 반복되는 일식집 장면은 무의미한 현실, 권태에 빠진 소설가의 일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가 그 함정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은 최초의 순수함을 발견하는 것뿐이다. 첫사랑 미미에 대한 추억은 그렇게 시작된다.

    그러므로 그가 어두운 골목길을 지나다 루팡이라는 바에 들어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 사람이 겨우 빠져나갈 수 있는 비좁은 골목길, 흑과 백이 강렬하게 대비되고 안개가 자욱이 깔려 이곳과 저곳의 경계가 무너진 도시의 뒷골목을 한민우는 걷는다. 그것은 어쩌면 과거로 통하는 길이고 무의식의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는 문이다. 루팡바의 바텐더(전무송 분) 뒤에 배치된 조명은 중앙의 블루를 중심으로 양쪽에 화이트가 빛나고 있다. 그곳에서 한민우는 미미를 만난다.

    “창조자로서 한 사람의 감독이 똑같은 소재를 반복한다는 것은 그에게 뭔가 정신적 내상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왜 첫사랑 이야기를 반복하는가?”

    내가 이렇게 묻자, 인터뷰 당시 같이 있던 다른 사람들이 “우리는 다 알고 있다”며 맞장구를 쳤다. 정말 이명세 감독의 얼굴이 빨개졌다. 나는 잘 모르는, 그러나 그의 지인들은 다 아는 그의 첫사랑에 대한 상처가 있는 게 분명하다. 비가 내렸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마지막 탄광촌 장면에서 그는, 빗줄기가 보일 정도로 엄청난 분량의 빛을 제작진에게 요구했다. 영화의 명장면은 감독의 집념과 확신에서 나온다. 그는 철저히 준비하고 제작에 들어가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감독의 영화는 찍기 전 만든 콘티북과 최종 편집을 마친 영화가 거의 다르지 않다. 그는 충무로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다양한 장르 혼재 … 신인 이연희 연기 돋보여

    “‘M’은 첫사랑이라는 하나의 정서, 하나의 이야기로 지속된다. 여러 가지 에피소드로 나뉜 ‘형사’와는 달리 통일성이 중요하다. 마음으로 보는 영화다.”

    지나친 기교주의라고 비난할 수도 있다. 그러나 ‘M’에는 순수한 열정이 숨어 있다.

    “처음 등장했을 때 미미의 어설퍼 보이는 모습은 그 자체가 하나의 연기다. 그것을 연기가 미숙한 것이라 생각하면 안 된다. 이연희는 매우 뛰어난 정서를 갖고 있는 배우다. 그리고 한민우 역의 강동원은 착한 배우다. 나는 한민우의 내적 광기를 강동원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M’이 거둔 수확 중 하나는 이연희의 발견이다. 미미는 영화를 미로 속으로 끌고 가는 주역이면서, 미로 밖으로 빠져나오게 하는 힘의 근원이다. “처음 역할을 맡고 나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감독님께 여쭤보면 미미에게 어울리는 사진이나 사물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감독님이 추천하는 프랑스 영화도 다 보았다. 그런데 감독님은 매우 추상적으로 설명하신다. 적응하는 데 힘들었다.”

    이명세 감독 팬들과의 뒤풀이 자리에서 이연희는 이렇게 말했다. 이 감독은 “다양한 장르가 혼재된 것이 ‘M’이지만, 그를 떠나서 ‘최고의 상’을 차리기 위해 영화라는 주방 안에서 정성껏 준비했다”고 말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진수성찬을 제대로 즐기는 것이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