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여성 화폐인물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스웨덴 성악가 제니 린드, 폴란드 과학자 퀴리 부인, 아일랜드 자선수녀회 설립자 캐서린 매콜리, 인도네시아 독립운동가 튜트 낙 디엔, 호주 사업가 메리 라이비. (맨 위부터 시계방향)
하지만 이 지폐는 발행 25일 뒤인 6월10일 제3차 화폐개혁으로 유통이 정지돼 국내 지폐 중 ‘최단명 지폐’가 됐고, 지금은 희소가치가 더해져 수집가들 사이에서 150만~200만원에 거래될 정도로 인기다. 이 지폐와 함께 여성 화폐인물도 45년간 잊혀 있었다.
그런데 요즘 다시 여성 화폐인물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2009년에 5만원, 10만원 등 고액권이 발행될 예정인데, 한국은행이 화폐인물 가운데 여성을 한 명 선정할 것으로 알려지면서 과연 누가 적합한 인물이냐를 두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것.
한국은행은 고액권 인물 후보 10명(김구 김정희 신사임당 안창호 유관순 장보고 장영실 정약용 주시경 한용운)을 4~5명으로 압축했는데, 이 가운데 신사임당이 여성 화폐인물로 유력한 것으로 알려지자 여성계가 반발하고 나섰다.
“‘현모양처’의 상징인 신사임당은 구시대 인물이다. 어진 어머니, 착한 아내란 뜻의 현모양처 이데올로기는 여성이 개인, 가족, 사회생활 면에서 조화를 이뤄야 하는 요즘 시대에 걸맞지 않다. 더욱이 현모양처 이데올로기는 남성이 여성을 부양한다는 점을 전제로 하는 것이어서 과부하가 걸린 남성에게도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다. 따라서 자아를 실현한 여성이 새 화폐인물로 선정돼야 한다.”(문화미래 이프 권희정 사무국장)
반면 “신사임당이든 누구든 여성이 등장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진보다”(다음 카페 ‘화폐수집-여행과 자유’ID 은하철도)라거나, “신사임당만한 대안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한국은행은 올해 안에 인물 선정과 도안까지 마무리할 계획이었지만, 뜨거운 찬반 논란에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신사임당 유력 소식에 여성계도 찬반 논란
이런 논란을 지켜보면서 외국 사례에서 답을 찾는 것이 현명하다는 사람이 많다. 인터넷 사이트 ‘화폐나라’(www.coinnara.org) 운영자 신동현 씨는 “외국의 경우 참으로 다양한 인물들이 화폐인물로 선정됐다. 특히 화가, 시인, 소설가, 소프라노, 작곡가, 생태학자, 물리학자, 배우, 교육자, 사업가, 참정권운동가 등 특정 분야에서 뚜렷한 성과를 거둔 인물이 대부분이다”라고 말했다. 영연방 53개국 가운데 20개국 이상의 화폐에서 남녀를 통틀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영국 엘리자베스2세 여왕은 논외로 친다 해도, 흥미로운 여성 인물은 부지기수다.
과학자 퀴리 부인은 유로화 이전 프랑스 500프랑 화폐에도 등장했다.
호주의 20달러에 등장하는 메리 라이비(1777~1855)의 이력도 독특하다. 영국 태생인 라이비는 13세에 말을 훔친 죄로 호주로 이송됐지만, 2년 뒤 간호장교로 임명되는 행운을 안았다. 결혼 뒤에는 남편과 함께 석탄과 밀 무역에 뛰어들었으며, 범선을 사들여 인도를 탐험하기도 했다. 34세에 남편이 병으로 죽자 그는 일곱 자녀를 키우면서도 창의력과 성실성을 바탕으로 도자기 회사를 차려 사업가로 성공했고, 무료로 학교를 운영하면서 존경받는 인물이 됐다. 호주 최초의 성공한 여성 사업가이자 자선사업가였던 그가 화폐인물에 선정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진취적인 의미 부여 … 인물 남녀평등 지향
2004년 11월1일 일본 화폐에도 처음으로 여성이 등장했다. 바로 메이지 시대 천재 소설가 히구치 이치요(1872~1896). 5000엔권 앞면에 등장한 이치요는 9세에 이미 일기에 ‘평범한 삶을 살고 싶지 않다’고 쓰는 조숙함을 보였으며, 삯바느질과 세탁일 등을 하면서 생계수단으로 소설 집필에 매진했다. 남성우월주의가 팽배하던 시대에 그는 문예지 ‘문예구락부’에 ‘흐린 강’ ‘십삼야’ 등 빼어난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의 찬사를 받았다. 비록 24세에 요절했지만 그의 문학은 한 세기를 훌쩍 넘어서도 살아남아, 국내에서도 ‘해질 무렵 무라사키’ 등이 번역됐다.
이처럼 많은 나라에서 자아를 실현하며 선구적 삶을 살았던 여성들이 화폐인물로 등장했지만, 신사임당 같은 현모양처 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이슬란드 5000크로네에 등장하는 라근하이두르 욘스도티르(1646~1715)가 대표적이다. 홀라 지방 주교의 세 번째 부인이었던 그는 봉재와 자수에 능했고 아이를 잘 키워 당시 이상적인 결혼 상대자였다. 또 자수에 관한 기본서를 출간하는 등 아이슬란드 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돼 화폐에 등장했다.
여성들을 화폐인물로 등장시킨 나라들도 남녀 비율로만 따지면 남성 인물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남녀를 동수로 선정한 나라도 있어 눈길을 끈다. 호주는 지폐 앞뒤로 남녀가 한 명씩 등장한다. 10달러의 메리 길모어(시인), 20달러의 메리 라이비, 50달러의 에디스 코완(정치가), 100달러의 넬리 멜바(소프라노) 등이 호주의 여성 화폐인물들이다. 덴마크 크로네화, 유로화로 대체되기 전 독일 오스트리아 등의 화폐도 절반이 여성 인물이었다. 이처럼 화폐인물 선정에서도 세계적 흐름은 남녀평등을 지향하고 있고, 진취적 의미 부여가 가능한 인물을 선정하는 것이 추세로 자리잡았다.
45년 만에 등장하게 될 우리의 여성 화폐인물은 과연 누가 될 것인가. 꼭 다문 입술에 눈을 크게 뜨고 안경을 코에 걸친 메리 라이비(호주 20달러 인물)와 전 세계 여성 화폐인물들이 이 과정을 흥미롭게 쳐다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