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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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는 ‘문명 간 대화’ 채널의 상징

  • 노만수 서울디지털대 문창과 교수·도서출판 일빛 편집장

    입력2007-08-22 17: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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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리데기는 ‘문명 간 대화’ 채널의 상징

    유니버설발레단의 ‘NEW 심청’.

    “아버님! 소녀 먼저 가옵니다. 부디 눈을 뜨시옵소서.” “으악.”(인당수에 쓰레기가 떠다닌다.) “아버님! 죄송합니다. 물이 더러워서 도저히 못 뛰어내리겠습니다.”

    국정교과서인 초등학교 국어에 실린 만화 ‘망설이는 심청’의 한 대목이다. 공동체(가족)를 위한 개인, 남성을 위한 여성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가치관을 ‘생각, 물구나무서기’ 해보자는 국정교과서의 사뭇 ‘선진적인’ 편집이념이 신선하다. 하지만 초등학생들이 이를 얼마나 소화할지는 의문이다. 이렇게 우리나라 옛이야기에는 여성이 많이 등장한다.

    시인 김수영이 비록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고 노래했다 하더라도 과연 심청과 바리데기의 효는 영원한 미덕일까. 한 사회의 강자(남성)가 사회적 약자(여자)에게 요구하는 관습적 윤리일 뿐일까.

    심청과 바리공주의 공통점은 둘 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도 아버지를 위해 헌신한다는 것이다. 인당수에 뛰어든 심청은 왕비가 되어 늙은 아비를 호강시켜 주고, 바리데기는 저승여행을 통해 생명의 묘약을 얻어 아버지를 살리고 나라의 반을 떼주겠다는 아버지의 제안마저 거절한다.

    그 때문에 조현설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는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한겨레출판 펴냄)에서 바리데기를 여성과 가족 담론으로 읽기 전에 국가 담론으로 읽으라고 주문한다. ‘불라국’이라는 신화 속 가상국가가 주요 배경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힘인 국가권력은 체제 유지의 관성을 지닌다. 부계 전통이 필요하다. 국왕에게 아들이란 생명(권력)의 연장이다. 그런데 ‘신화’ 바리데기에서는 묘하게도 국가권력이 아들이 아니라 막내딸 바리데기의 희생으로 지속된다. 국왕이 병에 걸리지만 온 나라 의사의 처방은 헛방이다. 왕후 길대부인은 샤머니즘에 기대 옥녀무당을 찾아간다. 무당의 점괘는 서천서역국 약수만 특효란다. 하지만 서천서역국은 황천수(黃泉水) 건너편에 있는 저승의 한 공간이다. ‘불라국의 국경 밖’은 오구대왕의 권력도 어찌해볼 수 없는 공간이다. 결국 전체(국가)를 위한 부분(개인)의 희생이 필요하다. 하지만 약수를 가져오겠다는 공주는 없다. 오직 강물에 버려진 바리만 자청한다.

    그런데 바리데기는 자신의 힘으로 소생시킨 아버지 오구대왕 앞에서 불효자식이니 죽여달라고 엎드린다. 약물을 구하러 갔다가 아버지의 허락도 없이 약수 지킴이 동수자를 만나 아들 삼형제를 낳았으니 죄가 크다는 것이다. 죽었던 왕이 소생하자 국가윤리(남아선호 사상과 허혼윤리)가 오히려 피해자에 의해 되살아난 것이다.

    또 바리데기는 국가 체제에 안주하려 하지 않고 나라의 절반을 주겠다는 아버지의 뜻과 재물도 마다한 채 죽은 이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무조신(巫祖神)이 되기를 자청한다. 다시 국가 사회의 바깥에서 아무 권력도 없이 ‘진심으로’ 편견과 차별을 없애면서 세상의 고통을 해원(解寃·한풀이)하겠다는 것이다. 조현설 교수는 이렇게 한 국가의 마이너리티가 국가 외부에서 국가 위기를 돌파한다는 점에서 바리데기는 ‘피플과 마이너리티를 위한 국가 서사’라고 한다.

    바리데기는 ‘문명 간 대화’ 채널의 상징

    황석영의 소설 ‘바리데기’.

    황석영의 최근 소설 ‘바리데기’(창비 펴냄)는 바리데기를 탈북 소녀 ‘바리’로 살려내, 바리데기의 신화적 의미를 오늘날의 현실과 접목한다. 북한 청진에서 일곱 딸 중 막내로 태어난 바리는 유교 봉건국가라는 비판을 받는 북한 지방관료인 아버지의 남아선호 사상에 의해 숲 속에 버려진다. 하지만 풍산개 ‘흰둥이’가 다시 데려와 목숨을 건진다. 신열을 앓고 난 뒤 영매 능력도 생긴다.

    ‘샤먼 소녀’ 바리는 베를린 장벽 붕괴, 구소련 해체, 김일성 주석 사망, 북한의 대홍수와 기근 등 역사의 격랑에 던져진다. 중국과 무역업을 하던 외삼촌이 탈북 후 남행했다는 소문에 집안이 이산(離散)의 풍비박산을 겪는다. 조선족 ‘소룡 아저씨’의 도움으로 할머니, ‘현이’ 언니, ‘칠성이’(흰둥이의 새끼)만 두만강을 건넌 뒤 아버지와 재회한다. 그러나 현이 언니와 할머니는 비명횡사하고 흩어진 가족을 찾아 다시 북한에 들어간 아버지는 깜깜무소식이다.

    이후 바리는 중국 옌지(延吉)에서 발 마사지를 배우고 발만 봐도 그 사람의 인생과 병을 꿰뚫어본다. 동료 ‘샹’ 부부가 중국 다롄(大連)에 안마업소를 개업해 동행하지만, 결국 빚 때문에 ‘샹’과 함께 팔려 런던행 밀항선을 탄다. 런던에서 바리는 식당일을 하다가 발마사지 업소에 취직, ‘소수민족 빈민가 연립’에서 살게 된다. 그곳에서 바리는 건물관리인인 파키스탄 출신 무슬림 ‘압둘’ 할아버지와 그의 손자 ‘알리’를 만난다. 마사지 단골인 ‘에밀리’와의 영적 교신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과거사와 흑인들의 역사를 알아가면서 소수자 이해의 지평을 전 지구적으로 넓혀간다.

    압둘 할아버지 도움으로 불법체류자 단속을 피해 숨어 지내는 동안 바리와 알리는 가까워지고 결국 국제결혼까지 한다. 알리와 결혼해 안정기에 접어들지만 9·11테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터진다. 무슬림이 설 자리가 좁아지는 상황에서 알리의 동생 ‘우스만’은 가족 몰래 아프간 전쟁에 참여하고, 동생을 데려오기 위해 알리 역시 파키스탄으로 떠난다. 이 사이 바리는 딸을 낳지만 샹 언니가 애를 봐주기로 해놓고 돈을 훔쳐 달아나는 동안 혼자 남은 아이가 죽고 만다. 딸의 죽음에 절망한 바리는 칠성이와 영적 교류 등으로 다시 힘을 찾고, 쿠바의 관타나모 수용소에 갇혀 있던 알리도 돌아와 둘째 아이를 임신한다.

    현대판 바리의 인생 곡절에서 여러 가지를 읽을 수 있다. 얼굴은 사회주의지만 실제로는 봉건 군주(유교적 가부장) 같은 수령국가의 중세적 가부장주의의 부정성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북한-옌지-다롄-런던으로 이어지는 바리의 신산한 삶은 ‘아리랑 디아스포라(한민족 민족이산과 유랑)’의 비극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한다.

    그리고 지구촌의 전일적인 신자유주의 세계화 그늘 아래에서 신음하는 변방국가, 저 아래 사람들의 고통을 껴안고 해원하는 바리의 ‘다국적·다문화 마이너리티’ 정체성이 엿보인다. 바로 가족과 동포를 포함해 다양한 인종의 원혼을 달래고 심지어 가해자의 영혼까지 용서하고 관용하는 바리의 영매 능력을 통해 동서·인종·종교·체제·이념·문화를 초월한 깨달음이 세계화의 진정한 질서여야 한다는 것이다. 남성의 가부장주의, 체제의 정치 실정, 강대국의 횡포 등에 의해 소외와 차별, 고통을 받는 사회적 약자들의 상처와 절망을 위로하는 여자 바리가 악한 영혼과도 대화하는 대목에서는 우리 신화 속 바리데기가 ‘톨레랑스(tolerance·관용)’의 상징이라는 것을 이 소설은 전해주는 셈이다.

    하버드대 중국학 종신교수인 뚜웨이밍은 ‘문명들의 대화’(휴머니스트 펴냄)에서 강대국(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결국 다양성을 말살한다는 면에서 전체주의적이라고 비판한다. 때문에 강대국-변방국가, 남성-여성, 지배층-피플, 주류민족-소수민족, 국내인-외국인 노동자 등의 이항대립에서 상대적으로 ‘사회적 약자인 마이너리티 문제’는 ‘문명 간 대화’를 통해서만 풀릴 수 있다고 한다.

    그는 대화의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신유학’을 얘기한다. 예를 들면 ‘삼강오륜(三綱五倫)’ 중에서 전제주의적인 군위신강(君爲臣綱), 권위주의인 부위자강(父爲子綱), 남성중심주의인 부위부강(夫爲婦綱) 등은 전근대적이므로 폐기하고 ‘자애’와 ‘효’는 여전히 보편적 가치이므로 ‘부자유친(父子有親)’ ‘부부유별(夫婦有別)’은 오히려 ‘문명 간 대화’ 채널로 유용하다고 한다.

    물론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뚜웨이밍 교수가 바리데기를 만난다면 ‘문명 간 대화’ 채널에 동아시아적인 바리데기의 관용·해원정신을 포함시키지 않을까. 또한 바리를 탈북하게 한 나라의 위기는 누가 모면케 할까. 우리 신화의 주인공인 바리데기와 같은 마음이 열쇠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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