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비슷한 시기에 시작했지만 두 나라의 IPTV 서비스는 지금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홍콩에서는 IPTV 가입자 수가 크게 늘면서 다양한 콘텐츠를 선보인 반면, 일본의 IPTV는 가입자도 미미할 뿐 아니라 콘텐츠도 기존 케이블TV와 큰 차이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똑같은 IPTV라도 그 나라의 문화와 방송환경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홍콩과 일본의 IPTV 대표기업들을 통해 두 나라의 IPTV 서비스 실태를 살펴봤다.
홍콩 PCCW의 ‘NOW TV’직원들이 중앙컨트롤센터에서 방송 중인 화면을 모니터하고 있다.
20년 가까이 홍콩에서 살고 있는 강희경 씨는 TV를 즐겨 보는 편이 아니다. 하지만 TV 화질을 고려하고 영화나 다큐멘터리 등 가족이 좋아하는 몇 개 채널을 보기 위해 케이블TV를 시청할 수밖에 없었다. 케이블TV는 기본형이라도 최소 60여 개 채널을 봐야 한다.
하지만 강씨는 지난해 IPTV로 바꾸면서 이 같은 불편을 말끔히 없앴다. IPTV 업체에서 제공하는 17개 무료 채널을 기본으로 하고, 영화나 다큐멘터리 등 가족이 원하는 7~8개 채널만 골라 시청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가끔 영화 예고편을 보다 TV를 통해 곧바로 영화관 티켓을 예약할 수 있는 서비스도 경험하고 있다.
현재 홍콩 IPTV 업체는 ‘PCCW’와 ‘홍콩 브로드밴드’ 두 개. 이중 홍콩 브로드밴드는 가입자 수 4만~5만명의 영세업체다. 대부분의 홍콩 사람들은 PCCW의 NOW TV에 가입하고 있다. NOW TV 가입자는 최근 80만명을 넘어섰다. 강씨가 이용하는 IPTV 역시 NOW TV다.
PCCW가 2003년 8월 NOW TV 서비스를 시작한 지 4년도 채 되지 않아 이룩한 결과다. 반면 케이블TV 업체인 I-Cable은 현재의 80만 가입자를 확보하기까지 14년이 걸렸다.
NOW TV가 이처럼 급성장한 것은 PCCW의 기존 브로드밴드(광대역통신망) 가입자 수와 무관치 않다. PCCW는 우리나라의 KT(한국통신)와 유사한 홍콩 최대 기관망사업자다. 1999년 설립된 이 회사는 홍콩 전체 통신망 380만 회선의 74%인 280만 회선을 보유하고 있다. 이를 기반으로 광대역통신망 사업과 모바일(이동) 전화사업 등에서도 최대사업자로 군림해왔다.
광대역통신망 패키지로 가격 할인
일본 ‘히카리퍼펙트TV’의 채널 안내화면. 히카리퍼펙트TV는 IPTV와는 달리 RF 전송방식을 채택한 케이블TV 업체로 기존 케이블TV와도 차이가 있다. IPTV와 케이블TV의 중간 정도에 해당한다(사진 아래). 일본 소프트뱅크 ‘BBTV’ 중앙컨트롤센터.
NOW TV 가입자(80만명)의 약 80%가 바로 PCCW의 광대역통신망 가입자다. 기존 가입자의 경우 NOW TV 가입이 손쉬울 뿐 아니라 ‘패키지’로 가격 할인까지 받을 수 있다는 게 가입자 확보에 큰 도움이 됐다.
NOW TV가 급성장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차별화된 콘텐츠다. NOW TV는 현재 130여 개의 채널을 보유하고 있다. 최대 70여 개 채널을 보유한 케이블TV보다 2배 가까이 많다. 그만큼 선택 폭이 넓어진 것이다. 가입자들에게 최근 가장 인기가 높은 프로그램은 중국 영화와 한국 일본 드라마, 스포츠 채널 등이라고 한다. 8월11일부터는 영국 프리미어 축구 경기를 독점 중계할 예정이다.
케이블TV에서는 불가능한 양방향 서비스가 가능하다는 점도 NOW TV의 장점. 현재 영화채널(118)에서는 영화 예고편을 보고 영화관 티켓 구매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방에 앉아 TV를 보면서 영화관 좌석까지 선택할 수 있다.
또 비즈니스채널(333)에서는 홍콩 주식시황을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고, 쇼핑채널(501)에서는 서점과 DVD 대여점은 물론 레스토랑에 음식배달 신청도 가능하다.
NOW TV는 하나의 콘텐츠를 IPTV, 인터넷, 전화, 모바일폰 등 4개 통신수단으로 동시에 이용할 수 있는 ‘인터랙티브 플레이’ 시스템을 조만간 선보일 예정이다.
독점적 최대사업자인 PCCW가 IPTV 같은 신규사업에 어떻게 진출할 수 있었을까. IPTV의 관리 주체 문제와 업계간 이해충돌로 수년째 서비스조차 시작하지 못한 우리나라와 크게 비교되는 대목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독점적 사업자에게 신규사업 진출을 허가했다면 각종 특혜 의혹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을 터다.
해답은 홍콩 정부가 2000년 7월7일부터 시행한 방송조례에 있다. 이 조례는 방송 규제를 완화하는 게 골자다. 소비자들에게 방송 프로그램 선택 폭을 넓히고 공정경쟁을 통해 방송산업에 대한 투자와 기술혁신을 유도하겠다는 것. 여기에는 홍콩을 아시아 지역의 통신과 방송 허브로 육성하겠다는 국가 차원의 포부가 담겨 있다.
규제 완화로 방송산업 혁신 유도
홍콩 정부는 IPTV의 규제기관도 명확히 했다. IPTV를 유료방송 서비스로 분류해 ‘BA(Broadcasting Authority·방송업무관리국)’에서 허가와 관리감독을 받게 했다. BA는 우리나라 방송위원회와 비슷한 기구다. 그리고 ‘TA(Telecommunications Authority·통신업무관리국)’에서는 기술적인 문제를 지원하게 했다. TA는 우리나라 정보통신부에 해당한다. 홍콩에서도 2004년부터 BA와 TA 두 기구의 통합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업계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
PCCW의 폴 베리먼(Paul Berriman) 기술담당 사장은 “IPTV나 케이블TV는 다른 기술을 사용한다 해도 모두 똑같은 유료방송서비스 라이선스가 필요하며, BA의 관리감독을 받는다”고 말했다.
베리먼 사장은 이어 “BA는 변호사 등 사회지도층 인사로 구성돼 방송의 공공성 침해 여부를 감시하는 한편, 기술적 문제에 대해서는 좀더 전문적인 기관인 TA의 도움을 받는다”면서 “두 기구가 합쳐질 경우 실용성이 나아질 것 같지만 지금도 큰 불편은 없다”고 말했다.
정보통신부와 방송위원회의 기구 통합과 IPTV 법제화를 앞두고 난맥상을 보이는 우리 현실과 비교할 때 홍콩의 사례는 참고해볼 만하다.
[일본]
“IPTV요? 그게 뭐죠?”
일본 사이타마현에서 도쿄로 출퇴근하는 재일교포 황모(43) 씨는 아직 IPTV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의 집에서 이용하는 TV회사는 지역 케이블TV 업체다. 일본은 전국적으로 수백개에 이르는 케이블TV 업체가 난립해 있다. 황씨는 “집에서 인터넷을 사용하는데 속도가 너무 느려 인터넷망을 이용한 TV 서비스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일본인 대부분이 황씨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올해 4월 일본 총무성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IPTV 이용자 수는 30만명에 불과하다. 2006년 말 기준으로 1억2700만명 정도인 일본 인구에 비하면 미미한 숫자다.
현재 일본 내 IPTV 업체는 소프트뱅크그룹 BB케이블의 ‘BBTV’와 KDDI의 ‘히카리플러스TV’, NTT가 자회사를 통해 투자한 ‘4th MEDIA’ ‘ON-Demand TV’ 4개다. IPTV 전체 이용자 수를 업체 수로 나누면 업체당 6만~7만명인 셈이다. 총무성 발표가 업체에서 제공한 수치를 근거로 집계한 것이라면 실제 이용자 수는 이보다 적을 수도 있다.
IPTV 업체 가운데 가장 먼저 서비스를 시작한 곳은 소프트뱅크의 BBTV다. 2002년 10월부터 시작했으니 올해 10월이면 만 5년이 된다. BBTV의 가장 큰 자산은 350여 만명에 이르는 소프트뱅크의 인터넷 가입자다. 이들 중 10% 정도만 가입해도 35만명 이상의 가입자를 확보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하지만 아직 이렇다 할 성과가 없다.
일본 도쿄 미나토쿠 소재 시오도메빌딩 소프트뱅크 회의실에서 만난 BBTV 관계자들은 가입자 수나 매출 등 회사의 기본적인 영업현황에 대해서조차 밝히기를 꺼렸다.
현재 BBTV에서 제공하는 기본 패키지 상품은 무료 4개 채널, 유료 36개 채널 등 총 40개 채널과 한 달 동안 선택해서 볼 수 있는 영화 VOD 10개다. 이 밖에 영화, 스포츠 등 4개 채널은 각각 유료로 선택할 수 있고, TV 시리즈와 영화를 유료로 볼 수 있다. 기존 케이블TV와 별로 다를 게 없다.
BBTV 홍보담당 무라나가 씨도 이를 부인하지 않았다.
“케이블TV 업체도 VOD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10월부터 좀더 차별성 있는 서비스를 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무라나가 씨는 그러나 준비 중인 서비스에 대해서는 “아직 언론에 발표할 단계가 아니다”라며 함구했다.
나머지 IPTV 업체들도 상황은 마찬가지. 무료 및 유료 채널 몇 개와 VOD, 가라오케 서비스 등이 전부인 것. IPTV만의 차별화된 콘텐츠는 사실상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IPTV가 일본에서 이처럼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현재 일본의 IPTV는 지상파 TV를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오히려 케이블TV보다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저작권 문제가 걸려 지상파 TV 업체에서 IPTV 업체에 프로그램 제공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저작권 문제는 일본 총무성과 문화성의 방송에 대한 정의가 다른 데서 출발한다. 총무성은 IPTV를 2002년 제정한 ‘전기통신역무이용방송법’을 근거로 방송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문화성은 저작권법상 IPTV를 방송이 아닌 ‘자동공중송신’으로 분류했다.
문화성의 분류대로라면 지상파 방송국이 IPTV 업체에 프로그램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출연자와 일일이 별도의 저작권 협상을 벌여야 한다. 프로그램마다 수많은 출연자와 저작권 재협상을 벌인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日, 케이블보다 경쟁력 뒤져
다행히 이 같은 법률상의 문제는 지난해 일본 정부가 나서서 해결했다. 하지만 방송사와 IPTV 업계 간의 협상은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다.
인터넷 속도가 느린 것도 일본 IPTV 업체가 극복해야 할 문제로 지적된다. 일본 정부는 2001년부터 2005년까지 이른바 ‘e-재팬’ 2단계 정책을 통해 세계 최첨단 IT국가 실현을 추진했다. 그 결과 광대역 인터넷서비스 보급률이 2003년 말 전체 지역의 61%였던 것이 2005년 말 93%를 넘어섰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전체적으로 인터넷 속도가 크게 개선되지 못했다는 평가다.
문제는 기존의 집단 공동주택이나 개인주택에 깔려 있는 노후화된 동선이다. 집 앞까지는 고속도로가 뚫렸지만 집으로 이어주는 도로가 비포장도로인 셈.
또 일각에서는 방송시장과 문화 측면에서 원인을 찾았다. 일본의 케이블TV 업체인 ‘히카리퍼펙트TV’의 사이토 사장의 이야기다.
“홍콩에서 IPTV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방송국도 별로 없고 채널 수도 적기 때문이다. 홍콩은 또 IPTV의 영화 티켓 판매서비스 등 부대 서비스를 통해 적지 않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문화다. 하지만 일본은 다르다. 방송국 수는 물론 채널 수도 많다. 특히 일본은 문화적 특성상 영화나 공연 티켓을 현장에서 직접 구매하는 경향이 강하다. 일본에서는 인터넷 티켓 판매도 안 되는 상황에서 IPTV를 통한 티켓 판매를 기대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러나 일본 IPTV 사업의 성패를 평가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문화는 시간이 흐르면 변화할 수 있고, 지상파 방송사와 IPTV 업계 간의 협상도 언젠가는 타결될 수 있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일본 정부의 움직임이다. 일본 정부는 2010년까지 일본 전역에 광대역 인터넷서비스 보급률 100%를 목표로 한 ‘U-재팬’ 정책을 추진 중이다. 여기에는 내년부터 추진되는 차세대 네트워크 구축사업도 포함돼 있다. 이에 따라 일본 IPTV 업계의 근본적인 문제로 지적되는 인터넷 속도도 향상될 것으로 전망된다.
일본 정부는 또 2011년 7월24일을 기점으로 아날로그 방송을 종료하고 모든 방송을 디지털화할 예정이다.
발전이나 진화에는 그에 따른 시간과 비용이 따르는 법이다. 일본은 지금 TV의 진화를 위해 시간과 비용을 치르며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이다. 그 한가운데 IPTV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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