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비선(秘線)라인 그 180일의 기록을 공개하면서
| 2006년 9월20일부터 2007년 3월20일까지 내가 서울 평양 베이징을 오가며 기록한 비망록의 제목은 ‘앉아서 기다리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다. 이 비망록에는 많은 등장인물이 나오는데, 그 개인들마다 각 상황과 여건에 반응하는 모습을 그대로 적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므로 실명을 공개한다. 글의 추임새로 개인적인 판단이 일부 들어갔을 수는 있으나, 사실만 추려 날짜·시간·상황별로 기록하고자 했다.
지난해 7월 미사일 발사와 10월 핵실험의 중간 시점에 남북한 권력 핵심부 사이에 비선라인 하나가 열렸다. 나는 시작부터 지금까지 이 일에 개입돼 있는 라인의 최초 개설자다. 이 일에 기획자로서 참여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나의 기획은 온전하게 이행되지 못했다. 한반도의 미래를 위한 서울과 평양 양측의 두 가지 숙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은 상태다. 그 첫 번째가 바로 현실주의에 입각한 남북문제의 냉철한 조망(眺望)이고, 두 번째가 구태와 구습을 떨쳐버린 새로운 남북한 관계다. 내가 추구한 목표는, 남북한이 지금껏 협상하고 협력해온 과정에서 수없이 반복됐던 ‘화장질’을 벗겨내자는 것이었다. 화장질이란 서로의 필요에 의해 정치적으로 현안과 물자를 주고받는 행위를 말한다. 나는 그런 식으로는 우리의 미래가 없다고 봤다. 그래서 상생이 가능한 경협 프로젝트를 기본으로 대화의 폭을 넓혀나가고자 했다. 특사 교환과 남북정상회담도 당연히 그 내용에 포함해 추진됐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의 선택은 결국 3월 이산가족 문제와 쌀·비료를 맞교환하는 ‘화장질’로 일단락됐다. 2000년 이후 계속된 행태를 답습한 것이다. 그리고 이해찬 전 총리가 방북했다. 그 과정에서 정치적인 화장질로밖에 볼 수 없는 행태가 드러났다. 당초 내가 추진하고자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다. 정파적 이익에 따른 것이라고 말하겠지만, 그것도 아닌 이상하게 변형된 대화시스템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는 결코 올바른 방법이 아니었고, 내 신념과 절대적으로 배치됐다.
비망록을 공개하는 이유는 이 같은 상황에 대한 내 의견을 밝히고자 하는 뜻에서다. 일자별, 사건별로 중요한 사항만 간추려 나열한다. 그래서 그때그때 상황에 담긴 진정한 의미들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조만간 비망록 전체 내용이 공개되면 상세히 보길 바란다.
남북한 문제에는 상식으로는 판단하기 어려운 갖가지 복잡한 변수들이 항상 내재돼 있다. 막연한 낙관론이 오늘을 지배할 상황은 아니다. 간단한 일지로 인해 오히려 내가 말하고 싶은 본의가 왜곡될 수도 있음을 경계한다. 하지만 곧 나오게 될 전체 비망록이 혹시 있을지도 모를 오해를 씻어주리라 기대해본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