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 누렇게 펼쳐진 황금벌판은 자전거 여행객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10월11일 아침 경주 시내에서 태종무열왕릉으로 향하고 있는 데이비드 모저 일행.
신라의 고도, 경주의 천마총 앞에 선 미국인 데이비드 모저(51) 씨는 자신이 준비해온 자료를 보면서 일행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기자가 ‘박게’가 아니라 ‘백제’라고 고쳐주자 그는 여러 차례 ‘백제’ 발음을 반복한 뒤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는 삼국시대, 특히 신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10여분간의 설명이 끝난 뒤 그와 세 명의 일행, 그리고 기자는 다시 자전거에 올라 첨성대로 향했다. 출발하기 전 모저 씨는 자전거 여행이 처음인 쉴라 비락(54) 씨와 기자의 자전거를 일일이 살폈다. 천마총에서 첨성대로 가는 길은 평탄했다. 다소 오르막이 있었으나 힘이 들 정도는 아니었다. 햇살은 무척 따스하고 평화로웠다. 하늘하늘 흔들리는 길가의 코스모스는 자전거 여행객의 마음을 한껏 부풀게 했다.
경주 반월성 옛 궁궐 터에 이르자 눈길을 끄는 행사가 펼쳐지고 있었다. 신라 김씨 십이위(十二位) 대왕 추향대제가 후손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봉행되고 있었던 것. 신라 김씨의 36명 왕 중에서 무덤이 없는 12명의 왕에 대한 제향을 올리는 행사였다. 신라의 전통 의상을 입고 여러 차례 절을 올리는 사람들을 보고 일행은 호기심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기자가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넓은 의미에서 한 가족”이라고 설명하자 한국만의 특별한 씨족문화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다.
때마침 신라 십이위 대왕 추향대제
이들 한국 자전거 여행 일행을 이끌고 있는 데이비드 모저 씨는 국제자전거재단(Inter-national Bicycle Fund·IBF)의 대표이자 환경운동가다. 미국 시애틀에 본부를 둔 IBF는 무동력 운송수단을 위한 도시설계, 자전거 안전교육, 자전거 여행 기획 등을 하는 시민단체. 그로서는 이번이 두 번째 한국 방문이다. 그는 지난해 10월에도 서울에서 출발해 DMZ(비무장지대)와 강원도를 거쳐 동해안을 따라 내려와 제주도까지 한 달 동안 자전거 여행을 했다. 올해는 10월10일부터 2주간의 일정으로 IBF 홈페이지를 통해 신청한 세 명의 미국인들과 함께 경주, 거창, 진주, 순천, 고흥, 남해를 거쳐 제주도까지 누빌 계획이다.
여행 일정은 ‘한국 전문가’인 데이비드 모저 씨가 직접 짰다. 그는 여행하는 내내 한국의 정치, 사회, 문화 등에 대해 일행에게 설명했다. 한국인인 기자보다도 더 많이 알고 있었다. 김치, 부산, 대구 등을 예로 들며 한국어를 영어로 표기할 때 K와 G, T와 D를 혼동해서 사용한다고 지적했고, 한국인들의 친절함에 놀라움을 표하는 일행에게 1988년 서울올림픽과 2002년 한일월드컵을 치르면서 외국인에 대한 한국인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고 알려줬다. 심지어 한국에서 절을 할 때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한 번, 조상에게는 두 번, 부처에게는 세 번, 왕에게는 네 번 한다고 설명했고, 동학의 가르침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한국과 인연이 깊다. 우리나라에서 입양한 딸(10)을 키우고 있고, 아내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피가 섞인 미국인이다. 채식주의자인 그는 특히 자연식에 가까운 한국의 음식문화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자전거를 타고 아프리카 25개국을 포함해 세계 37개국을 돌아다닌 여행광이지만, 지난해의 한국 여행이 가장 잊을 수가 없다고 털어놓았다. 특히 아름답게 단풍이 든 산과 고운 모래가 가득한 해변가, 농촌과 어촌의 모습, 해인사에서 스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보냈던 여러 밤들, 진주의 연등축제, 제주 해녀의 모습, 추석 풍경 등이 인상적이었다고.
“지난해 추석 때 강원도 지역을 지나고 있었는데, 산기슭마다 사람들이 무덤 앞에서 절을 했어요. ‘저게 뭘까?’ 무척 궁금했죠. 그런데 교통 체증이 심하다 보니 도로에서 한번 마주친 사람들을 여러 차례 다시 보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안면을 익힌 사람들과 한국의 추석 및 성묘, 차례 문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어요. 무척 재미있더군요.”
일행의 면면도 흥미롭다. 유일한 여성인 쉴라 비락 씨는 소설가다. 6·25전쟁에 참가한 미군 소속의 여자 간호사가 주인공인 소설을 쓰고 있다. 이번 여행에 참여한 이유도 소설의 배경이 되는 한국에 대해 제대로 알기 위해서다. 특히 주인공이 한국의 민간인들과 함께 하는 내용이 많은 만큼 다양한 한국인들과 접해 그들의 생생한 모습을 알고 싶다고 했다. 자전거 여행을 택한 이유도 여행사를 통한 ‘투어’에서는 사람들과 만날 기회가 부족하기 때문. 그는 “시골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감 등이 든 과일 주머니를 건네줬다. 한국인들은 매우 친절하다”며 함박웃음을 웃었다.
“한국인과 함께 달리고 싶어”
쉴라 비락, 서성걸, 그레그 레스브릿지, 데이비드 모저 씨(왼쪽부터). IBF가 진행하는 자전거 여행 프로그램에 참가하고 싶다면 홈페이지를 통해 연락하면 된다.
컴퓨터 엔지니어인 그레그 레스브릿지(48) 씨는 데이비드 모저 씨 못지않은 자전거 여행 전문가다. 20년 동안 자전거를 타고 뉴질랜드,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터키, 그리스, 아일랜드 그리고 아프리카와 남미 등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한국에는 이번이 처음. 그는 “두메산골에서도 인터넷을 사용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는 점이 무척 인상적이었다”며 한국의 IT 문화의 발전상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들의 자전거 여행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다. 자전거와 같이 환경을 오염시키지 않는 지속 가능한 운송수단 도입을 위한 환경운동의 한 방법이자, 남극과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리는 등의 자연의 경고를 새겨들으라는 당부이기도 하다. 또 IBF는 이번 한국 자전거 투어와 같은 여행 프로그램을 1년에 4~5차례 진행하는데, 이때 참가자들이 낸 금액 중 20%는 재단에 적립돼 제삼세계를 지원하는 데 사용된다. 1년간의 적립금은 3만 달러 정도. 이 재원으로 아프리카 짐바브웨에 자전거 도로를 만드는 일을 도왔고, 에리트리아에 자전거 부품을, 쿠바에는 자전거를 보냈다.
데이비드 모저 씨는 10월23일까지 진행되는 이번 자전거 여행에 국내 한국인들도 참여하길 바란다고 했다. 한국인들과 함께 달리며 서로 배우고 싶다는 것. 또 IBF에서 진행하는 세계 각지의 자전거 여행 프로그램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참여를 원하는 사람을 IBF 홈페이지 www.ibike.org 또는 ibike@ibike.org로 연락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