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의당 채귀하를 기리는 사당과 비석. 대구시 검단동 검단토성 안에 있다.
채수가 이 동네에 정착하게 된 것은 공갈못 때문이다. 함창현감이던 아버지를 따라와 살던 책방도령 시절에 공갈못을 구경하러 갔다가 담 너머에 살구를 따먹었는데, 그게 인연이 되어 살구나무 집 딸과 혼인하게 됐다. 훗날 성균관 대사성과 호조참판을 지낸 채수는 중종반정에 본의 아니게 휘말려들어 4등공신이 되지만, 반정이 올바르지 않다고 여겨 처가 동네인 상주시 이안면 이안리에 은거하게 된다. 이안리는 공갈못에서 고개 하나 넘으면 나오는 동네다.
채수, 한문소설 지었다가 파직되기도
채수는 이 동네 쾌재정(快哉亭)에서 한문소설 ‘설공찬전’을 지었다.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보다 40여년 뒤의 작품인데, 1996년에 한글 번역본이 발견돼 화제가 됐다. 이 작품은 집필 당대에 한글 번역본까지 나돌았고, 조정에서 금서로 지목해 불사르기도 했다. 또 사헌부가 작가인 채수를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진언했으나 중종이 파직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 곡절까지 있었다. 채수가 머물던 이안리 쾌재정은 지금도 잘 보존돼 있다.
아버지 다의당의 뜻을 받들어 고향 땅에 내려와 집안을 지킨 맏아들 채영의 무덤.
인천 채씨가 인천에서는 찾아보기 어렵고, 경상북도에 많이 세거(世居)하게 된 것은 인천군 채수의 고조부인 다의당(多義堂) 채귀하(蔡貴河) 때문이다. 채귀하는 인천 채씨 시조의 10세손이자 중시조다. 인천 채씨 문중은 시조로부터 9대조까지의 묘는 실전(失傳)하고, 그들에 관한 기록도 그다지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기록은 채귀하로부터 다시 시작한다. 모든 인천 채씨는 채귀하로부터 비롯됐다.
인천군 묘소 앞에 세워진 신도비, 비석 받침돌의 해태상이 인상적이다(왼쪽). 날아갈 듯 날렵한 쾌재정.
이때 함께 강을 건넌 여덟 전서(典書·조선의 판서 직책)가 있었다. 호조전서를 지낸 채귀하·변숙(邊肅)·이맹운(李孟芸)·박침(朴沈)·조안경(趙安卿), 공조전서를 지낸 서보(徐輔)·박심(朴諶)·박녕(朴寧)이 이들인데, 이들이 벽란진을 건넌 것을 두고 당시 사람들은 팔전도(八典渡)라 불렀다.
이때 벗들과 헤어지며 지은 채귀하의 시가 몇 편 전하는데, 그중에 ‘도진분로(渡津分路·나루를 건너며 길이 갈리다)’가 있다. “다 함께 두문동을 나와서/ 배를 잡아 앞다투어 나루를 건넜네/ 고려의 국록을 아직 잊지 못하는데/ 어찌 이씨의 신하가 되겠는가/ 바다를 건너겠다는 노중련의 절개 같고/ 고사리를 캐던 백이숙제와 한가지일세/ 나라 잃은 우리들의 원한을/ 답답하여 강물의 신에게 물어보노라.”
1982년 다의당 기리는 의현사 마련
인천 채씨 족보에 나오는 채미도. 다의당은 채미도를 보면서 절의를 지켰다고 한다.
채귀하는 목단산 다의현에서 백이숙제가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고 살던 모습을 그린 채미도(採薇圖)를 보면서 절의를 지키다 생을 마쳤다. 그리고 목단면 의현리 불곡산에 묻혔다.
채귀하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두문동으로 들어가기 전에 맏아들 영(泳)은 고향에 돌아가서 조상의 제사를 지내고 고려 임금을 받들라 했고, 둘째 부(浮)는 평양으로 가서 아비와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살라 했고, 셋째 동양(東陽)과 넷째 명양(明陽)은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다.
맏아들 채영(蔡泳)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고향 마을인 대구시 후동에서 얼마간 떨어진 팔공산 자락 미대동에 터를 잡고 살았는데, 그 후손들이 번창하여 인천군 채수를 배출하고 경상북도 인천 채씨의 맥을 형성하게 됐다. 남북 분단이 길어지면서 다의당의 묘소를 오래도록 찾지 못하게 된 인천 채씨 문중에서는 1982년 삼한시대에 축조된 대구 북구 검단동 검단토성 안에 다의당을 기리는 의현사(義峴祠)를 마련했다. 그리고 대구시 서변동 채영의 묘소 위쪽에 단소(壇所)를 만들어 시조를 모시고 있다.
두문동 72현의 절개가 한 집안의 뼈대가 되고, 자부심이 되어 600년을 치달려온 뒤 대구 땅에 맺힌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