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맨해튼 중심부 번화가인 타임스 스퀘어 거리와 이 거리에 설치된 감시카메라 위치를 표시한 지도(작은 사진).
사건의 성격에 따라 다르겠지만, 답은 뻔하다. 목격자를 찾거나 지문을 채취하고, 혹시 현장 주변에 있을지 모를 범인을 찾기 위해 도주로를 쫓아가 보는 정도일 것이다. 옛날 탐정소설에는 수사관이 현장 부근에서 담배꽁초를 찾는 장면이 종종 나왔다. 그런데 요즘은 전혀 다르다. 바로 ‘주변에 감시카메라가 있는지 알아보고, 카메라가 있는 경우 즉시 테이프를 구해본다’는 것이다.
얼마 전 뉴욕 브루클린의 애틀랜틱 애버뉴에서 승용차가 앞서가던 오토바이를 들이받는 사고가 발생했다. 오토바이 운전자는 그 자리에서 숨졌다. 승용차 운전자는 아무도 본 사람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뺑소니를 쳤다. 그런데 길 건너편에 있는 주유소의 광각(廣角) 감시카메라가 추돌 장면을 모두 잡아냈고, 인근 건축공사장에 걸려 있던 감시카메라에는 승용차 운전자의 행동이 모두 촬영됐다. 운전자는 사고 직후 태연하게도 차에서 내려 차 번호판을 떼어 부근의 쓰레기통에 버리고 차를 몰고 도망쳤다. 이 장면이 모두 찍힌 것이다. 뉴욕 경찰은 테이프를 분석해 차량 번호판을 손쉽게 찾아냈고, 운전자와 흰색 머큐리 마키스 차량을 추적할 수 있었다.
감시카메라 활용한 사건 해결 잇따라
맨해튼의 한 헬스클럽 로커룸. 한 여자가 다른 사람의 지갑을 훔쳤다. 지갑 속의 신용카드 여러 장 중 한 장이 필렌 백화점의 한 가게에서 사용됐다. 경찰은 카드 거래내용과 함께 백화점의 감시카메라를 확인해 여자의 얼굴 사진을 확보했다. 여자가 다른 곳에서도 물건을 훔치는 장면이 또 다른 카메라에 잡혔다. 경찰은 수배 전단을 만들어 돌렸고, 여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체포됐다.
5월5일 맨해튼의 영국 총영사관 빌딩 앞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했을 때도 경찰은 인근 거리에 설치된 40여개의 감시카메라를 분석했다. 그 결과 수사에 참고할 만한 상황을 목격했을 가능성이 있는 여러 명의 사람을 찾아낼 수 있었다.
“사건 현장에 도착해 경찰관이 가장 먼저 하는 일 중 하나는 민간인이 설치한 감시카메라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뉴욕경찰청 레이먼드 켈리 청장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그러면서 “이런 수사방식은 10년 또는 15년 전엔 표준방식이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교통사고 현장에서 자동차의 스키드 마크(급정차 때 도로 표면에 생기는 타이어 흔적)를 찾아내듯, 요즘 사건 현장 주변에서는 수사에 활용할 만한 5∼10종의 비디오 테이프를 찾아낼 수 있다고 한다. 비디오 화면은 인간의 기억력보다 훨씬 더 정확하다. 감시카메라 화질이 개선되면 차량 번호판이나 범인 얼굴 등을 깨끗한 화면으로 잡아낼 수 있을 것이다.
전등 모양의 감시카메라(왼쪽)와 감시카메라 설치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만든 이미지.
그러나 감시카메라가 고장 나 있거나 노후돼 찍힌 내용을 제대로 식별할 수 없어 사건이 터져도 별 쓸모없는 사례도 꽤 있다. 킹스 카운티 병원 응급실에 미용실 연쇄 강도 용의자가 부상을 입고 실려왔다가 병원을 몰래 빠져나가는 사건이 일어나자 경찰은 감시카메라를 뒤졌으나 카메라는 고장 난 상태였다.
“맨해튼을 한 시간 돌아다니면 수십 대의 감시카메라에 얼굴이 찍힌다”는 말이 있다. 6∼7년 전에는 “하루 종일 걸어다니면 120대의 카메라에 찍힌다”고들 했다. 건물 위, 판매장 내, 공사장, 세차장, 공공장소 등에 내걸린 카메라가 그만큼 많다는 얘기다. 뉴욕 경찰은 타임스 스퀘어나 브롱크스의 포담 로드 같은 곳에 적어도 200대의 감시카메라를 설치해놓고 모니터하고 있다. 시내 일원에 있는 아파트 등에도 5000여대의 카메라를 설치해놓고 있다.
뉴욕 경찰은 우범지대나 교통량이 많은 곳에 400대의 감시카메라를 추가 설치할 계획이다. 경찰은 뉴욕 시내에서 벌어지는 범죄의 절반가량이 최소한 한 대의 감시카메라에 포착된다고 주장한다. 뉴욕시가 직접 운영하는 감시카메라의 경우, 카메라를 설치한 뒤 범죄가 36% 줄어들었다고 한다. 특히 감시카메라 설치 안내판이 범죄예방에 효과가 크다는 게 경찰 측 설명. 켈리 청장은 이 카메라를 ‘범죄 억제 카메라’라고 부른다. 그러나 일각에선 “그렇게 줄어든 범죄의 대부분이 낙서와 노상 방뇨이며, 카메라와 함께 근무 경찰관을 증원한 것이 범죄예방 효과를 낳은 것이다”는 반론도 있다.
가격 하락·화질 개선으로 폭발적 확산
시민단체들은 “공청회를 통한 논의 과정 없이 감시카메라를 증설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며 찬반토론을 제안하고 나섰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이것은 근본적인 자유에 관한 문제”라면서 “자유로운 여행을 할 권리, 익명을 추구할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경찰은 “사생활 침해 문제가 없는 공공성이 높은 장소에만 설치할 것이며 그곳에 경찰용이라는 팻말을 붙여놓겠다”고 맞서고 있다.
판매장이나 기업 등 민간이 설치해놓은 감시카메라는 훨씬 더 많다. 뉴욕의 시민단체 ‘시민자유연합(CLU)’에 따르면, 맨해튼의 감시카메라는 98년 2397대에서 현재 1만5000대 이상으로 늘어났다. 거리 한 블록당 10대꼴이다. 98년 타임스 스퀘어에는 75대의 감시카메라가 있었지만 2000년 5월 131대로 폭증했다. 올해 5월 이곳에서 발견된 감시카메라는 모두 604대. 5년 동안 500%나 증가한 셈이다. 1998∼2004년에 첼시에 설치된 카메라는 67대에서 368대로, 로어 이스트 사이드에 설치된 카메라는 21대에서 125대로 각각 늘어났다.
이처럼 감시카메라의 수가 폭증하는 이유는 디지털 비디오카메라의 값이 떨어지고 화질이 개선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힘입어 비디오 경비 사업은 9·11테러 이후 그 이전의 두 배 속도로 매년 15∼20%씩 성장하고 있다. CLU는 ‘감시카메라 워킹 투어(Walking Tour)’라는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맨해튼 곳곳을 걸어다니면서 감시카메라를 찾아보고 사생활이 어떻게 침해되는지 점검해보는 관광 프로그램이다. 1시간 30분이 소요되며 1인당 참가비는 5달러.
사건이 터지면 사설 감시카메라의 테이프는 경찰관 손에 들어간다. 민간인이 비디오를 찍는 것은 불법이 아니다. 그러나 정부(경찰)가 찍는 것은 불법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상 카메라를 누가 설치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이는 시민단체가 우려하는 부분이다. CLU는 맨해튼 내에서 어느 곳에 감시카메라가 설치돼 있는지를 웹사이트를 통해 공개하기도 한다. 재미있는 대목은 경찰 또한 이 사이트를 이용한다는 점. 사건 발생 직후 경찰은 해당 지역에 카메라가 설치돼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이 사이트에 접속한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하고 있다.
미국의 다른 대도시들도 감시카메라 설치에 열심이다.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시카고의 경찰은 지난해 9월 2000대의 감시카메라를 서로 연결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볼티모어도 올해 5월 10대의 휴대용 감시카메라를 설치, 24시간 녹화 및 모니터를 시작했다. 이곳 및 뉴올리언스 등 일부 대도시는 감시카메라 설치에 미 연방 예산을 지원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