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의 소설 ‘단종애사’를 읽고 분개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성삼문이 모진 국문을 받고 죽은 날, 신숙주가 집에 돌아오자 그의 아내 윤씨는 성삼문과 함께 절의를 지켜 같이 죽지 않은 것을 힐책하고 부끄러워하다 다락에서 목매 자살하고 만다. 야사(野史)가 소설화된 내용이지만 그때부터 나그네의 머릿속에는 신숙주가 몰염치한 배신자로만 각인됐던 것 같다. 그러나 최근에 신숙주의 정감 어린 다시(茶詩)를 한 편 접하곤 그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나그네는 경기 의정부에 사는 후배의 승용차를 타고 그의 묘로 향했다.
도갑산 절 작설차와/ 옹기마을 울타리에 떨어진 눈 속의 매화꽃은/ 마땅히 내게 고향 생각의 뜻을 알게 하니/ 남쪽 고을 옛일들이 떠올라 기뻐하노라(道岬山寺雀舌茶 瓮村籬落雪梅花 也應知我思鄕意 說及南州故事多).
이 시는 신숙주의 증조할아버지가 나주 옹촌(瓮村)에서 살 때 친교를 맺었던 영암 출신인 도갑사 수미(壽眉) 스님이 한양의 신숙주를 찾아온 다음날 지은 것이라고 한다. 신숙주는 수미 스님이 보내준 작설차를 오래 마셨을 터인데, 고향집의 눈 쌓인 울타리에 떨어진 매화꽃을 잊지 못하는 그의 낭만에 나그네는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안목으로 신숙주는 ‘보한재집’에 안평대군이 소장한 222축(軸, 두루마리)의 서화를 비평한 화기(畵記)를 남기지 않았나 싶다. 대단한 예술 비평인 셈이다. 그러나 한글 창제와 여진 토벌 공로 및 탁월한 경륜으로 6대 왕을 섬겼는데도 세조의 왕위 찬탈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숙주나물보다 못한 변절자’로 평가받아왔다.
‘보한재집’ 등 수많은 서적 편찬
신숙주는 조선 태종 17년(1417) 나주에서 태어나 7살에 대제학 윤회의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16살에 윤회의 손녀와 혼인한다. 23살 때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해 전농직장(典農直長)이란 종7품 벼슬을 시작으로 집현전 부수찬, 부제학 등을 역임하다 문종 2년에 동갑지기인 수양대군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갈 때 서장관이 되어 수행하면서 야심가로 변모한다. 수양대군은 연경에서 사은사의 임무를 마친 뒤 신숙주를 데리고 영락제(永樂帝)가 묻힌 장릉(長陵)을 찾아갔다. 영락제는 명 태조 주원장의 넷째 아들로 장조카인 혜제(惠帝)가 등극하자, 그를 죽이고 황제가 된 인물. 영락제는 “나의 패륜은 세월이 흐르면 잊혀지겠지만, 위업은 역사에 오래도록 기록될 것”이라고 말했다는데, 그들이 장릉 앞에 엎드린 것은 암시하는 바가 크지 않을 수 없다.
어린 단종이 폐위되자, 역모에 가담한 신숙주는 높은 벼슬을 거쳐 세조 8년에는 영의정에 오른다. 그러나 정상에 이르면 반드시 내려와야 하는 법. 성종 6년(1475) 59살에 이르러 병이 위독해지자 왕이 승지를 그에게 보내 뒷일을 물으니, 북방 방비가 소홀하니 급히 조치하라고 아뢴 뒤 “장례를 박하게 지내고 서적을 함께 묻어달라. 불가의 법을 쓰지 말라”고 유언했다.
‘보한재집’ ‘북정록’ ‘해동제국기’와 ‘사성통고’ ‘국조오례의’ ‘세조실록’ ‘고려사절요’ 등 수많은 서적을 편찬한 업적을 남겼지만, 그를 문득문득 괴롭히는 내상(內傷)은 유학자로서 절의를 지키지 못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는 영욕(榮辱)이 묻을 수 없는 맑은 차 한 잔을 마시며 눈 속에 매화꽃이 피는 고향을 그리워하지 않았을까.
봉분은 말이 없다. 아내 윤씨의 봉분이 오른쪽에 있고, 쌍분 좌우에는 문인석이, 묘역 하단 오른쪽에는 성종8년 이승소가 찬(讚)한 신도비가 적적하게 서 있을 뿐이다.
가는 길
경기 의정부역에서 43번 국도를 타고 청학리 방향으로 15분쯤 가다보면 의정부교도소가 나오고 맞은편에 ‘신숙주 선생의 묘’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고산초등학교를 지나 구성말로 가다보면 왼쪽에 있다.‘영욕의 유학자’ 신숙주의 묘. 부인 윤씨의 봉분과 나란히 있다.
도갑산 절 작설차와/ 옹기마을 울타리에 떨어진 눈 속의 매화꽃은/ 마땅히 내게 고향 생각의 뜻을 알게 하니/ 남쪽 고을 옛일들이 떠올라 기뻐하노라(道岬山寺雀舌茶 瓮村籬落雪梅花 也應知我思鄕意 說及南州故事多).
이 시는 신숙주의 증조할아버지가 나주 옹촌(瓮村)에서 살 때 친교를 맺었던 영암 출신인 도갑사 수미(壽眉) 스님이 한양의 신숙주를 찾아온 다음날 지은 것이라고 한다. 신숙주는 수미 스님이 보내준 작설차를 오래 마셨을 터인데, 고향집의 눈 쌓인 울타리에 떨어진 매화꽃을 잊지 못하는 그의 낭만에 나그네는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안목으로 신숙주는 ‘보한재집’에 안평대군이 소장한 222축(軸, 두루마리)의 서화를 비평한 화기(畵記)를 남기지 않았나 싶다. 대단한 예술 비평인 셈이다. 그러나 한글 창제와 여진 토벌 공로 및 탁월한 경륜으로 6대 왕을 섬겼는데도 세조의 왕위 찬탈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숙주나물보다 못한 변절자’로 평가받아왔다.
‘보한재집’ 등 수많은 서적 편찬
신숙주는 조선 태종 17년(1417) 나주에서 태어나 7살에 대제학 윤회의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16살에 윤회의 손녀와 혼인한다. 23살 때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해 전농직장(典農直長)이란 종7품 벼슬을 시작으로 집현전 부수찬, 부제학 등을 역임하다 문종 2년에 동갑지기인 수양대군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갈 때 서장관이 되어 수행하면서 야심가로 변모한다. 수양대군은 연경에서 사은사의 임무를 마친 뒤 신숙주를 데리고 영락제(永樂帝)가 묻힌 장릉(長陵)을 찾아갔다. 영락제는 명 태조 주원장의 넷째 아들로 장조카인 혜제(惠帝)가 등극하자, 그를 죽이고 황제가 된 인물. 영락제는 “나의 패륜은 세월이 흐르면 잊혀지겠지만, 위업은 역사에 오래도록 기록될 것”이라고 말했다는데, 그들이 장릉 앞에 엎드린 것은 암시하는 바가 크지 않을 수 없다.
어린 단종이 폐위되자, 역모에 가담한 신숙주는 높은 벼슬을 거쳐 세조 8년에는 영의정에 오른다. 그러나 정상에 이르면 반드시 내려와야 하는 법. 성종 6년(1475) 59살에 이르러 병이 위독해지자 왕이 승지를 그에게 보내 뒷일을 물으니, 북방 방비가 소홀하니 급히 조치하라고 아뢴 뒤 “장례를 박하게 지내고 서적을 함께 묻어달라. 불가의 법을 쓰지 말라”고 유언했다.
‘보한재집’ ‘북정록’ ‘해동제국기’와 ‘사성통고’ ‘국조오례의’ ‘세조실록’ ‘고려사절요’ 등 수많은 서적을 편찬한 업적을 남겼지만, 그를 문득문득 괴롭히는 내상(內傷)은 유학자로서 절의를 지키지 못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는 영욕(榮辱)이 묻을 수 없는 맑은 차 한 잔을 마시며 눈 속에 매화꽃이 피는 고향을 그리워하지 않았을까.
봉분은 말이 없다. 아내 윤씨의 봉분이 오른쪽에 있고, 쌍분 좌우에는 문인석이, 묘역 하단 오른쪽에는 성종8년 이승소가 찬(讚)한 신도비가 적적하게 서 있을 뿐이다.
가는 길
경기 의정부역에서 43번 국도를 타고 청학리 방향으로 15분쯤 가다보면 의정부교도소가 나오고 맞은편에 ‘신숙주 선생의 묘’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고산초등학교를 지나 구성말로 가다보면 왼쪽에 있다.‘영욕의 유학자’ 신숙주의 묘. 부인 윤씨의 봉분과 나란히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