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가을 김포공항. 서울발 타이페이행 항공기가 이륙을 위해 굉음을 내며 시동을 거는 순간 정장 차림의 남자들이 기내로 들이닥쳤다. 이 남자들은 바로 한 승객에게 다가섰다. “이쪽으로 오시죠.” 삼성전자의 핵심 반도체 기술을 250만 달러를 받고 대만 기업에 넘기려던 산업스파이인 이 승객이 “무슨 일이신데요”라고 반문했지만 표정은 이내 일그러졌다.
간발의 차이였다. “용의자들이 대만으로 뜬다”는 정보를 정보당국이 입수한 시각은 이날 아침. 공항에 연락을 취했을 때는 용의자들이 이미 출국 게이트를 빠져나간 뒤였다.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는 국내 톱 프로그래머 20여명이 삼성전자의 핵심기술을 빼돌리려 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수개월 동안 내사를 벌이던 중이었다.
“이게 뭡니까? 다 끝났습니다.”
정보기관 요원들이 점퍼 안주머니에서 하드디스크를 찾아내자 남자는 비로소 고개를 떨궜다. 하드디스크엔 삼성전자의 첨단 기술이 복사돼 켜켜이 담겨 있었다.
핵심기술 유출 시도 갈수록 증가
삼성전자 산업스파이 사건은 훔쳐올 줄만 알았지 빼앗길 줄은 몰랐던 한국에 산업스파이의 폐해를 일깨워준 첫 사건이다. 이 사건을 신호탄으로 한국은 산업스파이들의 주요 활동무대가 됐다. 특히 최근엔 한국을 먹여살리는 반도체 IT(정보기술) 휴대전화 조선 등 국가 전략산업이 기술사냥꾼들의 표적이 되고 있다.
국정원에 따르면 1998년부터 올 4월까지 적발된 산업스파이 범죄가 총 45건에 달하고, 45건의 국부 손실 예방 액수는 국정원 및 업계 추산으로 무려 38조원에 이른다. 은밀하게 이뤄지는 산업스파이 활동의 성격으로 미뤄볼 때 정보당국의 안테나를 비껴간 산업스파이 사건은 적발 건수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정보망에 포착되는 산업스파이 사건의 특징은 막대한 피해가 뒤따르는 ‘핵심기술’의 유출 시도가 갈수록 늘고 있다는 점이다. 휴대전화 제조업체 S사의 한 임원은 “휴대전화 제조 기술에서 중국과의 격차가 1년 6개월에서 2년 정도로 줄어든 것은 80%가 산업스파이 탓이다”고 말했다.
대기업 계열 A사의 Y상무는 아예 별도의 회사까지 세워놓고 휴대전화 기술을 빼돌렸다. 시험용 휴대전화와 휴대전화 핵심기술을 빼돌려 해외에 유출하려던 Y씨의 행태를 회사 측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Y씨는 A사에 근무하면서 연구개발 업체인 E사를 은밀하게 운영했고 대담하게도 A사의 연구원 수명을 E사로 보내 일을 돕게 하기도 했다. Y씨의 행적이 국정원에 꼬리가 잡히지 않았다면 A사는 약 4000억원의 손실을 입어야 했다.
산업스파이들은 보통 기술을 갖고 전직하면 주택 승용차 돈 승진 스톡옵션 등을 주겠다면서 연구원들을 꼬드긴다고 한다.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이후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지면서 최근엔 회사의 핵심기술로 전직을 노리거나 일확천금을 얻으려는 자발적인 산업스파이도 늘어나는 추세다.
휴대전화 제조업체 B사의 H연구원은 해외업체인 T사의 한국 딜러에게 포섭됐다. “휴대전화용 컬러모듈 기술을 제공하면 승진을 보장하고 억대의 연봉을 주겠다”는 T사 측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H연구원은 B사가 개발한 휴대전화용 컬러모듈 설계도면을 이메일을 통해 유출하려다 적발됐다. 4조3000억원 상당의 국부가 날아갈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IMT2000의 핵심기술을 빼돌리려다 적발된 국책연구소 K연구원과 공범 3명도 비슷한 경우. 이들은 해외업체 Q사로부터 이직 제의를 받고 기술자료 1500건을 PC로 다운받는 수법으로 기술을 빼돌린 뒤 유유히 인천공항을 빠져나갔다. 현지에서 Q사와 연봉 협상을 벌이던 이들은 Q사 측이 당초 예상했던 액수보다 낮게 부르자 국내에 남아 있던 공범들과 함께 휴대전화 제조업체 N사에 이 기술을 건네주다 꼬리가 잡혔다.
반도체 제조업체 C사의 W연구원은 자발적으로 연구원에서 산업스파이로 옷을 갈아입은 경우. 그는 외국 경쟁사에 취업할 때 활용하기 위해, C사가 4070억원을 투입해 개발한 반도체 핵심기술 자료를 비롯해 반도체 공정 기술 전체를 망라하는 방대한 자료를 회사 몰래 유출해 은닉하다 올 1월 포위망에 걸려들었다. W연구원은 기술을 팔아넘길 해외업체를 물색 중이었다고 한다.
국정원 관계자는 “최근 D전자 연구원들이 ‘투자금액의 100배를 번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회사 기술을 빼돌려 해외에 회사를 세우겠다고 모의하고 사업계획서를 회사 내 개인 컴퓨터에 저장해놓았다 적발된 일도 있었다”면서 “직원들이 회사나 자신의 미래가 불안하다고 느낄 때 D전자 같은 사건이 벌어진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국정원은 산업스파이를 어떻게 추적하는 것일까. 국정원이 산업스파이를 쫓는 루트는 크게 세 가지. 제보, 인지, 기획이 바로 그것이다.
한창 벤처기업 열풍이 불 때는 테헤란로의 술집만 돌아도 산업스파이에 대한 첩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안면 있는 마담들과 대화를 나누다 “S사 기술로 뭘 한다고 하던대요”라는 식의 정보를 심심찮게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마담에게서 당시 참석자의 명함을 넘겨받아 산업스파이 추적에 나서는 것이다.
최근 수원지검 성남지청이 발표한 J사 산업스파이 사건도 검찰은 뒤처리만 했을 뿐 기실은 국정원이 3개월 동안의 추적 끝에 사건의 전모를 파악한 것이다. J사 사건은 인지수사의 전형. 추적은 “실력이 좋은 직원들이 특별한 이유 없이 퇴직하려 한다”는 국정원 관계자의 첩보에서 비롯됐다. J사 전 임원 S씨 등은 LCD용 핵심기술을 경쟁사인 미국 AMAT사에 넘기려 했다는 혐의로 4월28일 검찰에 의해 구속됐다.
중소기업 71% “보안이 뭔데?”
기획수사는 주로 국정원 해외주재 요원들이 보내온 해외 산업정보를 바탕으로 시작된다. 중국이나 대만 등에서 특정 기술이 개발되고 있다는 정보가 전해지면 관련 한국기업에서 기술이 넘어간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관련된 국내 기업 리스트를 뽑는다. 그리고 ‘지우개 방식’으로 혐의가 없는 기업을 하나씩 지워나가면서 실마리를 찾아나간다. 국정원 관계자는 “산업스파이 색출에서 국정원이 검찰 경찰보다 월등히 우위에 있는 것은 해외 조직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심각한 문제는, 국정원의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산업스파이 활동은 날로 지능화하는 반면 국내 기업들은 사실상 뒷문을 열어놓고 있다는 점이다. 국정원의 산업스파이 색출 역시 ‘사람 정보’ 중심이어서 외국 정보기관이나 해킹에 의한 기술 유출, 외국계 합작법인이나 외국계 컨설팅회사를 통한 기술 유출엔 한계를 드러낸다.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면 산업스파이를 자체적으로 막아낼 보안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곳은 손에 꼽을 정도다.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가 최근 394개사 민간기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보안담당 부서를 둔 기업은 13%에 그쳤다. 또 중소기업의 71%가 산업기밀 보호 규정조차 갖추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산업스파이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는 것이다.
대학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국정원은 4월 초 세계적인 한국인 과학자 A씨의 연구실을 컨설팅했는데, 허술한 보안에 혀를 찼다고 한다. 대학 서버를 사용하는 연구실 컴퓨터는 해킹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었고 연구원들의 보안의식 또한 빵점 수준이었다. 국정원 관계자는 “기업이나 연구진들의 보안의식이 근본적으로 개혁되지 않는 한 사후 단속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간발의 차이였다. “용의자들이 대만으로 뜬다”는 정보를 정보당국이 입수한 시각은 이날 아침. 공항에 연락을 취했을 때는 용의자들이 이미 출국 게이트를 빠져나간 뒤였다.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는 국내 톱 프로그래머 20여명이 삼성전자의 핵심기술을 빼돌리려 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수개월 동안 내사를 벌이던 중이었다.
“이게 뭡니까? 다 끝났습니다.”
정보기관 요원들이 점퍼 안주머니에서 하드디스크를 찾아내자 남자는 비로소 고개를 떨궜다. 하드디스크엔 삼성전자의 첨단 기술이 복사돼 켜켜이 담겨 있었다.
핵심기술 유출 시도 갈수록 증가
삼성전자 산업스파이 사건은 훔쳐올 줄만 알았지 빼앗길 줄은 몰랐던 한국에 산업스파이의 폐해를 일깨워준 첫 사건이다. 이 사건을 신호탄으로 한국은 산업스파이들의 주요 활동무대가 됐다. 특히 최근엔 한국을 먹여살리는 반도체 IT(정보기술) 휴대전화 조선 등 국가 전략산업이 기술사냥꾼들의 표적이 되고 있다.
국정원에 따르면 1998년부터 올 4월까지 적발된 산업스파이 범죄가 총 45건에 달하고, 45건의 국부 손실 예방 액수는 국정원 및 업계 추산으로 무려 38조원에 이른다. 은밀하게 이뤄지는 산업스파이 활동의 성격으로 미뤄볼 때 정보당국의 안테나를 비껴간 산업스파이 사건은 적발 건수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정보망에 포착되는 산업스파이 사건의 특징은 막대한 피해가 뒤따르는 ‘핵심기술’의 유출 시도가 갈수록 늘고 있다는 점이다. 휴대전화 제조업체 S사의 한 임원은 “휴대전화 제조 기술에서 중국과의 격차가 1년 6개월에서 2년 정도로 줄어든 것은 80%가 산업스파이 탓이다”고 말했다.
대기업 계열 A사의 Y상무는 아예 별도의 회사까지 세워놓고 휴대전화 기술을 빼돌렸다. 시험용 휴대전화와 휴대전화 핵심기술을 빼돌려 해외에 유출하려던 Y씨의 행태를 회사 측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Y씨는 A사에 근무하면서 연구개발 업체인 E사를 은밀하게 운영했고 대담하게도 A사의 연구원 수명을 E사로 보내 일을 돕게 하기도 했다. Y씨의 행적이 국정원에 꼬리가 잡히지 않았다면 A사는 약 4000억원의 손실을 입어야 했다.
산업스파이들은 보통 기술을 갖고 전직하면 주택 승용차 돈 승진 스톡옵션 등을 주겠다면서 연구원들을 꼬드긴다고 한다.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이후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지면서 최근엔 회사의 핵심기술로 전직을 노리거나 일확천금을 얻으려는 자발적인 산업스파이도 늘어나는 추세다.
`반도체 스파이` 수사에 나선 검찰 수사관이 압수한 하드디스크 등을 들어 보이고 있다.
IMT2000의 핵심기술을 빼돌리려다 적발된 국책연구소 K연구원과 공범 3명도 비슷한 경우. 이들은 해외업체 Q사로부터 이직 제의를 받고 기술자료 1500건을 PC로 다운받는 수법으로 기술을 빼돌린 뒤 유유히 인천공항을 빠져나갔다. 현지에서 Q사와 연봉 협상을 벌이던 이들은 Q사 측이 당초 예상했던 액수보다 낮게 부르자 국내에 남아 있던 공범들과 함께 휴대전화 제조업체 N사에 이 기술을 건네주다 꼬리가 잡혔다.
반도체 제조업체 C사의 W연구원은 자발적으로 연구원에서 산업스파이로 옷을 갈아입은 경우. 그는 외국 경쟁사에 취업할 때 활용하기 위해, C사가 4070억원을 투입해 개발한 반도체 핵심기술 자료를 비롯해 반도체 공정 기술 전체를 망라하는 방대한 자료를 회사 몰래 유출해 은닉하다 올 1월 포위망에 걸려들었다. W연구원은 기술을 팔아넘길 해외업체를 물색 중이었다고 한다.
국정원 관계자는 “최근 D전자 연구원들이 ‘투자금액의 100배를 번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회사 기술을 빼돌려 해외에 회사를 세우겠다고 모의하고 사업계획서를 회사 내 개인 컴퓨터에 저장해놓았다 적발된 일도 있었다”면서 “직원들이 회사나 자신의 미래가 불안하다고 느낄 때 D전자 같은 사건이 벌어진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국정원은 산업스파이를 어떻게 추적하는 것일까. 국정원이 산업스파이를 쫓는 루트는 크게 세 가지. 제보, 인지, 기획이 바로 그것이다.
한창 벤처기업 열풍이 불 때는 테헤란로의 술집만 돌아도 산업스파이에 대한 첩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안면 있는 마담들과 대화를 나누다 “S사 기술로 뭘 한다고 하던대요”라는 식의 정보를 심심찮게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마담에게서 당시 참석자의 명함을 넘겨받아 산업스파이 추적에 나서는 것이다.
최근 수원지검 성남지청이 발표한 J사 산업스파이 사건도 검찰은 뒤처리만 했을 뿐 기실은 국정원이 3개월 동안의 추적 끝에 사건의 전모를 파악한 것이다. J사 사건은 인지수사의 전형. 추적은 “실력이 좋은 직원들이 특별한 이유 없이 퇴직하려 한다”는 국정원 관계자의 첩보에서 비롯됐다. J사 전 임원 S씨 등은 LCD용 핵심기술을 경쟁사인 미국 AMAT사에 넘기려 했다는 혐의로 4월28일 검찰에 의해 구속됐다.
중소기업 71% “보안이 뭔데?”
기획수사는 주로 국정원 해외주재 요원들이 보내온 해외 산업정보를 바탕으로 시작된다. 중국이나 대만 등에서 특정 기술이 개발되고 있다는 정보가 전해지면 관련 한국기업에서 기술이 넘어간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관련된 국내 기업 리스트를 뽑는다. 그리고 ‘지우개 방식’으로 혐의가 없는 기업을 하나씩 지워나가면서 실마리를 찾아나간다. 국정원 관계자는 “산업스파이 색출에서 국정원이 검찰 경찰보다 월등히 우위에 있는 것은 해외 조직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심각한 문제는, 국정원의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산업스파이 활동은 날로 지능화하는 반면 국내 기업들은 사실상 뒷문을 열어놓고 있다는 점이다. 국정원의 산업스파이 색출 역시 ‘사람 정보’ 중심이어서 외국 정보기관이나 해킹에 의한 기술 유출, 외국계 합작법인이나 외국계 컨설팅회사를 통한 기술 유출엔 한계를 드러낸다.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면 산업스파이를 자체적으로 막아낼 보안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곳은 손에 꼽을 정도다.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가 최근 394개사 민간기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보안담당 부서를 둔 기업은 13%에 그쳤다. 또 중소기업의 71%가 산업기밀 보호 규정조차 갖추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산업스파이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는 것이다.
대학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국정원은 4월 초 세계적인 한국인 과학자 A씨의 연구실을 컨설팅했는데, 허술한 보안에 혀를 찼다고 한다. 대학 서버를 사용하는 연구실 컴퓨터는 해킹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었고 연구원들의 보안의식 또한 빵점 수준이었다. 국정원 관계자는 “기업이나 연구진들의 보안의식이 근본적으로 개혁되지 않는 한 사후 단속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