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를 처음 시작하는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을 둔 부모는 영어방문학습지를 ‘필수’로 생각한다(위). 영어교육박람회 현장.
피아노나 수영이야 취미를 위한 선택사항이라 해도 영어가 생계와 직결된다는 말이 상식이 된 ‘세계화 시대’인지라 웬만큼 귀가 두꺼운 학부모라 해도 영어교육 앞에선 흔들리기 쉽다. 더구나 요즘 초등학교 교문 앞에는 병아리 팔던 아주머니 대신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영어학습지 ‘상담선생’들이 나와 아이들 고객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쑥쑥닷컴’ 등 조기 영어교육 학부모들의 사이트에서도 어떤 학습지나 영어교재가 좋은지 논란이 한창이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 첫딸을 입학시킨 초보 학부모 이인자씨도 같은 고민에 빠졌다. 입학한 지 며칠이 안 되었을 때 첫딸이 하굣길에 A영어방문학습지 상담선생을 만나 전화번호를 알려주었고, 이후 집요하게 이씨에게 전화를 걸어 영어교육의 필요성과 ‘놀라운 효과’를 보장하는 설득에 못 이겨 결국 아이에게 영어학습을 시키게 됐다. 이 회사에서 나온 교재와 오디오테이프로 집에서 공부하고 관리선생이 일주일에 한 번씩 방문을 하는 방식이다. 이씨는 “결정을 하기 전에 아이 친구들의 경우를 알아보니 ‘과외는 안 시킨다’던 엄마들도 ‘영어는 필수라 과외로 치지 않는다’면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어서 충격을 받았다”고 말한다.
또 다른 초등학교에 둘째 딸을 입학시킨 최모씨는 아이에게 A영어방문학습지의 경쟁사인 B영어방문학습지 교육을 시작했다. 초등학교 3학년인 큰아들이 1년 넘게 B를 해서 좋은 결과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최씨는 “아이가 지겨워해도 꾸준히 같이 오디오테이프를 듣는 척이라도 했다. 막상 3학년 영어 교과서를 보니 기초가 없으면 따라가기 어려운 수준이었다”며 “경제가 어렵지만 영어만큼은 투자해야 한다고 각오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A나 B의 교재를 비교해본 적은 없지만 비슷하지 않겠나. 관리선생님이 마음에 들어서 B를 선택했다”고 밝혔다.
영어 동화책 읽기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학원에서 사용하는 동화 베스트셀러의 저자 에릭 칼은 우리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작가.
백가쟁명 교육과정과 교재
방문학습지 회사마다 내세우는 교육방식도 다양하고 교수법도 없는 것이 없다고 할 정도다. 교육방식은 길게는 몇 년 단위로 유행이 바뀌지만, 회사마다 판촉을 위한 프로젝트는 대개 수개월 주기로 바뀐다. 프로젝트는 언제나 ABC, DEFG처럼 뜻을 알기 어려운 영어 약자가 붙어 있어 학부모들의 마음을 약하게 만든다.
영어학습지 외에 최근 서울 강남과 목동, 분당 등 교육열과 소득 수준이 높은 지역에서 인기 있는 프로그램은 영어동화읽기다. ‘킴앤존슨 영어교육센터’, ‘더 랩’ 등이 영어동화읽기 수업으로 유명하고 ‘○○북클럽’ ‘△△랜드’ 같은 이름의 영어교육 학원들도 교사가 소규모 인원에게 영어로 된 동화책을 보여주면서 영어를 가르치는 곳이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빠르게 늘고 있는 ‘○○영어 홈스쿨’ 등도 영어 원어민 교사가 일주일에 1~2회 회화와 영어 스토리로 영어교육을 하는 곳들이다.
이처럼 다양한 교수법과 프로그램에 대해 각각의 사교육기관들은 똑같이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는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라는 이유를 내세운다. 대표적인 영어전문 방문학습지로 경쟁관계인 윤선생영어교실과 튼튼영어도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상황’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설명한다.
스카이라이프의 유아 대상 영어교육 프로그램 ‘해피송’(왼쪽)과 요리를 통해 영어를 배우는 호텔 이벤트.
‘윤선생영어교실’ 홍보팀 양인자 과장은 “우리나라에 적합하게 개발한 파닉스 방식에 따르면 원어민 못지않은 발음을 하게 되고 학습에도 흥미를 갖게 된다”고 말한다.
이에 비해 후발주자인 ‘튼튼영어’는 ‘전체언어교습법(the whole language)’에 무게를 두고 ‘연상력 완성’ 교수법을 내세운다. 조기 영어교육에선 ‘파닉스’ 같은 문법이나 철자가 아니라 소리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윤선생영어교실의 기초교재 제목이 ‘파닉스 어드벤처’인 데 비해 튼튼영어의 ‘튼튼영어 주니어’는 간단한 스토리와 상황을 ‘충분히, 집중하여, 하염없이’ 듣도록 하는 방식이다.
두 회사의 광고를 보면 은근히 상대 교수법에 대한 비판이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일선의 상담, 관리교사들은 학부모의 마음을 잡기 위해 ‘파닉스’ 방식과 ‘전체언어교습법’의 장점과 단점을 노골적으로 강조한다. ‘윤선생영어교실’ 관리교사는 “우리나라 사람 같은 외국인이 전체언어교습법으로 영어를 배우면, 문자능력을 묶어두어 나중엔 듣고 기억하는 영어문장 외에는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고 주장하고, ‘튼튼영어’ 관리교사는 “파닉스는 단어를 읽는 기술이라 처음엔 실력이 눈에 띄게 느는 것 같지만 딱딱해서 아이들이 곧 싫증을 낸다”고 주장한다.
‘파닉스’를 강조하는 쪽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이상 영어에 늘 노출된다는 건 불가능하다. 따라서 모국어 구조를 습득한 이후 영어를 파닉스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고, ‘전체언어교습법’을 시행하는 쪽에서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므로 모국어를 익히듯 최대한 많이 들려줘야 한다”는 논리로 맞선다.
이완기 서울교대 영어교육과 교수는 “파닉스나 전체언어교습법이나 실제로 언어를 쓰는 상황을 배려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다. 현실에선 배우고 외운 대로만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런 문제를 ‘윤선생영어교실’이나 ‘튼튼영어’에서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최근엔 양쪽 모두 부족한 부분을 보완한 내용과 수업방식을 찾아가고 있다. ‘파닉스’에 연상적인 상황이나 상상력을 요구하는 스토리를 추가한 ‘통합식 학습법’을 내놓았고, ‘전체영어교습법’에도 파닉스 단계를 연결시킨다. 이외에 다른 영어방문학습지들도 대개 ‘파닉스’와 ‘전체영어교습법’을 혼합해 다른 이름으로 쓰고 있으므로 꼼꼼히 살펴보면 어느 쪽에 비중을 두고 있는지, 어떻게 섞었는지 알 수 있다.
‘파닉스’와 ‘전체언어교습법’을 비교해보면 ‘파닉스’는 어느 정도의 이해력이 갖춰진 나이에 시작하는 것이 효과적이고, ‘전체언어교습법’은 영유아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데 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영어교육을 처음 시작하는 6~8살 나이는 아이 개개인의 능력과 개성에 따라 ‘파닉스’가 더 효과적일 수도 있고, ‘전체언어교습법’이 더 잘 맞을 수도 있는 시기다. 학부모들의 혼란이 커지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내 아이를 잘 아는 것이 조기 영어교육에 성공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인 것이다.
우리나라 상류층에서 영어유치원으로 명성을 날린 ‘밤비니 영어교육센터’나 영어조기교육 선구자로 꼽히는 ‘킴앤존슨 영어센터’는 유아단계에서 ‘전체언어교습법’을 시작하여 나이에 맞는 수준의 ‘파닉스’를 적용한다는 것을 장점으로 내세운다. 박동석 ‘밤비니 영어교육센터’ 실장은 “유아기에 전체언어교습법으로 시작해 5살부터 나이에 맞는 파닉스를 시작하고 6~7살이 되면 문법이 70% 정도 된다. 그러나 영어완전정복이 아니라 언어 능력을 배양한다는 수준이다. 사실 제일 열심히 교육해야 할 대상은 부모님들이다”라고 말한다.
금소영 ‘킴앤존슨 영어연구소’의 소장은 “아이들의 나이와 능력에 맞게 파닉스와 전체언어교습법을 적절히 맞춰줄 수 있는 발란스트 어프로치가 최근 각광받는다. 대개 방문학습지들도 이를 따르는 추세다. 그러나 전체언어교습법이나 발란스트 어프로치가 성공하려면 교사들의 능력이 매우 우수하고, 학습자 개개인에 다르게 적용해야 하며, 다양한 교구와 부교재가 갖춰져야 한다. 그것이 이 방식의 성패를 결정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 사람이 60~70명을 관리하는 방문학습지 교사의 경우 영어 전공자는 찾기 어려울 정도고, 회사에서 시킨 매뉴얼대로 왔다 가는 무성의한 교사가 허다한 것이 사실이다. 학부모들이 교습법이나 아이들 개개인의 차이를 논하기보다 ‘운좋게 선생을 잘 만나면 영어교육에 성공한다’는 것을 진리로 믿고 있는 이유다.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려는 부모들의 욕심은 조기 영어교육 시장을 최소 3조원의 거대한 규모로 키워놓았다. 이처럼 학부모를 볼모로 삼고 아이들을 모르모트로 삼은 조기 영어교육 광풍에 반발해 극단적인 무용론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조기 영어교육이 “우리말과는 전혀 다른 언어체계와 사고방식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완기 교수)이나 “아이들의 인지, 정서, 사회성 발달에 맞는 영어 환경을 마련해주는 것”(금소영 소장)이라면 나쁠 이유가 없다.
“어른들의 가장 큰 착각은 유아기에 영어를 잘하면 커서도 잘한다는 것과, 영어는 고생하며 배우는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어를 어려서 억지로 배우면 평생 주눅이 든다. 어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하면서 영어를 하지 못하면 낙오될 때 다시 새벽에 영어학원에서 고생하는 악순환이 반복될 뿐이다.”(이완기 교수)
이런 착각 때문에 학부모들은 아이가 영어 노래라도 하나 외우면 ‘우리 아이는 천재’라고 믿기도 하고, 아이가 배운 것을 까먹으면 ‘바보’라고 다그치는 위험한 행동을 하게 된다.
영어교육 전문가들의 더욱 큰 근심은 조기 영어교육이 워낙 민감한 비즈니스여서 공개적으로 커리큘럼에 대한 논의를 꺼리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회화와 게임 중심의 초등학교 3학년 커리큘럼은 많은 아이들이 수업을 하는 우리 현실에서 적당한 방법인가, 영어 교사들의 능력과 교구는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가, 조기 영어교육과 중·고교 영어수업은 어떤 연결고리를 갖고 있는가 등등 현실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많지만, 누구도 나서서 이를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너무 커진 사교육 시장과 민감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초보 학부모들은 조기 영어교육이라는 거대한 비즈니스의 새로운 소비자가 되기 전에 우리 아이가 다른 언어를 배울 준비가 됐는지, 그리고 학부모 스스로 조기 영어교육 전문가가 될 각오를 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이것은 소비재를 구입하는 방문판매 쇼핑과는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른이 되어 5분이면 외울 수 있는 몇 마디 구문을 위해 어린아이들을 너무 긴 시간, 너무나 냉정한 사교육 시장에 밀어넣는 잘못을 범할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