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역 주변지역이 첨단 국제업무 단지로 탈바꿈하면서 80여년을 유지해온 집창촌(윤락가)의 퇴출이 눈앞에 다가왔다.
“경찰이 잘못한 점이 있다면 살을 도려내겠습니다. 자해공갈단 행태를 보인 윤락업주와의 타협은 있을 수 없습니다.”(한풍현 용산경찰서장)
‘쥐’가 ‘고양이’를 공격한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해 정부가 ‘도심 집창촌(集娼村·속칭 사창가) 완전철거’를 목표로 내건 이후 예고된 일로, 일제시대 이래 계속돼왔다는 윤락업주(쥐)와 경찰(고양이) 간 공생관계가 파국을 맞고 있는 셈이다.
4월20일, 용산역 일대 윤락업주인 박모씨(41)는 경찰의 강압수사에 항거하는 의미로 용산경찰서 강력계에서 라이터기름을 얼굴에 끼얹고 불을 붙이는 이른바 분신시위를 벌였다. 이어 25일에는 이와 관련한 조사를 받은 또 한 명의 업주 남모씨(46)가 칼로 손목을 긋는 자해행위를 벌여 충격을 던졌다.
파문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화상을 입은 박씨는 용산역 부근에서 10년 이상 윤락관계 사업을 벌이며 만만찮은 인맥을 구축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용산서 강력계장 등이 우리를 근거 없이 마약혐의와 카드깡, 심지어 범죄조직 구성 등의 혐의로 엮어 넣으려 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어 박씨와 절친한 관계인 또 다른 윤락업주 남씨가 경찰과 윤락업주 사이의 ‘악어와 악어새 관계’를 증명하는 물증이라면서 지난 수년간의 경찰 상납 리스트를 공개했다. 막바지에 몰린 윤락업주가 경찰을 향해 선전포고를 한 셈이다.
사건의 발단은 윤락가 주변에 흔히 있는 단순 갈취 및 폭력 행위였다. 그러나 상납 리스트가 공개되자 용산서 관계자들은 “이에 대한 강도 높은 수사를 진행하자 윤락업주들이 이를 막아보기 위해 막가파식 공격을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쥐와 고양이 부적절한 공생 파국
파문이 커지자 윤락업주들은 증빙자료로 공개한 탄원서와 경찰 상납 리스트가 “근거 없는 단순 해프닝성 폭로였다”며 기존 입장을 철회하고 나섰다. 그러면서도 “실명 리스트로 인해 우리들과 끈끈한 관계를 맺어온 조무래기 경찰들만 다치게 생겨서 사실 확인 및 추가 공개를 거부한다”고 밝혔다. ‘조무래기’가 아닌 윗선에 대한 상납 리스트도 있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얘기여서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현재 용산서는 “업주들의 혐의에 대해 더욱 강도 높은 수사를 벌이겠다”고 다짐하고 있지만 리스트의 존재에 대해서는 부담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비록 리스트에 거론된 사안이 비교적 오래된 일(5~7년 전)이고, 최근의 상납은 단순한 회식비 지원에 그치고 있지만, 관행으로 알려진 ‘부적절한 관계’가 폭로됐기 때문이다.
물론 윤락업주의 경찰 상납비리 문제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티켓다방과의 전쟁으로 잘 알려진 김강자 전 서장 역시 1999년 미아리 텍사스를 담당하는 서울 종암경찰서장에 부임하자마자 큰 곤욕을 치러야 했다. 검찰 수사 과정에서 경찰 50여명에 대한 윤락업주의 정기적인 상납 기록이 담긴 수첩이 발견됐기 때문.
그러나 이번 사건이 더욱 충격적인 이유는 윤락업주가 먼저 경찰에 상납한 사실을 언론에 공개했고, 이를 ‘무기’로 경찰과 타협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윤락업주 박씨는 분신 직후 용산서장을 찾아가 “용산서에 몸담고 있는 사람 중 내 돈 안 먹은 경찰은 없다”고 ‘협박’하며 자신을 수사하고 있는 강력계장 교체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 대상자가 수사 주체의 교체를 요구하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여성단체에서는 “윤락을 벌이는 범법자들이 경찰을 우습게 여기는 세태는 과거 윤락행위를 수수방관했던 경찰의 자업자득”이라며 “이 기회에 확실하게 그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서는 용산역 일대 윤락업주들이 이처럼 강경하게 나온 데는 경찰 수사가 직접적인 원인이었지만 근본적인 배경은 다른 곳에 있다고 입을 모은다. 집창촌에 대한 뉴타운식 재개발 정책이 바로 그것이다.
서울의 대표적인 저개발 지역으로 남아 있는 용산역 앞 집창촌 전경.
그동안 윤락업계는 줄곧 성장세를 유지해왔다. 아무리 ‘윤락행위방지법’이 강화되고 윤락여성들의 권리의식이 높아졌다고 해도 이런 흐름을 막지는 못했다. 그런데 구도심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던 집창촌을 대상으로 한 이른바 뉴타운식 ‘재개발’ 정책이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는 분석이다.
현재 전국 대도시 중심부에 미개발 상태로 남아 있는 서울 미아리텍사스 및 청량리588, 인천 학익동, 대구 자갈마당, 부산 완월동 등의 집창촌을 첨단 도심지역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다. 용산역 재개발의 핵심으로 떠오른 용산역 전면부지 역시 재개발사업 구역지정안이 통과돼 사업 시행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곳에는 2006년까지 33~ 35층 규모의 사무용 빌딩과 판매시설, 스포츠센터 등이 들어서는 국제업무 단지가 조성될 계획이다.
서울시는 집창촌을 재개발 구역으로 선(先) 지정하여 땅값을 상승시키고, 용적률을 통상적인 500%보다 획기적으로 높은 800%로 허가하여 땅 주인들과 건설사들에 높은 수익성을 보장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이로써 용산역사 주변지역 땅값의 경우 최고 평당 4000만원까지 급등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비싼 권리금을 물고 윤락업에 뛰어들었는데, 개발 바람에 밀려 이를 제대로 회수하지도 못하고 쫓겨날 상황이 된 게 이들 윤락업주들의 ‘막가파’식 행동을 부추긴 원인이 아닌가 하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집창촌 유지 집단 행동 돌입
사실 윤락업주들은 이미 재개발 문제에 대해 집단 행동에 돌입한 상태였다. 현재 전국 윤락업주들은 각각 자기 구역에서 ‘재건축 대책위원회’를 결성해 집단 행동에 나섰으며, 전국적 규모의 연합단체인 ‘한 터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하 한터)을 결성해 ‘사유재산권에 대한 헌법소원’ ‘공창제 도입을 위한 여론조사’ 등 집창촌 유지를 위한 연대활동에 들어갔다. 이는 갈등의 배경이 결국 보상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절반이 문을 닫고 나갔습니다. 윤락 여성에게 선불금(6000만원) 줬다가 떼이기도 했습니다. 조직폭력배는 물론 마약도 없는데 무리한 수사로 괴롭히지 말고 업주들이 빨리 벌어 이 업계에서 손을 뗄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용산 윤락업주 L씨)
현재 용산역 일대 윤락업소의 경우 1980~90년대에 한몫 잡은 사람들은 이미 자리를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의 업주들은 이들에게 1억~3억원의 권리금을 주고 영업권을 인수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것. 이들 입장에서는 개발이익에 따른 ‘보상금’이라도 받아내겠다며 버티고 있는 셈이다. 강현준 ‘한터’ 사무국장은 “사유재산에 대해 이렇게 강도 높은 탄압을 한 사례가 없다”며 “업종을 전환할 수 있는 유예기간과 보상을 충분하게 해주지 않는다면 전면투쟁도 불사하겠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들의 주장에 여성단체들은 크게 반발하고 있다. 여성단체 관계자들은 “도박의 판돈을 국가가 몰수하는 것처럼, 윤락업에 대한 권리금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서울 미아리에서 성매매 여성 인권운동을 펼치고 있는 김미령 자립지지공동체 대표는 “절도 행위가 만연해 있다고 절도죄를 용인할 수 없는 것처럼, 윤락행위를 필요악이라고 해서 ‘공창제’식의 타협안은 어불성설이다”고 말했다.
경찰과 윤락업주들의 커넥션 의혹이 다시 불거진 지금, 결국 관심의 초점은 경찰의 자정 의지에 모아진다. 한 젊은 경찰은 “사창가가 과거 인신매매, 마약 등 지하경제의 중심에 있었음에도 사회의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기 때문에 경찰은 윤락업주들을 ‘정보원’으로 삼았는데, 이제 시대가 변한 만큼 그런 관계는 더 이상 용납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도심 재개발로 집창촌이 도심에서 밀려나고 있는 지금, 경찰과 윤락업주들의 ‘부적절한’ 과거 관계가 서로를 겨누는 흉기로 돌변하여 한쪽의 굴복을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