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 한 대기업 국회 담당 인사는 “불법 대선자금 수사로 기업과 정치권이 한 덩어리로 지탄을 받는 상황에서도 정치자금을 요구하는 의원들의 ‘칭얼거림’은 여전하다”고 기자에게 불만을 털어놓았다. 최근 만난 정치권 인사의 얘기는 더욱 생생하다.
“일반 국민이나 언론의 주목을 끌지 못했지만 최근 특정 기업 오너에게 유리한 법안이 의원 입법으로 본회의를 통과한 적이 있었다. 입법이 완료된 뒤 이 의원과 해당 기업 간의 모종의 ‘딜’이 있었다. 의원이 관여하고 있는 비영리재단에 이 기업이 후원금을 제공한 것이었는데 그 금액이 억 단위가 넘는 것으로 안다.”
“정치자금 앞에는 의원 성향·여야 구분 없어”
이 인사는 “재단 후원금이 이 정도였다면 총선용으로 요구할 정치자금은 훨씬 높은 액수였을 것”이라며 “이처럼 기업과 개별 의원 간의 물밑 거래는 불법 대선자금 수사와 무관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건과 관련된 의원은 정치권에선 개혁성향 인사로 알려져 있다”며 “정치자금 앞에서는 해당 국회의원의 성향이 진보적이냐 보수적이냐, 여당이냐 야당이냐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수면에서는 몰아치는 광풍으로 인해 세상이 흔들릴 듯 요동치는데 물밑 세상은 과거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게 이들 정·재계 인사들이 전하는 이야기의 요점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힘깨나 있는 현역 의원들의 얘기다. 이번 총선에서 세대교체의 주역이 되겠다며 현장을 누비는 정치 신인들에게 앞서와 같은 사례는 먼 나라 얘기일 뿐. 오히려 불법 정치자금이 주요 뉴스를 장식하면서 신인들마저 뭉텅이로 ‘쓰레기’ 취급을 받는 게 억울하다는 눈치다.
현역 의원들의 ‘신인 기죽이기’도 여전하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이하 정개특위) 산하 기구로 현직 교수와 시민단체 인사 중심으로 구성된 범국민정치개혁협의회(이하 범개협)는 지난 연말 자신들의 중립적인 정치개혁안을 정개특위에 제출했다. 선거 120일 전부터 신인들의 선거운동을 보장하고, 선거 30일 이전까지인 현역 의원의 의정보고회 허용 시한을 선거 90일 이전으로 하며, 신인에게도 후원회를 허용하는 등 한마디로 정치 신인들의 선거운동 자유를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정개특위는 범개협의 정치개혁안을 거부해버렸다.
정치 신인의 진출을 가로막는 장벽은 정당 내부에도 있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 여야는 분권의 시대정신에 부합한다며 모두 상향식 공천을 당론으로 정했다. 1월 중순부터는 일부 정당을 중심으로 지역별 경선도 벌어질 예정이다. 그런데 문제는 개혁의 상징인 상향식 공천이 당원을 끌어 모을 재력이 있는 후보와 기존 지구당위원장, 현역 의원에게 유리한 제도로 변질되고 있다는 점이다. 돈, 조직 등 모든 면에서 떨어지는 신인들 사이에서는 “한쪽은 창을 들고 싸우는데 한쪽은 단검을 들고 맞서라는 격”이라며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다.
의원들의 합법적 정치자금 조달 창구인 국회의원 후원회에 몰린 차량들(위). 최근 열린 서울시내 한 정당의 지구당 창당대회 모습(아래).
과연 우리 정치의 후진성의 상징인 불법 정치자금으로부터 자유로운 새로운 국회의 탄생은 불가능할 것인가. 결과를 장담할 수는 없지만 새로운 시도를 하는 현장의 움직임은 분명히 있다.
한나라당 후보로 강원도 한 지역구에서 당내 경선을 준비 중인 문모씨(47). 그는 이번 총선에 나서기로 결심하고 지난 3년간 돈을 모았다. 대략 1억원. 문씨는 “내가 출마하려는 선거구의 법정 선거비용이 6000만원 가량인데 한나라당 후보가 된다면 법정비용 내에서 선거를 치러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문씨는 “21세기 선거는 더 이상 조직과 돈에 의존하는 선거가 돼서는 안 된다. 정책과 인터넷, 그리고 미디어로도 충분히 표를 얻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희망이 보이는 것은 지역의 노인들조차 ‘이제는 젊은 사람이 나서야 한다’고 격려할 정도로 세대교체가 대세로 굳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유권자의 격려는 돈보다 더 큰 힘이 된다”고 덧붙였다.
변하지 않은 현장 그러나 새로운 시도에 희망
문씨처럼 지방에서 출마하는 신인의 경우 몇 가지 보이지 않는 장점이 있다. 우선 건물 임대료가 싸다는 점. 문씨는 “조금의 보증금에 월세 50만원으로 지금의 사무실을 얻었는데 아주 훌륭하다. 서울이라면 엄두도 못 낼 넓고 쾌적한 사무실이 지방에는 널려 있다”고 말했다. 문씨는 얼굴 알리기를 위해 출판기념회도 열었는데 500만원 정도의 비용이 들었다고 한다. 또 다과 정도를 제공하는 조촐한 개소식도 열고 이런저런 행사를 치렀지만 부담될 만한 큰돈은 들지 않았다고 한다. 3명의 상근 직원에게 주는 급여를 포함해도 월 수백만원 정도에서 버텨가고 있다고 한다.
지방과 달리 서울 같은 대도시 출마자라면 자기 자본이 더 많아야 한다. 서울 지역구에서 열린우리당 당내 경선을 준비 중인 이모씨(40)는 “대도시 지역구 어디를 가봐도 이른바 ‘선거꾼’이라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이 돈 선거를 부추기는 주범”이라고 말했다. 그는 “서울시내 각 선거구에는 이들 선거꾼, 즉 선거브로커만 대략 200명 정도 된다. 선거 때만 되면 이 당 저 당을 옮겨다니면서 각종 모임을 만들어 그 자리에 출마자를 불러내 밥값을 계산하게 하면서 이를 통해 은근히 자기과시를 하는데, 이들 브로커의 유혹만 뿌리친다면 얼마든지 돈 안 드는 선거를 치를 수 있다”고 자신했다.
이씨는 “그러기 위해서는 후보자 스스로 욕먹을 각오를 해야 한다”며 “나 스스로는 이런 선거브로커와 상대 당 후보로부터 각각 한 말씩 욕을 먹겠다는 각오로 출전했다”고 말했다. 이씨의 경우 상근자 활동비를 포함해 월 1000만원 이상의 비용을 쓰고 있는데 “아무리 허리띠를 졸라매도 도시지역 출마자라면 이 정도 비용 지출은 각오해야 한다”고 귀띔했다.
돈 드는 선거는 하지 않겠다고 각오를 다지지만 정치 일선의 환경은 그리 녹록지 않다. 서울시내 선거구에 출마를 준비 중인 박모씨(43)는 “아무리 안 쓰려고 해도 대도시에 출마하는 이상 돈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가을부터 본격적으로 출마를 준비해온 박씨는 매일 아침 관내 아침운동 동호회를 순방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한다. 그런데 매일 아침 동호회 주변을 기웃거리는 것이 어색해 배드민턴 동호회에 가입해 활동 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렇게 가입한 배드민턴 동호회만 무려 10곳. 한 곳의 연간 회비가 10만원이니까 박씨는 배드민턴 동호회 회비로만 100만원을 지출한 셈이다. 또 신입회원 가입 인사를 겸해 해장국으로 아침식사를 대접했는데 그 비용이 회비보다 더 들었다. 이밖에 밥값으로만 지출하는 돈이 하루에도 수십만원에 이른다.
권노갑 전 의원의 현대 비자금 수수 관련 현장검증 장면.
상황이 이렇자 집단의 힘으로 돈 정치를 이겨보겠다는 논의도 있다. 서울지역에 출마하는 한 신인은 “여야 총선 후보가 모두 정해지는 2월 중순쯤, 소속 정당을 불문하고 돈 안 쓰는 선거와 정치개혁에 공감하는 신인들을 중심으로 연대모임을 만들 계획”이라며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돈 정치 근절에 앞장서겠다는 약속을 하면 국민들도 희망을 갖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구태의 악취가 사라지지 않은 가운데 돈 안 쓰는 정치를 해보겠다는 신인들의 결의가 뒤섞인 새해 벽두, 정치권에는 절망과 희망의 그림자가 교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