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승도 놀이
- 도표 속 전국 명승지 순례 … 재미와 지리 학습 ‘즐거운 만남’
람승도놀이에 쓰이는 말판과 윤목(아래).
옛 선조들은 어릴 때부터 여행문화를 가르쳐주는 ‘람승도놀이’라는 독특하고도 지혜로운 놀이를 즐겼다. 원래 ‘람승도(覽勝圖)’라는 말은 전국의 명승지를 유람하는 도표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도표에 명승지만 적혀 있는 것은 아니다. 전국 각 지역의 지명을 도표에 써넣어 돌아갈 수 있도록 만들기도 했다.
람승도놀이가 누구에 의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아직 정확하게 규명돼 있지 않지만 말판에 적혀 있는 지명이나 전래되고 있는 놀이도구로 미루어 민속학자들은 삼국시대 때부터 즐겨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놀이 방법은 람승도 말판을 가운데 놓고 여럿이 둘러앉아 숫자팽이(輪木)를 굴려서 나오는 숫자만큼 말을 놓아가는 것으로 윷과 비슷한 면이 있다. 이를 즐기기 위해서는 말판(또는 도판이라고도 한다)과 숫자팽이라고 하는 말이 있어야 한다.
놀이판인 말판은 1m 남짓한 크기의 장방형 종이에 그린다. 종이 한 장에 네모난 칸을 그린 다음 장기판처럼 줄을 그은 공백에다 금강산이나 촉석루 낙화암과 같은 전국의 명승지를 빼곡이 적어넣는다. 또는 국내 지도에다 같은 방식으로 명승지를 적어넣을 수도 있다.
또 어떤 때는 전국 팔도를 여행하는 식으로 서쪽지방 이름부터 시작해 함경도 강원도에 이어 경기도 동부지역을 거쳐 한 바퀴 빙 돌아 서울로 돌아올 수 있도록 배치해놓기도 했다.
그리고 명승지나 지명 밑에는 1에서 6까지의 숫자와 함께 옮겨갈 방향을 써놓았다. 이렇게 해놓고 출발점인 서울 숭례문을 떠난 말이 윷놀이에 쓰는 말판처럼 전국으로 연결된 말판을 한 바퀴 돌아서 다른 사람보다 먼저 도착점인 서울 흥인문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이기도록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모든 놀이는 똑같은 조건과 위치에서 출발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람승도놀이는 다르다.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똑같은 여행을 하다보면 느낌도 비슷하고 재미도 덜하다.
이런 싱거움을 털어버리기 위해 놀이꾼들은 놀이를 시작하기 전 각기 다른 신분을 갖고 말을 움직이게 된다. 이것을 ‘초부’라고 한다. 1에서 6까지의 숫자에 맞추어 시인 한량(또는 무사) 미인 화상(和尙·승려) 농부 어부 등 여섯 가지의 직분 또는 신분 가운데 한 가지 를 선택하고, 그 선택에 따라 특권이라는 보너스를 가진다.
가령 시인인 사람이 평양 연관정에 이르면 시인의 전설이 많은 고장이라고 해서 특권을 누리게 된다. 또 한량이 된 사람이 진주 촉석루에 이르면 장사가 왜적을 물리친 고장이라고 해서 특권을 누렸다.
승려(화상)는 미인이 먼저 가 있는 곳에는 가지 못해 돌아가야 했고, 승려가 미리 가 있는 곳에 미인이 가려 하면 다음에 얻은 수를 미인에게 주어 그 말을 보내도록 했다.
또 제주 한라산이나 울릉도에서 회오리바람을 만나 방향을 바꾸거나 되돌아가도록 하는 칸과 유배(流配) 징소(徵召) 교전(交戰)이라는 칸을 만들어 함정에 빠지거나 이를 뛰어넘음으로써 변화무쌍한 상황이 희비를 엮어낼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이 놀이를 통해 아름다운 조국 강산의 풍토와 이름을 배우고 익힐 수 있도록 하겠다는 큰 틀을 모두 벗어나지 않았다. 이런 것을 보면 놀이를 매개로 한 내기나 재물 겨루기보다 놀이를 통해 지리 학습의 기회와 동기를 부여하려고 했던 선조들의 지혜를 읽을 수 있다.
또 조선 초기부터 ‘세종실록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과 같은 전국 규모의 지리서적이 편찬돼 세계를 놀라게 했던 우리의 찬란한 역사도 이런 놀이의 산물이 아닐까 여겨지기도 한다.
- ‘대박산’ 마을에서 유래한 엽전놀이 … 중간중간 우리 가락 좋을씨고
사시랭이놀이에 쓰이는 엽전. 문화축제에서 사시랭이놀이를 재현하고 있는 태백시 동점마을 사람들(아래).
당시 동(銅)이나 석연(錫鉛)을 섞어 주조한 엽전을 철전(鐵錢), 또는 상평통보(常平通寶)라고 불렀다. 마을 주민들이 환갑집이나 초상집에 모여들어 추렴을 하려고 이 놀이를 즐겼다고 하나 그것이 지나쳐 가산을 탕진해 패가망신하는 사례도 많았다. 또 광산에서 일하는 광부들이 육체 노동의 피로를 풀기 위해, 또는 의병들이 쏟아지는 밤잠을 쫓아내려고 할 때 이 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일명 ‘철퇴’ ‘곱쇠치기’라고 부르기도 하고, 된소리를 내 ‘싸시랭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놀이는 재미도 재미려니와 숫자가 나올 때마다 부르는 사설불림이라는 흥겹고 재미있는 노랫소리가 엮어내는 신바람이 일품이다.
엽전 뒷면에는 숫자가 새겨져 있다. 주조한 기관에 따라 다르지만 1에서 4까지는 3닢씩, 5에서 10까지는 2닢씩을 골라내 24닢을 만든다. 이것을 가지고 5명이 1개 조가 되어 논다. 이 가운데 1명은 ‘꼬지꾼’이 되어 24닢의 엽전을 두 손에 넣어 흔든 후 나머지 4명의 ‘패장꾼’에게 3닢씩 두 번 나누어준다.
패장꾼들은 가운데 있는 개다리소반 위에 나눠준 엽전을 내리치면서 숫자에 맞는 불림소리를 부른다. 예를 들어 ‘1’자가 쓰인 엽전이 나오면 “일낙 서산 해 지고/ 월출 동녁 해 뜬다”는 식의 1자불림 소리를 하면서 개다리소반 위에 엽전을 던진다. 2부터 10자까지의 다른 엽전도 마찬가지다.
이때 상대가 1자 엽전이 없으면 다른 숫자의 엽전을 내놓게 되고, 있으면 잡게 된다. 6닢씩 골고루 나눠가진 엽전을 잡히지 않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독수’라고 하여 장원이 되고, 내기로 태워놓았던 돈을 모두 차지한다.
흥겨운 장타령과 흡사한 불림소리는 1에서부터 10까지 즉흥적으로 지어 부르기도 한다. 이 노랫말에 그 시대의 모습이 배어 있다.
“사신행차 바쁜 길/ 조반 참이 늦어진다”(4자불림)는 식의 풍자와 해학이 깃들여 있기도 하다. 또 2자가 나오면 “이 행료에 춤추고/ 이팔 청춘 늙는다”고 하고, 3자가 나오면 “삼신산에 불로초/ 늙지 마란 약이다”고 불림소리를 한다. 이런 불림소리는 채집된 것만 수백 가지가 넘는다.
후렴(뒷소리)까지 있다. “나오고 나온다/ 나오는 글씨 한 글씨/ 뒷장 불린 불리소” “나오고 나온다 얼씨구 절씨구 나온다/ 너훌 백방 넘어간다”는 식의 뒷소리에는 평불림과 엮음불림 두 가지가 있다.
또 숫자불림 소리에 “우리 국왕 어데 갔소/ 남한산성 피난 갔소”(9자)라는 노랫말과 엮음불림에 “…남한산성 줄불 놓고/ 광주에 파발 놓고…” 하는 노랫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 병자호란(1636∼1637년) 때부터 사시랭이를 즐겨왔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어쨌든 이 놀이는 점잖을 빼고 앉아 조용히 즐기는 놀이가 아니다. 패를 잡고 뗄 때마다 소리를 지르고 불림소리라는 사설을 늘어놓고 흥을 돋우도록 되어 있다. 노랫소리가 터지기 시작하면 온 동네가 시끌벅적해 함백산(咸白山) 기슭까지 떠들썩한 소리가 울려퍼졌다고 한다.
태백시 동점동에 자리잡고 있는 함백산의 옛 이름이 ‘대박산’이다. 큰 물건과 큰 배를 지칭하는 대박(大舶)은 요즘 사행산업의 급성장과 함께 ‘의외로 얻은 커다란 횡재’를 가리키는 말이 되어버렸다.
강원랜드 카지노의 포커게임이나 블랙잭과 같은 카드놀이를 연상시키는 사시랭이놀이가 이 지역에서 300여년 전부터 성행했다. 지역의 진산 이름이 대박산이고, 대박이 터지기를 바라며 광맥을 찾아 산기슭을 헤맸을 광주(鑛主)들과 강원랜드를 찾은 겜블러들의 열망에는 공통점이 있어 보인다.
- 양반님들 즐겨하던 ‘한국판 트럼프’ … 도박성 강해 지금은 자취 ‘뚝’
대대로 전해 내려온 골패 세트.
골패는 고려시대 때부터 사용해온 놀이와 도박기구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히 어느 때 어떤 사람이 창시했는지 밝혀져 있지 않다. 중국 송나라 때 생겨나 청나라 때 우리나라에 들어왔다는 설과 한국의 ‘투전(鬪錢)’이 시조로 오히려 동북아에 퍼져나갔다는 설이 있다.
골패는 바둑과 함께 양반 계급과 부유층 사이에 널리 퍼진 놀이다. 조선 헌종 때 학자인 오주(五洲) 이규경(李圭景)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우리나라 골패에 소골·미골이라는 이름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필자가 수집한 골패는 납작하고 길게 네모진 검은 나무 바탕에 하얗고 빨간 담채(淡彩)를 입혀 수효를 나타낸 것으로 조선 말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골패(骨牌)라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처음에는 사람의 뼈(人骨)로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밖에 납작하고 네모진 검은 바탕의 나무에 수효를 나타내는 구멍을 만들고 거기에 상아나 짐승뼈를 붙인 것과 전체를 뼈로 만든 것도 있다.
뼈로 만든 것은 ‘민패’, 쪽(片)에 대나무를 붙인 것은 ‘사모패’, 중국에서 상아로 만든 것은 ‘아패’라고 부르듯 종류가 다양하다. 심지어 눈이 멀거나 시력이 나쁜 시각장애인까지 함께 즐길 수 있는 것도 있다.
또 골패는 화투나 트럼프로 점을 치기 이전부터 점복(占卜)의 도구로도 널리 쓰였다. 천패이선(天牌二扇) 24점은 24기(氣)를, 지패이선(地牌二扇) 4점은 사방(四方)을, 인패이선(人牌二扇) 16점은 사단(四端)을, 화패이선(和牌二扇) 8점은 대화원기유행팔절지간(大和元氣流行八節之間)을 상징하는 것으로 천체에 있는 모든 성좌의 별들(성수·星宿)의 배열에 비유되기도 했다.
골패의 놀이방법은 79가지에 이를 만큼 매우 다양하다. 32짝인 골패를 6짝씩 나누어 가지면서 장원(승자)을 가려내는 방법과 승자가 선(先)이 되어 다시 게임을 시작하는 방법은 ‘트럼프’나 ‘화투’의 방식과 닮았다.
족보의 이름도 다양하다. 6짝이 홀수로만 된 것은 ‘홀아비쌍소’, 구멍 수가 많은 것을 쌍짝으로 모은 것은 ‘노인패’, 반대로 구멍 수가 적은 것은 ‘아기패’, 노인패와 아기패가 반반씩인 것은 ‘대창패’, 6짝 가운데 3짝의 구멍 수가 33이고 나머지 패의 구멍 수가 28이 되는 것은 ‘능구리대시대패’라고 부르는 등 수십 가지에 이른다. 그럴듯하게 붙여진 이름들이 흥미롭다.
족보에 들어 있는 패를 가졌을 때 얻는 점수도 저마다 다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쌍소통’과 ‘드러톡’은 2곱, ‘백부동’과 ‘오부동’은 3곱, ‘상부동’과 ‘대사대’는 4곱, ‘노인패’와 ‘아기패’ ‘쌍변패’는 5곱, ‘홀아비쌍소’는 6곱, ‘아부동’은 7곱의 점수가 나도록 되어 있어 고스톱 놀이의 점수를 연상시킨다.
골패놀이를 즐기면서 주고받았던 대화 가운데 대부분이 요즘 우리가 즐기고 있는 화투놀이에 그대로 원용되고 있다. ‘망통’과 ‘따라지’ ‘꽁꽁이’는 가장 낮은 한심한 끗수다. ‘황 잡았다’ ‘말짱 황이다’ ‘황을 그렸다’는 짝이 맞지 않는 패를 잡았을 때 썼다. ‘땡 잡았다’의 ‘땡’에는 원래 우리말인 ‘땡땡구리’의 준말이라는 설과 두 패가 서로 같다는 동(同)이라는 한자음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바가지 썼다’는 남의 끗발을 잘못 읽어 손해를 보았을 때, ‘짓고 땡이다’는 패를 짓고 남은 2짝이 쌍짝일 때 썼다. 이런 골패놀이 용어는 지금도 일반화되어 낭패를 보거나 절망적일 때, 의외의 소득을 올리는 개가를 거두었을 때 감탄사로 쓰이고 있다.
음풍영월(吟風口永月)의 고졸(古拙)한 품격을 지닌 사대부가 즐겼던 골패놀이가 근래 들어 자취를 감춰버린 까닭은 도구인 골패 값이 비싸 구하기 어렵고, 놀이방법이 까다로우며 복잡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놀이 자체에 사행적 요소가 많아 ‘골패=도박’이라는 인식이 컸던 탓으로 풀이된다.
- “목대로 돈 맞혀라” 쉽고 간편해 대중적 사랑 ‘듬뿍’
돈치기에 쓰였던 엽전들. 1980년대 초 전북 부안 위도 아이들이 돈치기를 하고 있다.
조선시대까지는 엽전으로, 그 이후에는 동전을 이용해 놀았다. 돈을 던지고 맞히면서 노는 놀이라고 해서 ‘타전(打錢)’ ‘투전놀이’라고 불렀다. 조선 순조 때 홍석모(洪錫模)가 저술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척전(擲錢)놀이’라고 적혀 있다.
돈치기에 정형(定型)화된 규칙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각 지방마다 때와 장소에 따라 놀이방법이 천차만별이어서 놀이를 시작하기 전에 규칙을 서로 확인하고 놀았다. 골프를 즐기기 전에 ‘로컬 룰(local rule)’을 익혀두는 것과 비슷하다.
돈치기놀이의 대표적인 방법을 보면 땅바닥에 동전을 집어넣을 구멍을 파놓고 3∼5m 앞에 선을 그어 각자 동전 한 닢씩을 구멍을 향해 던진다. 구멍에 들어가거나 가장 가까이 던진 사람부터 차례로 순서를 정한 후에 게임을 시작한다.
첫째가 구멍을 향해 던져놓은 동전을 모두 거두어 손에 쥐고 다시 구멍을 향해 던진다. 이때 구멍에 들어간 것은 모두 던진 사람이 차지한다. 구멍에 들어가지 않은 것은 목대로 맞힌 사람이 갖는다. 여기서 맞혀야 할 돈을 다음 차례가 지정할 경우도 있다. 이때 잘못 던져 옆에 있는 나머지 동전을 건드릴 경우 실격하고 벌금을 내기도 한다. 또 동전을 구멍에 넣은 사람이 한 사람이면 다른 동전을 모두 차지하고 구멍에 넣은 사람이 여럿일 경우에는 넣은 사람들끼리 다시 던져 승패를 가르기도 했다.
동전 여러 개가 포개져 있는 것을 먼저 맞히면 맞힌 사람의 차지가 되고, 선(線)을 벗어나 목대가 있는 자리에서 동전을 맞혀 구멍에 집어넣어야 자기 차지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목대가 없을 경우에는 담벼락에서 2m 가량 떨어진 곳에 선을 긋고 동전을 담벼락에 후려쳐서 선에서 제일 가깝게 던진 사람이 땅바닥에 놓인 동전을 차지하는 놀이방법도 있다.
돈치기놀이에서 던진 돈을 맞히는 데 썼던 목대도 형편에 따라 여러 가지를 사용했다. 원래는 엽전의 당백전(當百錢)이나 별전처럼 다른 동전에 비해 무게가 나가고 두꺼운 것을 구멍을 뚫어 구리로 봉을 박은 후 두 겹, 세 겹을 붙여서 던지기 알맞게 동글납작하게 모양을 만들었다.
당백전으로 만든 목대와 돈치기놀이용으로 특별히 주조한 무쇠 목대가 강원 춘천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발견되었다. 이중 춘천에서 수집된 당백전 목대는 옆부분이 반질반질하게 닳아 돈치기놀이에 얼마나 많이 썼기에 이렇게 마모되었을까 할 정도다.
또한 방산가마(方山窯) 터가 있는 강원 양구 지방에서는 깨진 사기그릇 조각을 목대로 쓰기 알맞게 다듬은 것이 채집되기도 했다.
돈치기를 하고 싶은데 쇠붙이나 사금파리로 만든 목대가 없을 경우에는 자갈밭에 나가 목대로 쓰기에 알맞은 돌을 골라 놀이에 활용했다.
어쨌든 전국 각 지방마다 놀이방법이 각양각색이어서 그 지역의 독특한 행동양식이 배어 있기도 하다. 주로 겨울철 양지바른 골목길의 담 옆에서 어린아이들이 많이 즐겼으나 장날 한 귀퉁이에서 어른들이 큰돈을 걸고 돈 따먹기에 활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음식과 술내기를 하며 자기편이 이기면 “지화자…”를 외치며 흥을 돋웠다.
잘 던지고 잘 맞혀야 하는 정확성과 이를 뒷받쳐줄 운동신경이 요구되는 놀이여서 요즘 클레이사격경기에서 맛볼 수 있는 적중의 쾌감을 즐겼으리라 짐작된다.
또 엿치기 자치기 수박치기 장치기 등 그 많던 ‘치기놀이’ 가운데 유일하게 돈이 오간 놀이여서 어린이들에게 사행심을 조장할 수 있다는 걱정을 갖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운동량이 부족한 겨울철에 심심풀이로 즐기기에는 이것처럼 재미있는 놀이가 드물었다.
- 놀이방법 무궁무진 … 즐기면서 ‘수리’·‘역학’ 공부도 절로
대나무로 만든 산가지.
산가지놀이의 ‘산’자는 이두문자로 ‘셈 산(算)’자를 쓴다. 셈을 하는 가지라는 뜻이다. 또 곳에 따라서는 산대, 수대, 주대, 산가비, 수가비, 주가비라고도 불렀다. 놀이도구의 이름만큼이나 놀이방법도 무척 다양하다.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어 예로부터 계층에 관계없이 가장 널리 퍼졌던 놀이다.
놀이방법은 어린이들이 노는 산가지 떼어내기가 대표적이지만 산가지 따기, 삼각형 없애기, 쌍 만들기, 자리 옮기기, 형태 바꾸기, 모양 만들기 등 10여 가지가 있다. 이중 모양 만들기는 집, 오리, 고양이, 숫자, 탑 등 만들려 하는 주제를 정해놓고 그 형태를 만들도록 되어 있어 칠교놀이와 흡사하다.
산가지는 주판이 나오기 전에는 저잣거리에서 셈을 하는 데 쓰기도 하여 주판의 고조할아버지뻘인 셈이다. 주판이 만들어지고 난 후에는 셈하는 기능을 주판에 빼앗겨 전문 놀이도구로 바뀌었다. 일정하고 곱게 잘 다듬은 산가지는 숫자계산의 기능을 잃어버린 후에도 계속 놀이도구로 유효하게 쓰였다.
윷놀이나 쌍륙, 투전, 장기, 바둑과 같이 재물을 태워놓고 승부를 겨루는 놀이를 할 때는 승률을 입증하는 표식으로 썼다. 놀이하면서 잔돈이 없을 때는 잔돈 대신으로 쓰기도 했다. 카지노에서 쓰는 칩(chip) 노릇을 한 셈이다.
골동품가게에 들렀다가 산가지놀이 도구를 발견했다. 잘 조각된 산가지 통에 48개의 산가지가 가지런히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관상태가 아주 좋았다. 두말없이 얼른 입수했다. 그러고는 집에 돌아와 아이들에게 놀이를 시켜보았다.
10개의 산가지를 규칙에 따라 홀수와 짝수로 가지런히 늘어놓아 외톨이 산가지가 나오면 지는 산가지 옮기기는 아이들이 빨리 싫증을 느꼈다. 계산이 빠른 아이들이 게임 시작과 함께 결과를 미리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사위를 가지고 편을 갈라 산가지를 떼어내는 놀이와 모양 바꾸기 놀이와 같은 놀이는 달랐다. 요행과 우연이 승부를 결정하고, 정하기에 따라서 엉덩이를 방바닥에서 떼지 않도록 규칙을 정해놓으니까 무척 재미있고 흥미로워했다.
산가지 떼어놓기 놀이를 시켜보았다. 얽히고 설킨 산가지를 조심스럽게 떼어내던 아이들은 자꾸 다른 산가지를 건드리거나 흩어지게 만들어 파울을 당하고 말았다. 어느 정도 떨어지게 흩뜨려놓았더니 조심성 있게 들어내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옆에서 놀이를 지켜보던 아이들도 함께 소리를 지르고 놀이를 즐기며 재미있어했다.
형태 바꾸기 놀이는 일정 수의 산가지로 날아가는 새나 나비, 또는 집의 형태를 만들어놓고 지정한 숫자의 산가지를 떼어내 180도 방향을 바꾸거나 집의 형태를 바꾸는 놀이다.
이밖에도 산가지 들어올리기, 삼각형 없애기, 쌍 만들기 등 놀이방법이 많아 마치 놀이보물 상자처럼 느껴졌다.
산가지놀이는 무척 단순해 보인다. 그렇지만 다른 산가지를 다치지 않고 떼어내고, 떼어낸 산가지를 적절하게 쓰지 않으면 문제가 풀리지 않도록 되어 있다.
두 명 이상이나 여러 사람이 편을 갈라 다양한 문제를 내고, 그것을 풀어나가는 이 놀이는 살가운 우리 놀이문화의 원형이기도 하다.
어린아이들이 산가지놀이를 하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에서 수리와 역학을 깨우쳐주고 길러주는 학습과정이 담겨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 창의성과 능동성 책임감 균형감각(조심성)을 길러주는 훌륭한 놀이임을 느낄 수 있었다.
- 주사위 숫자만큼 “앞으로” … 한·중·일 세 나라서 오래도록 인기
쌍륙에 쓰이는 주사위와 말. 말판(아래).
조선 세종 14년(1432) 명나라 사신이 쌍륙을 보내달라고 요청한 기록이 전해지고 매월당 김시습이 쌍륙 시조를 지은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 중국으로 건너갔다는 주장에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에서는 백게몬(Backgammon)이란 이름으로 불리는데, 고대 그리스와 로마제국시대의 여러 유적지에서 쌍륙판이 발굴되고 있기도 하다.
쌍륙은 두 사람 또는 두 편으로 나누어 말 15개(용호쌍륙은 12개)와 주사위 2개를 가지고 노는 놀이다. 굴린 주사위가 나타내는 사위대로 판 위에 놓인 말을 움직여 먼저 나는 편이 이기도록 돼 있다.
서양의 체스처럼 위에서 쥐기 좋게 깎아서 다듬은 나무 말을 가지고 논다 하여 악삭(握朔木)이라 부르고, 이두문자로 ‘쌍육(雙陸)’이라고 표기하기도 했다.
쌍륙은 갑과 을이 쌍륙판을 가운데 놓고 검은 말과 흰 말을 배치한 후 치도록 돼 있다. 갑이 검은 말을 잡으면 을은 흰 말을 잡는다. 말을 모두 배치한 다음에는 번갈아가며 주사위를 던진다. 이때 2개의 주사위 중 하나는 ‘2’가 나오고 나머지는 ‘5’가 나왔다면 합이 ‘7’이어서 말을 일곱 금 앞으로 옮겨놓는다.
주사위는 한꺼번에 두 개를 던져도 되고 한 개씩 던져도 된다. 한 개씩 던질 때는 먼저 나온 숫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중에 던진 것으로 쳐서 움직일 수도 있다. 이 경우 주사위의 숫자도 중요하지만 말을 어떻게 능률적으로 움직이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다. 또 잡힌 말은 다시 출발시켜야 하므로 쌍륙판 위에서 자주 충돌이 일어나 잡거나 잡아먹히기도 한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 바라는 숫자가 나오지 않으면 낭패를 보게 되는 경우가 많다.
상대방 말이 하나인 밭에서는 ‘바리(혼자 있는 말)’를 잡아내고 들어갈 수 있다. 또 잡혀서 바깥으로 쫓겨나간 말은 반드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주사위를 던져 똑같은 숫자가 연거푸 나오면 2동을 함께 얹어 전진시킬 수 있다. 즉 ‘3·3’이면 세 밭을, ‘4·4’면 네 밭을 전진시킬 수 있다.
이처럼 윷사위같이 요행수가 맞아떨어지는 숫자가 나와야 하고, 말의 행마법은 장기와 같은 작전이 요구되어 윷놀이와 장기놀이를 절충한 놀이로 보는 사람도 있다.
미국의 민속놀이 학자인 스튜어트 컬린이 쓴 책의 ‘쌍륙편’에 보면 한·중·일의 쌍륙판이 생김새나 놀이방법이 약간씩 다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직사각형의 형태를 한 우리나라 쌍륙판은 각면의 끝부분이 위로 올라와 있고 도표가 그려져 있다. 이 나무통 안에는 ‘밭(田)’이라 하는 부분이 검은색으로 분할 구획되어 있어 말을 움직이는 말판으로 쓰도록 되어 있다.
말은 대부분 회양목으로 만들지만 무른 나무를 쓴 것도 있으며 상대를 구분하려고 한쪽 말에 빨간색을 칠한 것과 원목색깔을 그대로 살린 것도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에는 완벽한 쌍륙놀이 도구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나 시중 골동품가게에서는 놀이기구가 모두 갖춰진 형태를 구경하기조차 어렵다.
그러나 1970년대까지만 해도 강원 영동지방 산골에서는 정초에 고향을 찾은 일가친척들이 차례를 올린 후 함께 둘러앉아 쌍륙놀이로 내기를 즐기는 모습을 더러 볼 수 있었다.
쌍륙이라는 놀이의 이름은 주사위를 던져서 나오는 숫자가 ‘6’‘6’이면 반드시 이긴다는 ‘줄륙’에서 비롯된 것이다. 슬롯머신에서 터지는 잭팟 정도로 상상해도 무난할 듯싶다.
중국의 현종 황제가 양귀비와 마주앉아 주사위(중국명은 사이쯔다)를 써서 쌍륙을 자주 즐겼다는 기록으로 봐 푹 빠질 수 있는 재미난 놀이가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 삼국시대부터 이어져온 ‘국민 놀이’ … 점치는 도구에서 놀이로 변신
베로 만든 말판과 윷. 소형 밤윷(아래).
조선 영조 때 학자인 이익(李瀷·1681∼1763)이 쓴 ‘성호사설’ 윷놀이조에 “고려의 유속(遺俗)으로 본다”는 말이 나오고, 중국 북사(北史) ‘태평어람(太平御覽)’에 “백제에는 저포(樗蒲)라는 잡희가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것으로 미뤄 윷놀이의 기원을 삼국시대로 추정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고대 농경시대부터 있어온 유풍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원래 윷은 단순한 놀이도구가 아니었다. 연초에 올해 농사가 ‘잘 될까’ ‘안 될까’를 점치는 도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윷가락이 엮어내는 주역의 64괘로 윷점을 치기 그 이전의 일이다.
세계적인 민속학자 스튜어트 컬린은 저서 ‘한국의 놀이’를 통해 “윷놀이의 기원은 서기 3세기경이다”고 추정했다. 또 펜실베이니아대학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한국의 윷가락과 윷판을 “중국의 유방과 항우의 전투에서 28명의 기마병이 항우를 에워싸고 있는 형상을 나타내고 있다”며 “윷판의 각 지점에 쓰인 한자가 당시의 고사(故事)를 전해주는 한시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윷은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 모양이 다양하지만 장작윷(또는 장윷, 채윷, 가락윷)과 밤윷(좀윷) 두 가지로 분류한다.
장작윷은 박달나무나 붉은 통싸리나무 밤나무 등을 길이 15∼20cm, 지름 3∼5cm 정도 크기로 깎아서 다듬은 것이다. 밤윷은 작은 밤알 크기의 나무조각 4개를 간장종지 같은 것에 넣어 흔들다가 바닥에 던지며 놀았다. 밭에서 일하다 잠시 쉬는 사이에 놀던 팥윷과 콩윷도 있었으나 정식 윷은 아니다.
윷놀이는 윷가락 4개를 던져 가리키는 ‘끗수’에 따라 말을 써서 승부를 다투는 놀이다. 놀이를 하자면 먼저 멍석이나 짚방석을 깔고 29개의 동그라미를 그린 윷판(馬出)을 펴놓아야 한다. 보통 2∼3명이 놀지만 패를 갈라 여러 편이 놀기도 한다.
윷말 옮기기(行馬)는 던진 윷가락이 나타내는 ‘끗수’(도, 개, 걸, 윷, 모)에 따라 1∼5발을 움직일 수 있어 걸음걸이가 저마다 다르다. 이때 ‘끗수’를 나타내는 도는 돼지(豚), 개는 개(犬), 걸은 양(羊), 윷은 소(牛), 모는 말(馬)을 가리킨다. 윷말은 한 마리가 나는 것을 “한동났다” 하고, 네 마리가 모두 참먹이(出口)를 먼저 빠져나와야 이긴다.
윷가락 ‘끗수’의 이름이 짐승인 것은 고대 농경사회에서 부(富)를 나타내는 척도가 가축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였고, 가장 친밀한 동물이었기 때문으로 풀이되고 있다.
음력 정초에는 고을마다 ‘척사회(擲柶會)’라고 하는 윷놀이대회가 열려 흥겨운 정초 분위기를 돋워주었다. 이런 모습은 조선시대에 절정을 이루어 우리 세시풍속 가운데 대표적인 놀이로 꼽는 데 손색이 없었다. 지금까지 각 지방마다 다양한 윷놀이 민요가 채록되고 있고, 아직도 설날이 되면 그 명맥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어 우리 민족이 윷놀이를 얼마나 즐겨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연초에 즐겼던 건전한 단순오락이었던 윷놀이가 조선 말기에 들어서는 돈을 걸고 승부를 겨루는 도박성을 띠기 시작, 내기놀이로 변신한다. 1970년대 이전까지 저잣거리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모습으로 사람들이 모여 ‘넉동나기’ 윷치기를 벌이면 구경꾼들이 장사진을 이뤘다.
‘윷놀이는 승벽에 한다’는 속담처럼 승부의 변수가 너무 많아 구경꾼조차 긴장과 흥분을 감출 수 없다. 이런 노름이 지나쳐 한때는 ‘덕대놀이’ ‘모다먹기’라는 윷놀이 노름이 크게 유행했다.
- 6분의 1 확률에 ‘소망을 싣고’ … 인류 놀이도구 중 가장 긴 역사 ‘자랑’
다양한 유형의 주사위. 글자를 새겨넣은 주사위로는 신의 뜻을 점쳤다.
6면이 입방체로 된 기본적인 주사위를 비롯해 8면, 12면, 20면체가 있다. 심지어 1에서 100까지의 숫자가 빼곡이 박혀 있는 공 모양의 주사위도 있다.
크기도 놀이방법과 용도에 따라 다르다. 서양에서는 ‘다이스(dice)’, 중국에서는 ‘사이쯔(投子)’ 또는 ‘주샤(朱色)’ 일본에서는 ‘사이(采)’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에서는 나무조각을 굴리면서 논다고 하여 ‘윤목(輪木)’ 또는 이두문자를 그대로 써 ‘투자(投子)’라고도 불렀다.
우리나라 주사위는 상아나 동물의 뼈, 또는 나무 돌로 만들어 썼다. 정육면체로 여섯 면에 점을 1에서 6까지 찍어놓거나 숫자를 새겨넣었으나 항시 마주보고 있는 두 면에 새겨진 숫자의 합이 ‘7’이 되도록 표시하였고 ‘1’(·)과 ‘4’(::)에는 빨간색이 칠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일설에 주사위는 중국에서 건너온 놀이도구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민속놀이 학자 슈트어트 컬린의 견해는 다르다. 그는 19세기 말 동아시아를 직접 답사한 후 “전 세계가 가지고 있는 놀이도구의 원형은 한국의 윷놀이”라고 주장, 주사위의 효시가 한국의 윷임을 밝히고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에 이미 숫자 맞히기 등 주사위놀이를 많이 즐겼다. 삼국시대에는 주사위를 가지고 노는 쌍륙(雙六) 종경도놀이 등 다양한 놀이가 성행했다.
주사위놀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놀이도구나 방법의 주체가 주사위가 되는 것이고, 둘째 다른 놀이의 부수적인 도구로 주사위가 쓰이는 경우다.
초기에는 어린아이와 부녀자들이 주사위를 던져 숫자를 맞히는 놀이 형태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하면서 주사위놀이가 다양하게 바뀌고 마작과 같은 다른 놀이에 접목되어 보조도구로도 쓰였다. 2개의 주사위를 가지고 노는 쌍륙놀이가 만들어지고 윷놀이에서 4 개의 윷가락 대신 주사위를 던져 놀기도 했다.
6면이 입방체인 주사위는 언제 던져도 각면이 고루 나와야 한다. 1∼6까지의 숫자 가운데 원하는 숫자가 나올 확률은 언제나 6분의 1이고, 그렇지 않은 숫자가 나올 확률은 언제나 6분의 5여야 한다.
그러나 주사위를 던져서 게임을 하다보면 누구나 중요한 순간에 염력(念力)을 집어넣어 던지면 원하는 숫자를 나오게 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행운을 잡을 수 있다는 묘미에 빠져 밤낮으로 주사위놀이를 즐겼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중국의 현종도 양귀비와 둘이서 주사위놀이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또 조선중기 성현(成俔)이 쓴 수필집 ‘용제총화’에는 ‘윤목(굴리는 나무 주사위)의 각 면에 덕·재·근·감·연·탐(德·才·勤·堪·軟·貪)의 여섯 글씨를 써넣고 도판에는 일품(一品)에서 구품(九品)까지의 벼슬을 차례로 두어 德과 才가 나오면 올라가고, 軟과 貪이 나오면 파직되는 방식으로 종정도(從政圖)놀이라는 벼슬길놀이가 있었다’고 쓰여 있다.
주사위는 놀이 도구만이 아니었다. 문헌에 보면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육각주상(六角柱狀)의 나무조각 각 면에 문자를 새겨넣어 이것을 굴려 신의 뜻(神意)을 점쳤다’고 돼 있기도 하다.
심지어 팔괘(八卦)가 확장된 64개의 괘를 도표로 만들어 주사위를 던져서 나온 결과를 대입시켜 앞날을 내다보는 점을 치기까지 했다.
유럽으로 건너간 주사위는 17세기 이후 각국으로 퍼지면서 여러 가지 복잡한 놀이 규칙이 만들어져 다양한 ‘보드게임’과 ‘다이스게임’을 탄생시켰다.
그중에서 지금까지 널리 즐기는 것이 ‘다이사이(Tai Sai)’ 게임이다. 주사위 3개를 용기(Dice Shaker)에 집어넣어 흔든 후 숫자의 조합을 맞히면 정해진 배당률에 따라 시상금을 지급하는 근대적인 게임으로 베팅방식은 룰렛(Roulette)과 거의 같다.
- 일곱 개 조각으로 수만 가지 형태 조합 …‘교묘한 마술’ 닉네임
아이들의 상상력을 기르는 데도 그만인 칠교.
기원전 중국 주나라 때 이미 칠교라는 글씨가 있었던 것으로 미뤄 역사가 오래된 놀이로 추정된다. 하지만 구체적인 놀이방법에 대해 기록해놓은 책은 이것보다 훨씬 세월이 지난 청나라(1803년) 때부터 발견되고 있다.
중국에서 전래된 이 놀이는 수만 가지의 형태를 만들 뿐만 아니라 새로운 형태를 창안할 수 있는 독특한 매력과 재미를 지니고 있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양반집안의 필수 놀이로 정착될 정도였다. 우리나라 초등학교 교과서에 한국 전래오락으로 소개되어 있다. 중국에서 들어온 놀이지만 우리의 취향이나 가치, 또는 생활양식에 맞게 변용돼온 데 기인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또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실크로드를 타고 유럽으로 건너가 19세기 초 미국으로까지 전파돼 큰 인기를 끌면서 세계적인 놀이가 되었다.
일곱 개의 조각으로 어떤 형태든지 만들어낼 수 있어 ‘7인의 마법사’ ‘일곱 조각의 마술’로 불리기도 한다. 이 놀이의 서양 이름인 ‘Tangram’이란 단어를 미국 웹스터 사전에서 찾아보면 ‘지혜의 판(板)’ ‘일곱 개의 조각으로 된 장난감’이라고 짧게 소개되어 있지만 이 놀이에 얽힌 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프랑스의 영웅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 섬 유배 시기 한가하고 긴 시간을 상아로 만든 칠교로 여러 가지 놀이를 하면서 무료함을 달랬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또 소설가 헤밍웨이와 에드거 앨런 포도 이 놀이를 무척 즐겼다. 소설 ‘노인과 바다’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헤밍웨이는 식사를 끝내기 무섭게 골방에 처박혀 며칠씩 칠교놀이에 빠졌다. 출판사 직원이 사라진 그를 찾아 헤매다 마지막으로 골방 문을 열어보면 영락없이 칠교놀이를 하고 있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런가 하면 기하학 발전의 신기원을 이룬 유클리드도 칠교놀이를 통해 새로운 지혜를 만들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통적으로 육체적 놀이를 천시해왔던 조선시대에 칠교놀이는 바둑 장기와 더불어 양반과 사대부층의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두터운 사랑을 받았다.
주인이 자리를 잠시 비운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넌지시 칠교판을 건네주어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을 재미있는 시간으로 바꿔주기도 했다. ‘유객판’이란 별칭도 그래서 붙은 것이다. 나무판이 아니라 막대에 링을 엮어 이것을 풀도록 하는 유객주(留客珠)놀이도 있었다.
칠교판은 사방 10cm 내외의 작은 나무판 형태로 만들었는데, 큰 직삼각형 2개, 중간 삼각형 1개, 작은 삼각형 2개, 정사각형과 평행사변형이 각각 1개씩 들어 있다. 이렇게 조각낸 일곱 개의 나무판을 가지고 동물 식물 사람 글씨 건축물 숫자 지형 따위의 온갖 모양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칠교놀이를 하다보면 누구나 그 오묘함에 빠진다. 단순한 일곱 개의 조각이 이리저리 얽혀서 만들어내는 무궁무진한 형태에 놀라게 되는 것이다. 단 일곱 개의 조각을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만들어낼 수 있는 형태가 1만 가지가 넘으니 ‘교묘한 마술의 조각’이라는 닉네임이 붙을 만하다.
혼자서도, 여럿이도 즐길 수 있다. 혼자서는 이미 만들어진 모양을 흉내내거나 새로운 모양을 창작해낼 수 있고, 여럿이서는 서로 한정된 시간에 지정한 형태를 만들어내기를 겨루게 된다. 따라서 어려운 모양을 미리 많이 만들어본 사람이 유리하게 마련이다. 또 어렵다고 쉽게 포기하면 이 놀이를 즐길 수 없다. 트럼프로 ‘세븐 카드’를 즐기면서 마지막 1장을 받을 때까지 ‘메이드’ 되기를 포기하지 않는 그런 자세가 중요하다. 그렇게 해야 모양을 만들어냈다는 성취감과 새로운 모양을 창작했다는 기쁨을 맛보고 재미도 느낄 수 있다.
칠교놀이는 무궁무진한 사고력과 상상력 조직력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을 주어온 지적 정신스포츠였다.
- 돈 걸고 끗발 겨루기 … 재미와 스릴 좇다 패가망신 부지기수
창호지를 여러 겹 붙여 만든 투전목과 투전하는 옛 그림(아래).
놀이방법도 ‘돈 놓고 돈 먹기’ 식이다. 사행심을 조장한다 하여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한때 금지하기도 하였다. 돈을 걸어 따고 잃는 과정에서 느낄 수 있는 재미와 스릴이 다른 노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해 심신을 잠시 쉬게 하는 여유와 휴식을 위한 놀이는 아니었다. 투전의 재미에 빠져 패가 망신하거나, 겨울철 농한기에 일년 농사를 하루아침에 날려버려 농촌을 궁핍하게 만드는 해악을 끼쳤다. 이것은 투전의 대표적인 놀이방법이 화투놀이 가운데 가장 큰 노름이어서 지금도 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도리짓고 땡’의 모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투전목은 창호지를 여러 겹으로 붙여서 두껍게 만들었다. 이것을 손가락 넓이(너비 1.5cm 길이 18cm 정도)로 일정하게 잘라내 한 면에 동물과 사람 얼굴, 시구(詩句) 등의 그림을 그려넣었다. 그리고 1에서 10까지의 끗수를 표시한 후 기름에 절여 오래 쓸 수 있도록 길을 들여 놀았다.
노름의 방법과 사람 숫자에 따라 끗수가 같은 짝이 5장, 6장, 8장이 있어 한목이 50장, 60장, 80장이 되기도 하고 40장 25장만 쓰기도 한다.
놀이방법도 돌려대기·동동이·꼽사치·소몰이·쩍쩍이·찐붕어·쫄팔이·엿광대 등 다양하다. 이 가운데 돌려대기는 투전놀이의 특징을 개관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이고 일반적인 놀이다.
강원도는 ‘갑오잡기’ ‘돌레태기’ 함경도와 경상도는 ‘짓구땅’이나 ‘짓구땅이’ 평안도는 ‘땅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은 화투를 가지고 놀면서 약간 변형되어 ‘짓고 땡’ ‘도리짓고 땡’이라 부른다.
돌려대기의 놀이방법은 물주인 선수(先手)가 패를 섞으면서 시작된다. 섞은 패를 바닥에 내려놓으면 아기패(牌)가 다시 목을 갈라 섞어 물주에게 준다. 물주는 아기패 4명에게 차례로 돌아가며 5장씩 나눠준다. 아기패는 5장 가운데 3장을 가지고 10, 20, 30을 만들어 짓고 나서 나머지 2장을 가지고 끗발을 겨룬다. 어떻게 해서도 3장을 가지고 두 자리 숫자의 끝을 ‘0’으로 만들 수 없으면 ‘황’이라 했다. 골패에서처럼 황을 잡으면 그 게임에서 자동 탈락된다. 만약 나머지 2장의 ‘끗수’가 같은 것이 뜨면 ‘땅’ 또는 ‘땡’이라고 하여 가장 높은 끗발로 친다. ‘땅’은 우리말인 ‘땡땡구리’의 준말로 두 패가 같다는 뜻이다. ‘땅’은 10의 끗수가 2패인 장땅이 가장 높고, 9땅 8땅의 순서로 1땅까지 떨어진다. 그러므로 ‘장땅이다’는 일상화된 노름용어는 최고 최상을 이르는 표현이다.
땅에 이어 노는 사람들이 임의로 설정한 ‘족보’가 있었으나 지역마다 규칙이 달랐다. 땅이나 족보가 아닌 경우에는 2장의 끗수를 더한 숫자가 끗발이 된다. 2장의 끗수를 합한 숫자가 ‘9’면 ‘갑오’라고 하여 제일 높은 끗발로 치고, 8·7·6·5·4·3·2·1의 순서로 끗발이 낮아진다.
여기서 ‘1’을 잡으면 ‘따라지’, ‘0’을 잡으면 ‘망통’ 또는 ‘무대’라고 불렀다. ‘따라지’는 체구가 작은 사람을 일컫는 우리말이다. ‘따라지 산조’(散調)로 불리기도 한 이 말은 그후 6·25전쟁이 터지면서 남쪽으로 피난 온 사람을 가리키는 ‘3·8따라지’ 신세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또 ‘투전불림’이라 하여 투전놀이를 즐기면서 노래를 불렀다. ‘이리저리 장자, 장자나 한 장 들고 보니, 장안의 광대 박광대, 오만장이 내 돈이라…’고 끗발이 높은 것을 즐거워하는 노랫말이 있는가 하면 ‘주먹 같은 일자, 일자나 한 장 들고 보니, 일일송송 야밤 중에 새별이 어인 말고…’ 하며 낮은 끗발을 한심해하는 노래를 불렀다.
이런 ‘투전불림’에는 새 정치를 갈망하는 어진 백성들의 마음이 담겨 있어 놀이문화에 당시의 정치상황이 배어 있음을 느끼게 한다. ‘전두환 고스톱’ ‘최규하 고스톱’ ‘홍(弘)3 고스톱’, 돼지저금통을 빗댄 ‘칠(홍싸리)10고스톱’ 등은 유행했던 그 시대의 풍자와 맥을 같이해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