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과 천사’. 아브라함 대에 이르러 사람의 수명이 120년으로 줄었다.
그리고 이러한 계보는 성경 전체에 걸쳐 도도한 강줄기처럼 흐른다. 신약 마태복음 첫머리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계보)라’로 시작한다. 이런 계보들은 성(性)을 매개로 하지 않으면 계속될 수 없다.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로 시작되는 창세기 5장을 보면 아담이 130세에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고 그 후 800년을 살며 자녀를 계속 낳았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아담의 수명은 930년이나 된다.
130세에 셋을 낳았으니 아담은 130세까지 성생활이 가능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그 후에도 일정 기간 동안은 성생활이 가능하였으니 자녀들을 계속 더 낳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브가 아담의 배필로 천년해로를 했다면 이브가 낳은 자녀 수는 얼마나 될까. 산아제한도 없던 시대였으니 적어도 수백 명은 낳았을 것이다. 한 여자의 몸에서 수백 명이 태어났다는 것은 참으로 그로테스크한 일이다.
셋은 105세에 에노스를 낳고 그 후에도 807년을 살며 자녀를 두었다. 그와 같이 수백 년 동안 성생활을 했던 사람들의 족보가 이어지다가 노아에 이르러 더 엄청난 사실이 드러난다.
성서에서는 ‘노아가 500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고 하였다. 노아는 적어도 500세까지 왕성하게 성생활을 했다는 말이다. 물론 그 후에도 수백 년 동안 더 성생활을 했다. 노아는 950세에 죽었다.
지상의 성적 타락 본 여호와 ‘사람 수명 120년’ 선포
한 사람이 800년, 900년을 살며 성생활을 이어갔으니 그들 덕분에 인류가 엄청나게 번성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아담의 족보가 일단락된 다음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라는 구절이 나온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면서 성적 타락이 심해진 모양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자를 아내로 삼았는데 거기서 태어난 족속들이 고대의 영웅 네피림들이었다고 한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어떠한 부류인지에 대해 설들이 분분하다. 타락한 천사들이라는 설도 있고 셋의 후예라는 설도 있다.
여호와는 우주적, 혹은 지상의 성적 타락 현상을 보고 “나의 신이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겠다”고 하면서 사람의 수명을 120년으로 줄어들게 할 것임을 선포한다.
성경에 따르면 노아는 500세까지 성생활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노인의 성을 다룬 영화 ‘죽어도 좋아’ 포스터(왼쪽부터).
그런데 노아의 아들 셈은 수명이 무려 600년이나 되어 10대째 아브라함이 태어났을 때도 여전히 살아 있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심지어 아브라함이 죽고 그 아들 이삭이 활동할 때도 셈은 여전히 살아 있다.
또한 아담의 가계 중 969년의 수명을 누려 가장 오래 산 므두셀라는 70인역 성경에 노아의 홍수 이후에도 14년을 더 산 것으로 나와, 노아와 그 세 아들 셈, 함, 야벳으로부터 새로운 인류가 퍼지기 시작했다는 기록을 무색케 한다.
다른 사본에는 므두셀라가 노아의 홍수가 일어난 그해에 죽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홍수가 2월에 일어났으므로 므두셀라는 2월이 되기 전에 병으로 죽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에서 가장 장수한 영예로운 조상이 홍수로 불어난 물에 빠져 죽은 셈이 된다.
여기서 아담의 후예 중 아브라함 이전의 사람들이 과연 수백 년, 심지어는 900년 이상을 살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아담이 930세까지 살았다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한 여호와의 선언이 900여년이 지난 후에야 시행된 셈이다. 지금으로 따지면 사형선고 있은 지 100년 후에 사형이 집행된 것과도 같다. 1000년 만에 시행된 죽음의 형벌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해석 떠나 현대인의 눈으로 봐도 부러운 ‘노년의 성’
어떤 사람들은 아담이 죄를 지은 지 얼마 되지 않고 에덴동산에서 먹은 생명나무 실과의 효험도 지속되고 있으며 대기오염이나 환경오염 같은 것도 없었으므로 아담과 그의 초기 후손들은 그렇게 긴 수명을 누리며 수백 년 동안이나 성생활이 가능할 정도의 건강을 유지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다 인간들이 점점 타락하고 지구가 오염됨으로써 수명이 짧아지고 성생활도 빨리 끝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신학자들은 계보 중에 빠진 사람들의 생존년수까지 합해졌기 때문에 수명이 수백 년씩 길어졌다고도 하고, 어떤 이들은 아담이니 셋이니 하는 이름이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왕조의 이름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중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은 흔히 ‘연’ ‘해’ ‘세’로 번역해놓은 히브리어 ‘싸네’가 그 당시에는 과연 얼마만큼의 기간을 뜻하였을까 하는 차원에서 접근하는 학설이다. ‘싸네’의 의미를 연구한 라스케(Raske) 같은 신학자는 근동의 다른 신화들과 비교하여 ‘싸네’가 석 달이나 한 달 정도의 기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성서에 기록된 숫자를 그대로 믿든, 다른 식으로 해석해서 받아들이든 숫자 그 자체는 큰 의미가 없는 셈이다. 그 계보는 연대기라기보다 구속사(救贖史)적인 맥락을 보여주는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 계보를 연대기로 보고 숫자 계산을 하다 보니 지구의 나이가 6000년밖에 안 되었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그렇게 계산하면 우리 민족의 조상 단군과 아담이 동시대에 살았던 것이 된다.
환경오염이 심해지고 남녀의 성생활 기간이 짧아져가는 요즘, 창세기 5장에 기록된 수백 년간의 성생활이 숫자에 대한 해석 문제를 떠나서 부러운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 부러움이 비아그라 같은 약들을 생산하게 하고 또 널리 팔리게 하는지 모른다.
물론 요즘에도 술과 담배를 멀리하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몸에 좋은 음식만 골라 먹는 등 긍정적인 생활습관을 기르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장수하면서 70, 80세가 넘어서도 성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40, 50대에 발기부전으로 성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건강을 상하게 하는 어떤 요인들을 생활 속에서 키워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어떤 목사는 수백 년 동안 성생활을 할 수 있었던 인류 초기의 조상들을 본받아 우리도 하나님을 잘 섬기면 오래오래 성생활을 누릴 수 있다고 설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 구절에 지나치게 집착한 해석인 것 같다.
2002년 11월 말에 여러 논란 끝에 70대 노인들의 성을 다룬 박진표 감독의 첫 장편영화 ‘죽어도 좋아’가 무삭제 필름으로 개봉된 바 있다.
칠순의 박치규가 비슷한 나이의 이순예를 공원에서 우연히 만나 첫눈에 반하게 된다. 이순예는 보따리를 싸들고 박치규 집으로 들어오고 두 사람은 정화수 한 그릇을 떠놓고 결혼식을 올린다. 그 후 누추한 공간에서이긴 하지만 두 노인의 뜨거운(?) 성행위가 펼쳐진다. 성의 기쁨과 쾌락을 맛보다가 죽어도 좋다는 의미가 영화제목 속에 담겨 있다. 그야말로 조르주 바타유가 말한 대로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으로서의 에로티시즘이다.
모두들 건강을 잘 유지하여 수백 년간 성생활을 하지는 못하더라도 70대에도 성생활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긴 80, 90대판 ‘죽어도 좋아’가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