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히 달라진 우리 사회의 일면이기는 하다. 20년 전만 해도 우리의 의식 속에는 남녀 차별이 심한 유교 문화의 잔재가 남아 있어서 부부가 합의 하에 집단 성관계를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대개 남편이 아내 외에 첩을 거느리거나 아니면 아내 몰래 바람을 피우는 것이 왜곡된 우리 성문화의 전형이었다. 유부녀가 남편이 아닌 남자와 내놓고 성관계를 즐기는 풍조는 최근에서야 나타나고 있는 사회적 변화다.
그래서 스와핑은 우리의 성문화가 매춘이나 외도 같은 성관계 ‘대상을 선택’하는 문제가 아닌, 단지 쾌락을 위한 성적 환상의 실현, 즉 성관계 ‘방식’의 문제가 될 것임을 시사한다는 데 의미가 있어 보인다.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휴대전화에 이르기까지 언어나 관념을 넘어서 먼저 비주얼로 연결되며 소통하고 있다. 남을 보는 것은 이제 현대인에게는 하나의 정신적인 만족감의 수단이 되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이제는 하루 24시간 내내 누군가와 함께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개인간의 공유성, 집단성이 더욱 확대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헤쳐 모여, 모였다 헤쳐’식 관계는 인간관계를 게임 수준으로 전락시켜 스와핑과 같은 현상을 야기하는 부작용도 낳고 있다.
건강한 의미의 결합과 공유 아닌 엉겨 붙은 덩어리화 현상에 불과
여기에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요즘 우리나라의 분위기에서 골치 아프게 고민하는 대신 나만의 쾌락을 추구하며 살겠다는 심리도 스와핑 문화에 일부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스와핑을 아직은 사회적 문제로 해석할 단계가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당사자 개인들의 정신적인 면을 더 중요하게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결혼해 배우자와만 은밀한 성관계를 하게 된 것은 역사적으로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라고 한다. 초기 인류는 동굴이나 해변가에서 아무하고나 섹스를 하며 살았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정신갈등의 핵심’이라는 프로이트의 주장은 사실 근친상간 금지가 인간 개개인의 정신적인 발달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 외에도 인류문명 발달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을 함께 설명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의 본능만 쫓아가보면 그 밑바닥에는 대상이나 방식의 제한 없이 성적인 만족을 얻으려는 강렬한 욕구가 깔려 있고, 이것을 억압하고 승화하는 것이 정신력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또 클라인 등의 정신분석가들이 일찍이 주장했던 것처럼 모든 아기는 태어난 지 수개월 이후부터 무의식적으로 엄마 아빠의 성관계 사실을 알고 있는데 처음에는 엄마가 아빠의 성기를 품고 있는 것으로, 좀더 지나면 엄마와 아빠가 서로 괴롭히거나 상해를 입히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원초경’을 어떻게 정신적으로 이해해가는지가 그 아기의 향후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엄마 아빠가 한 덩어리가 아니고 사실은 분리된 두 사람으로서 서로 성관계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시점부터 내재화나 상징성 등의 중요한 정신발달이 촉진된다고 한다.
배우자가 내 앞에서 다른 사람과 난잡한 성관계를 하는 것을 보고 쾌락을 느끼는 것은 영아기 때 부모의 섹스 앞에서 불안과 공포, 쾌감을 동시에 느꼈던 정신상태를 그 부모의 나이가 되어 적극적으로 재현해보는 현상이다.
따라서 스와핑이 성적 환상을 공유하고 극대화하는 집단 히스테리처럼, 또 부부간의 동질감을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겉모습일 뿐이다. 이것은 건강한 의미에서의 결합과 공유가 아니라 나와 남의 경계를 무시하고 엉겨 붙어서 덩어리처럼 되는 현상일 뿐이다. 그 안에서는 나 자신의 정체성이 일시적으로 무너지고, 따라서 남편인 동시에 아들이나 오빠, 부인인 동시에 딸이거나 누나이고 싶은 근친상간적인 욕구만이 충족된다. 즉 정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좀더 분화되고 정제되어가는 것이 우리가 성장해가는 것이라면 스와핑은 이러한 문명화에 대한 거부, 정신적으로는 유아기로의 퇴행을 행동화하는 양상으로 생각할 수 있다.
대개 남편이 아내 외에 첩을 거느리거나 아니면 아내 몰래 바람을 피우는 것이 왜곡된 우리 성문화의 전형이었다. 유부녀가 남편이 아닌 남자와 내놓고 성관계를 즐기는 풍조는 최근에서야 나타나고 있는 사회적 변화다.
그래서 스와핑은 우리의 성문화가 매춘이나 외도 같은 성관계 ‘대상을 선택’하는 문제가 아닌, 단지 쾌락을 위한 성적 환상의 실현, 즉 성관계 ‘방식’의 문제가 될 것임을 시사한다는 데 의미가 있어 보인다.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휴대전화에 이르기까지 언어나 관념을 넘어서 먼저 비주얼로 연결되며 소통하고 있다. 남을 보는 것은 이제 현대인에게는 하나의 정신적인 만족감의 수단이 되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이제는 하루 24시간 내내 누군가와 함께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개인간의 공유성, 집단성이 더욱 확대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헤쳐 모여, 모였다 헤쳐’식 관계는 인간관계를 게임 수준으로 전락시켜 스와핑과 같은 현상을 야기하는 부작용도 낳고 있다.
건강한 의미의 결합과 공유 아닌 엉겨 붙은 덩어리화 현상에 불과
여기에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요즘 우리나라의 분위기에서 골치 아프게 고민하는 대신 나만의 쾌락을 추구하며 살겠다는 심리도 스와핑 문화에 일부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스와핑을 아직은 사회적 문제로 해석할 단계가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당사자 개인들의 정신적인 면을 더 중요하게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결혼해 배우자와만 은밀한 성관계를 하게 된 것은 역사적으로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라고 한다. 초기 인류는 동굴이나 해변가에서 아무하고나 섹스를 하며 살았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정신갈등의 핵심’이라는 프로이트의 주장은 사실 근친상간 금지가 인간 개개인의 정신적인 발달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 외에도 인류문명 발달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을 함께 설명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의 본능만 쫓아가보면 그 밑바닥에는 대상이나 방식의 제한 없이 성적인 만족을 얻으려는 강렬한 욕구가 깔려 있고, 이것을 억압하고 승화하는 것이 정신력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또 클라인 등의 정신분석가들이 일찍이 주장했던 것처럼 모든 아기는 태어난 지 수개월 이후부터 무의식적으로 엄마 아빠의 성관계 사실을 알고 있는데 처음에는 엄마가 아빠의 성기를 품고 있는 것으로, 좀더 지나면 엄마와 아빠가 서로 괴롭히거나 상해를 입히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원초경’을 어떻게 정신적으로 이해해가는지가 그 아기의 향후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엄마 아빠가 한 덩어리가 아니고 사실은 분리된 두 사람으로서 서로 성관계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시점부터 내재화나 상징성 등의 중요한 정신발달이 촉진된다고 한다.
배우자가 내 앞에서 다른 사람과 난잡한 성관계를 하는 것을 보고 쾌락을 느끼는 것은 영아기 때 부모의 섹스 앞에서 불안과 공포, 쾌감을 동시에 느꼈던 정신상태를 그 부모의 나이가 되어 적극적으로 재현해보는 현상이다.
따라서 스와핑이 성적 환상을 공유하고 극대화하는 집단 히스테리처럼, 또 부부간의 동질감을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겉모습일 뿐이다. 이것은 건강한 의미에서의 결합과 공유가 아니라 나와 남의 경계를 무시하고 엉겨 붙어서 덩어리처럼 되는 현상일 뿐이다. 그 안에서는 나 자신의 정체성이 일시적으로 무너지고, 따라서 남편인 동시에 아들이나 오빠, 부인인 동시에 딸이거나 누나이고 싶은 근친상간적인 욕구만이 충족된다. 즉 정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좀더 분화되고 정제되어가는 것이 우리가 성장해가는 것이라면 스와핑은 이러한 문명화에 대한 거부, 정신적으로는 유아기로의 퇴행을 행동화하는 양상으로 생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