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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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값 할인 ‘해피아워’ 이제 그만!

영국 퍼브 판촉 경쟁 습관적 음주 급증 … 범죄 등 年 40조원 비용 손실 대책 소매 걷어붙여

  • 안병억/ 런던 통신원 anpye@hanmail.net

    입력2003-10-23 13: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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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값 할인 ‘해피아워’ 이제 그만!

    2002 한·일 월드컵 기간 중 축구경기를 보기 위해 퍼브에 모여든 영국인들.

    런던 중심부에 있는 소호 지역. 트라팔가르 광장과 내셔널 갤러리, 차이나타운을 끼고 있는 이 지역은 예술가와 작가들의 거리로 유명하다. 이곳은 예술가의 구역일 뿐만 아니라 화려한 밤문화를 자랑하는 거리다. 수십개가 넘는 퍼브와 나이트클럽이 즐비해 있기 때문이다.

    이곳의 퍼브는 술집의 역할만 하는 게 아니다. 점심때에는 다양한 음식메뉴로 손님을 끌고 프로축구 경기가 있는 날에는 대형 멀티비전을 설치해놓고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리고 그런 날이면 평소의 반값, 혹은 그 이하의 값에 맥주나 포도주를 제공한다. 이렇다 보니 몰려드는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루어 이 지역의 퍼브들은 짭짤한 재미를 보아왔다. 퍼브에 모여 위성방송으로 중계되는 프로축구 경기를 시청하는 모습은 영국의 한 풍속도이기도 하다.

    그런데 최근 주로 축구경기가 있을 때 제공되던 술값 할인시간(해피아워)이 거의 매일 특정 시간대로 확대되고 있다. 또 퍼브끼리 경쟁이 붙으면서 손님에게 공짜로 술을 주는 곳까지 생겨났다. 그러자 지방자치단체와 퍼브협회가 해피아워 시행을 자제해줄 것을 당부하고 나섰다. 싼 술값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는 애주가가 늘어나면서 범죄가 늘고 과음에 따른 사고로 인한 의료비 부담도 급증했기 때문이다.

    소호 지역의 한 퍼브가 시행한 해피아워의 내역을 보자. 이 퍼브는 매일 오후 8시부터 10시까지를 할인시간으로 정했다. 평소 때는 1파인트(569cc)에 3파운드(약 6000원) 하는 기네스 생맥주를 해피아워 때에는 절반도 안 되는 1파운드30펜스에 판다. 또 5파운드를 내면 보드카를 무제한으로 마실 수 있다. 덕분에 해피아워를 시행한 날에는 손님이 평소의 50%나 급증, 이 퍼브는 싼 술값에도 불구하고 더 높은 매상고를 올릴 수 있었다.

    공짜 술에 취해 패싸움·고성방가



    술값 할인 ‘해피아워’ 이제 그만!

    습관적 애주가와 마찬가지로 축구 경기장의 훌리건들도 대부분 술에 취한 사람들이다.

    이 지역의 다른 퍼브들도 경쟁적으로 비슷한 내용의 해피아워를 정해 영업했다. 맨체스터나 버밍엄 등 다른 대도시로도 이런 판촉경쟁이 번졌다. 인구 10만명의 소도시이자 유명한 대학도시 케임브리지에 있는 수십개의 퍼브까지 해피아워를 지정, 손님을 유혹하는 데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해피아워가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맨체스터에서는 해피아워에 술을 마신 손님들이 패싸움을 했는가 하면, 지나가는 사람들을 희롱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또 고성방가를 하는 등 반사회적인 행위도 늘어나 주민들의 불만을 샀다. 경찰도 술값 할인경쟁 때문에 범죄가 급증했다며 치안유지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영국 내무부는 범죄 발생 통계를 인용, 술을 마신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범죄를 저지를 확률이 3배나 높다고 분석했다.

    술값 할인 ‘해피아워’ 이제 그만!

    술 마시고 말썽을 일으키는 습관적 애주가들은 영국 경찰의 골칫거리다.

    특히 습관적으로 술을 마시고 반사회적인 행위를 하는 20대 남녀(습관적 애주가는 짧은 시간에 2000cc의 맥주를 마시는 남자, 혹은 1500cc의 맥주를 마시는 여자를 말한다)의 비율이 늘어난 점이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었다. 영국인들은 성인이 되는 18세부터는 술을 마실 수 있는데 이때부터 24세까지의 성인 가운데 무려 40%가 습관적으로 술을 마시고 말썽을 일으키는 것으로 밝혀졌다. 10년 전과 비교해 두 배나 늘어난 수치다. 특히 남자뿐만이 아니라 20대 여성이 과음으로 인한 간질환 때문에 병원을 찾는 일이 늘어났다. 의사들도 이 문제의 심각성을 정부에 알리고, 대책 마련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젊은이들 가운데 습관적 애주가가 늘어난 것이 해피아워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술값 할인경쟁이 애주가를 유혹한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이는 당장 의료비 급증과 노동시간 손실이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영국 내무부가 발표한 보고서 ‘음주의 사회적 비용’을 보면 1년에 음주로 인해 200억 파운드(약 40조원)의 비용이 발생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음주로 인해 발생한 범죄를 처리하는 데 73억 파운드, 음주에 따른 사고 치료비로 17억 파운드, 음주에 따른 노동시간 손실로 64억 파운드 등의 비용이 드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처럼 음주에 따른 부작용이 커지고 해피아워가 이를 부추긴다는 지적이 계속되자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도 대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술값 할인 ‘해피아워’ 이제 그만!

    런던 거리에서 술 마시고 있는 노숙자.

    우선 구청이나 시청 등 지방자치단체는 퍼브협회와 이 문제를 논의, 해피아워를 자제하기로 결의했다. 퍼브끼리의 자율규약이지만 이를 위반하는 퍼브에 술을 대주지 않기로 한 이 결의는 런던이나 맨체스터 등 대도시에서는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퍼브협회의 마크 헤이스팅스 대변인은 “과도한 음주를 부추기는 모든 영업은 무책임한 판촉이다”라며 “회원사들이 해피아워의 부작용을 인식, 문제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퍼브협회는 또 가격담합을 벗어난 범위에서 한 잔당 최소가격을 지정, 이 가격을 지키도록 유도하고 있다. 예컨대 맥주 1파인트에 최소한 10펜스, 우리 돈으로 200원 정도는 해야 한다는 것 등이다.

    이와 함께 퍼브협회는 퍼브 주인에게 직원교육을 강화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이전에는 취한 손님에게 “손님, 죄송하지만 취하셨습니다. 더 이상 술을 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주인을 흔히 볼 수 있었지만 이제는 이런 주인이 별로 없다는 것. 따라서 주인이 나서서 직원들에게도 취한 손님을 다루는 법을 가르쳐 취객이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게 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또 지방자치단체들은 금요일과 토요일에 심야버스를 배차해 술 취한 애주가의 귀가를 돕고 있다. 실제로 심야버스 노선을 늘리거나 도입한 도시에서는 음주에 따른 범죄발생률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담뱃갑에 부착된 경고문이 적힌 종이를 술병에 부착하도록 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영국의 퍼브들은 보통 정오에 문을 열어 밤 11시에 문을 닫는다. 문 닫기 10분 전에는 종을 울려 마지막 주문을 받는다. 2002 한일 월드컵 기간 중에는 한국, 일본이 영국과 8시간 시차가 났기 때문에 오전 8시나 9시에 퍼브가 문을 열었다. 이럴 경우 시청이나 구청으로부터 사전허가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2005년부터는 퍼브의 24시간 영업이 허용된다. 이에 따른 고용 창출과 경제활성화 등의 긍정적 효과가 많이 부각되었지만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는 퍼브의 영업시간이 늘어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다. 또 일부 하원의원도 퍼브의 영업시간 연장이 공동체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거론하고 나섰다.

    퍼브협회가 적극적으로 해피아워 자제에 나서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24시간 영업이 가능한 법을 통과시키기 위해서지만, 또 하나의 이유는 퍼브가 영국인의 일상생활에서 차지하는 위치 때문이다. 영국인들에게 퍼브는 단순한 술집 이상의 역할을 한다. 어느 지방을 방문해도 몇 백년 역사를 자랑하는 퍼브가 있고 그 퍼브가 자랑하는 음식메뉴가 있으며 대를 이어가며 퍼브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있다. 각 지역의 유명한 퍼브와 음식메뉴를 소개하는 책도 잘 팔린다. 이처럼 영국만의 독특한 퍼브 문화를 지켜나가기 위해 퍼브 주인들이 지나친 장삿속을 자제하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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