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의 주인공들인 정현준 진승현 이용호씨(왼쪽부터). 정관계 인사들의 연루 의혹이 잇따라 제기되고 있는 휴먼이노텍 대표 이성용씨 사건이 또 다른 ‘게이트’로 비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성용 김영준 김천호씨 등 D상호신용금고 불법대출 사건의 핵심인사들에 대한 검찰 수사가 진행되면서 휴먼이노텍 대표 이성용씨(39·구속 수감중)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이씨는 김대중 정권 내내 실세로 통했던 박지원 전 대통령비서실장에게 청탁 명목으로 4000만원을 건넸다는 진술을 했다가 번복했던 장본인. 일각에선 이씨가 접근하려고 했던 정관계 인사가 박지원 전 실장뿐이었겠느냐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이씨가 부친이 과거 국회에 몸담고 있었다는 점을 이용, 정계 인사들과 폭넓게 접촉하고 있었다는 얘기도 들린다. 특히 한 이씨 주변인사는 한나라당 소속 거물급 의원이 이씨 주례를 섰다고 증언했다. 이씨의 정관계 로비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이뤄졌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 의원은 “이씨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런 이씨가 새삼 관심을 끄는 까닭은 그가 김대중 정부에서 잇따라 터졌던 ‘벤처 게이트’의 원조 역할을 했다는 점. 당시 ‘벤처 게이트’는 젊은 벤처 기업가들이 부실 상호신용금고를 인수해 불법대출을 받아 주가 조작 등을 통해 코스닥 붐을 타고 하루아침에 거부로 올라섰다는 공통점이 있다. 검찰 관계자는 “이용호 김영준씨가 이성용씨의 수법을 따랐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성용 사건은 김대중 정권 내내 끊이지 않았던 금융사기의 ‘전형’인 셈이다.
두 차례 형집행정지 석방에 ‘의혹’
이성용씨는 1997년 3월, 4월 각각 동신제지와 소리샘텔레콤을 인수 합병(M&A)한 데 이어 그해 9월 신호그룹 계열사인 온양상호신용금고와 신호정보통신 모나리자 등을 전격 인수하면서 재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동신제지 인수는 이씨의 치밀한 각본에 의한 것이었다. 회사 빚을 떠맡는 조건으로 수백억원의 부채를 안고 있던 동신제지를 인수,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금융사기의 발판을 마련한 것. 상장회사를 확보한 이씨는 50억원을 대출받아 상호신용금고(피엔텍파이낸스)를 설립한 뒤 회사 돈을 수시로 꺼내 쓰며 기업사냥에 나섰다. 이렇게 번 돈으로 이씨는 서울 강남의 빌딩을 비롯해 수십억대의 부동산을 사들였다고 한다. 당시 검찰 수사관들은 이씨의 화려한 생활에 혀를 내둘렀다는 후문이다.
외환위기 직후 부실 신용금고들은 사기꾼들의 호주머니나 다름이 없었다. 경영난으로 시장에 쏟아져 나온 신용금고 중 일부는 구매자가 연대보증을 함께 떠안는 형식으로 오히려 돈을 받고 인수하기도 했을 정도. 정관계 로비는 부실 신용금고를 이용해 금융사기를 벌이는 과정에서 금융감독원 등의 조사를 무마하기 위한 차원에서 이뤄졌다. 이씨는 1998년 자신이 운영하던 회사인 피엔텍의 은행대출금과 회사 공금 등 1032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 기소돼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 사기행각을 벌이는 과정에서 정관계 로비가 있었을 것이라는 의혹이 불거졌지만, 당시엔 로비 관련 수사가 거의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는 2000년 4월과 2002년 12월 건강상의 이유로 형집행정지를 받아 석방됐다 재수감됐는데, 중형을 선고받은 이씨가 두 차례나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것에 대해서도 로비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이씨는 첫번째 형집행정지 기간중에 추가로 50억원대 주가 조작과 80억원대 자금횡령 등의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드러나 지난해 12월 말 추가 기소됐다. 검찰은 D금고의 자금을 불법대출, 이를 기업 인수자금으로 사용한 김영준씨를 조사하면서 이씨가 불법대출과 정관계 로비에 관여한 혐의를 포착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원활한 수사를 위해 D금고 불법대출 사건과 관련, 김씨와 함께 이씨를 서울구치소에서 수원구치소로 옮겨 수원지검 특수부 조사를 받게 조치했다고 한다.
현재 이씨와 김씨가 입을 열면서 금융사기를 벌이는 과정에서 정치권에 로비를 한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검찰은 2001년 6월 이씨측이 상장사인 경기도 K물산의 공장부지 1700여평을 아파트 건축이 가능한 토지로 용도변경하는 과정에서 고위 공무원들에게 금품 로비를 시도한 사실을 밝혀내고 실제 로비가 이뤄졌는지 여부를 조사중이다. 김씨로부터 D통신 OA 부문을 헐값에 인수하는 데 도움을 주는 대가로 1억원을 받은 혐의로 민주당 김방림 의원이 2월4일 구속됐고, 김의원이 김천호씨가 건넨 1000만원을 민주당, 한나라당 현역 의원의 후원회 계좌로 입금한 사실도 확인됐다. 또 김씨로부터 D금고에 대한 금융감독위원회의 감사를 무마해주는 대가로 2000만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는 한나라당 이양희 의원은 3월4일 검찰에 자진 출두, 조사를 받았다.
박지원 前 실장 강도 높게 조사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기업을 인수합병하며 호화생활을 한 이씨의 사례는 지난 정권 시절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각종 게이트 사건의 ‘뿌리’를 짐작케 한다. 금융사기꾼들과 정관계 인사들의 ‘검은 카르텔’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최근 검찰 조사를 바라보는 시장의 반응은 냉담하다. ‘비밀 아닌 비밀’이 이제야 드러나고 있다는 것. 2000년 말 한창 벤처 비리가 불거져 나오던 시절, 서울 여의도 증권가에선 “정권만 바뀌면 불거질 일이 한둘이 아닐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심지어 “벤처 돈 못 먹으면 바보”라는 얘기까지 파다했다. 결국 이런 루머들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부정이 자행되고 또 그대로 묻힐 뻔한 몇몇 사례들로 인해 더욱 힘을 얻게 됐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검찰이 배후 커넥션을 일목요연하게 밝히지 못하면 본질을 빗나간 미봉수사라는 지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관-금융-벤처의 ‘만악의 저수지’가 뿌리째 드러날 수 있을지 주목되는 가운데 ‘게이트’로 불거지고 있는 이성용 사건은 그 출발점인 듯하다.
한편 박지원 전 대통령비서실장에 대한 조사는 일부 언론의 보도와 달리 강도 높게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실장은 처음엔 조사에 응하지 않으려고 했다고 한다. 1월7일이면 공소시효가 지난다는 사실을 인지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박 전 실장은 예상과 달리 조사 강도가 높고 시간도 오래 걸리자 상당히 당황했다고 한다. 또 박 전 실장 주변인사에 대한 계좌추적 없이 사건을 종결했다는 일부 언론의 보도와 달리 검찰은 박 전 실장 주변인사의 계좌도 모두 조사했다. 검찰은 계좌추적을 하지 않았다고 보도한 언론을 상대로 소송을 내는 것을 신중히 검토하고 있다는 후문이다.